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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치비화(7) / 일제의 야만적 침략에 조선인들 곳곳서 무장 투쟁
조선통치비화(7) / 일제의 야만적 침략에 조선인들 곳곳서 무장 투쟁
  • 박장미 기자
  • 승인 2017.09.03 2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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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독·총감의 임명에서 부임까지(3)
1919년 남대문 역에서 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강우규(1855~1920) 선생.

● 남대문 폭탄 소동
다음날 오전 9시 부산 부두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호텔에서 접견을 마치고 그 날 밤 총독과 정무총감은 대지(大池)여관에 투숙하게 되었습니다. 아케이케, 니시무라 등 두 국장과 마루야마, 세키스이, 야마시다 등 세 부장들은 아침에 급행을 타고 경성으로 직행했습니다. 조선에서도 교토에서 받았던 것과 똑같은 정보가 입수되었는데, 조선의 형세가 정말 심상치 않았습니다.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부산·대구·경성 등 곳곳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도 들어 왔습니다. 이러한 처지였기 때문에 9월 2일 오전 7시에 출발하도록 예정되었던 기차는 그 편성을 바꾸기 위해 출발이 연기되었고 무장한 군대가 함께 기차를 타고 총독 일행을 경호할 수 있도록 계획이 변경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가를 대변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기차에는 조선황실의 이왕과 비전하의 명을 받고 파견되어 온 엄(嚴)사무관과 총독부 관리를 대표해서 온 고쿠분산가이(國分三亥)씨 등이 마중을 나와 동승했습니다. 그리고 귀족단 대표로 이완용 백작이 함께 탔습니다. 기차 연도에서는 아무 일이 없었고 대구에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해는 한해(旱害)가 극심했던 해로 충청남·북도에 접어들자 벼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대로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이 차창을 통해 보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한쪽에서는 정치적 소요로, 다른 한쪽에서는 흉작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한쪽에서는 콜레라가 전도에 걸쳐 유행하고 있어 실제적으로 1919년이라는 해는 조선에서는 여러 방면으로 볼 때에는 다사다난한 가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오후 5시에 남대문 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에도 많은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총독부 관리·조선 귀족·이왕실 직원·지방청 관공리·경성에 근무하는 각국 영사·민간인 대표자 등이 구내 통로가 협소한 관계로 2열로 정렬해 있었고 그 사이를 총독과 정무총감 두 분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통과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귀빈실 옆을 지나 정거장 앞에 있는 광장으로 나와 그곳에 준비되어 있는 마차를 타고 관저로 향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사이토 총독은 도쿄 역에서 출발할 때는 후로크 코트를 입고 출발하셨는데 당시 해군대장이라는 현직에 있었고 더욱이 총독 취임을 위한 예포의식이 있을 것이라는 관계로 수원에서 해군대장 군복으로 갈아 입으셨습니다. 총독과 총감의 열차가 남대문 역에 도착하자 17발의 예포가 힘차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정거장 앞에 있는 광장에는 경찰관·헌병·군대가 힘을 합하여 정돈을 하고 있었지만 새 총독과 정무총감 부임의 화려한 광경을 보려고 몰려든 민중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혼잡했습니다. 그 때 나는 총독과 함께 마차를 타도록 되어 있었으나 오사카 호텔에서 보이가 수하물을 내릴 때 잘못하여 내 후로크 코트가 들어 있는 가방을 싣지 않았기 때문에 흰 여름 삼베옷 밖에 입지 못한 관계로 장엄한 의장병의 정식 행렬 선두에서 이런 복장으로 선다는 것이 예의에 어긋날 것이라 생각되어 후로크 코트를 입고 있는 이토 비서관에게 내대신 선두에 서게 하고 나는 미즈노총감과 함께 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총독과 영부인 쪽을 이토씨가 수행하게 되었고 나는 미즈노총감과 영부인을 수행하여 귀빈실 옆을 지나 역 광장 쪽으로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장을 향해 의장병이 사열하고 있었고 그 옆에 총독·총감을 태울 마차가 움직여 귀빈실 앞에 멈추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의병장은 원을 그리고 총독 마차 앞에 정렬하기 위해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총독과 부인이 마차를 타자 이토씨도 탔습니다. 일동은 손을 들어 경례로 답하는 중에 백발동안의 총독을 태운 마차가 대기소에서 나와 지금 막 나간 총독의 마차가 있었던 곳에 멈추었습니다. 마차에 타려고 미즈노총감과 영부인에 이어 내가 가까이 가려고 하는 찰나였습니다. 연기에 쌓인 불꽃이 지상에서 파열할 때와 같은 소리, 둔하면서도 커다란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나는 예포소리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하고 지금 이런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즉시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로 내 발밑에 심부름꾼인 듯 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뒹구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귀빈실에 가까이 있던 찻집 앞 군중들이 앞줄에 있었던 사람들 사이에 심상치 않은 동요가 일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고 특히 그 중에서 서양인 부인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때 누구라 할 것 없이 “폭탄이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나는 도대체 총독의 마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이 되어 즉시 그 뒤를 쫓아 가 보았습니다. 총독의 마차는 유유히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고 하얀 예장을 한 총독의 뒷모습이 확실히 보였기 때문에 “아, 아무 일도 없구나!”하고 즉시 본래의 장소로 돌아왔습니다. 미즈노 총감과 영부인이 마차에 타려던 참이었기 때문에 나도 그 뒤에 탄 후, 총독이 탄 마차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 사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지극히 혼잡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아마 10분 정도가 경과됐다고 생각됩니다.

폭탄은 진행하고 있던 총독의 마차와 총감의 마차 사이 한가운데 투하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총독의 마차는 뒤쪽에서 폭탄의 파편을 맞았고, 총감의 마차는 정면으로 맞게 됐던 것입니다. 또 찻집 앞쪽에 서 있었던 신문기자, 통신원 및 그밖에 사람들에게 심한 타격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무라다(村田) 육군소장, 고무다(小牟田) 명동(本町) 경찰서장, 구보(久保) 만철이사, 다치바나(橘) 오사카아사히 신문기자, 야마구치 오사카마이니치신문기자를 비롯해 수십 명이 중경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총독이 탄 마차 속에는 파편이 4개나 들어갔고, 그 중 한 개의 파편이 총독의 허리띠에 맞았습니다. 후에 총독이 옷을 벗고 자세히 보니 허리띠 밑 피부가 빨갛게 부어올라 피가 배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총감이 탄 마차 쪽에도 역시 파편이 날아들어 말 한 마리가 종아리와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마부는 왼팔에 부상을 입어 피를 줄줄 흘렸습니다. 남대문역 앞을 떠날 때에는 너무 급한 상황이어서 정신이 없어 잘 몰랐는데, 한참 가다가 마부가 고통을 호소해 와 총감 영부인이 약을 주어 기력을 회복시켰습니다. 이렇게 마차는 행진을 계속했지만, 말이 입은 부상은 아주 심해 총독관저에 이르자마자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총감과 영부인은 마차에서 내려 걸어서 총독관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이변에 대한 사이토 총독의 태도는 너무나도 태연자약한 것이었습니다. 총독이 조난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줄을 이어 뵈러 온 여러 신문기자들에게도 “본인은 부임 전 이미 목숨을 국가에 바쳤기 때문에 폭탄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또 폭탄 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정치방침을 바꾸는 일 등은 단연코 없을 것이다. 기정방침을 한 치도 바꿀 생각이 없다.”는 점을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사는 그 당시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되었고, 이변에 대한 총독의 태도는 가는 곳마다 칭송되었지만, 웬일인지 미즈노 총감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잘못 전하는 내용이 너무 많아 참으로 가련할 지경이었습니다. 즉 미즈노 총감은 폭탄이 겁이나 폭탄이 투하되었다는 것을 알고 귀빈실 쪽으로 도망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많아졌고, 그것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지금도 일부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퍼져 있어 실제 체험자인 나로서는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한번 ‘조선공론’에 공포하여 이것은 사실무근이라는 것을 천하에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공론’은 그렇게 일본에 알려져 있지 않은 잡지이기 때문에 아직도 일반인들의 오해를 충분히 풀 수가 없어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미즈노 정무총감과 마차를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단 일 분 정도 총독의 마차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고자 그 옆을 떠났을 뿐, 그 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즈노 총감 및 영부인과 행동을 같이 했었기 때문에 소문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단언할 수 있습니다.

실제 상황을 말씀드리려 해도 폭탄이 파열한 순간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부상당한 사람은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즉시 실감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놀랄 틈도 없었다는 것이 그 때의 상황입니다. 특히 그 때 나는 미즈노 총감의 바로 옆에 있어 실제 상황을 잘 알고 있는데 총감 역시 얼굴색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태연한 태도로 일관하셨습니다. 적어도 앞에서 말한 세간 사람들이 말하는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은 제가 실제로 목격한 바입니다. 사이토 총독과 똑같이 예기치 않았던 이변을 만나자, 태연자약한 태도로 행렬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제 명예를 걸고 명료하게 밝힘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풀어 드리고 싶습니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매일신보(1919년 9월 10일자).

● 폭탄 소동의 진상
▷미즈노 “9월 2일 경성에 도착했을 때 남대문 역 앞에서 폭탄이 투하되었던 광경은 지금 모리야군이 말한 그대로 입니다. 그러나 당시 미즈노는 겁에 질려 있었다는 사실이 신문에 실렸고, 나 자신에 대한 인물평을 실었다하면 꼭 이 일을 사실처럼 전하고 있어 본인으로서는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바입니다. 제가 공직생활을 하고 있는 이상 항상 저는 훼예포폄(毁譽褒貶)은 물론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조선에 부임함에 있어 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는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던 바였고 폭탄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겁을 먹었다던가, 겁에 질렸다하는 선전은 실로 내 심정을 알지 못하는 유감 천만의 일입니다. 어쨌든 여러 가지 내용이 신문에 실렸을지 모르지만 나는 당시 이 사실을 일소에 붙이고 이에 대한 한마디 변명이나 해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이 사실이 신문에 실린 것은 사건 직후가 아니라, 사건 후 일주일이나 지난 때였습니다. 조선에 관한 일이니까 그 이상의 어떤 중상모략을 하기 위해 그런 말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 않은 바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새삼스럽게 그런 잘못된 보도나 와전에 대해 항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세상에 호랑이를 풀어놓는 것과 같다는 속담처럼 유언비어는 세상을 그르치고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9월 2일 5시경 경성 역에 도착하자 플랫폼에는 이왕 및 이왕비 양전하가 보낸 특사를 비롯하여 각 관청의 고등관·조선 귀족·각국 외교단 등 마중 나온 사람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습니다. 기차에서 내린 총독의 부처와 우리 부처는 일일이 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역 출구로 나왔습니다. 총독부처 및 이토 비서관은 한 발 먼저 나와서 마차에 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인사하는데 조금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에 총독이 탄 마차를 멀리서 보고 나서야 서둘러 역 출구로 나가려고 하였던 차였습니다. 그 순간 불꽃이 튀어 오르는 듯 한 소리가 났습니다. 역 출구로 나가자마자 한 서양 부인이 울부짖으며 역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어서 변호사 아사쿠라(朝倉外武鐵)군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상처부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나는 지금 난 소리가 폭탄소리였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역 출구에 나와 보니 총독이 탄 마차는 이미 전진하여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탈 마차가 오지 않는 거예요. 출구에 서서 역전광장을 보니, 군중이 우왕좌왕하고 있더군요. 한참을 기다려도 마차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마츠나가(松永) 경기도 지사가 내가 있는 쪽으로 와서 “각하가 타실 마차의 말이 다쳐 총독의 행렬을 뒤쫓아 갈 수가 없게 됐습니다.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역 출구에 서서 군중들의 혼잡한 상황을 보고 있었죠. 이렇게 10분 정도 지났다고 생각될 무렵 마츠나가 지사가 와서 역 출구에서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있는 마차로 안내 해 주었습니다. 그 마차를 타고 총독관저로 향했지요. 총독이 탄 마차보다 10분 정도 늦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도중에 광경을 보니 길에 있던 구경꾼들도 이미 산산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마차에 탄 후 마부에게 물어보니 말 한 마리가 종아리에 파편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마부의 손에도 파편이 튀어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처가 마부에게 인단을 주어 고통을 가라앉히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마차는 생각한 만큼의 속도로 달릴 수 없었고, 총독관저의 언덕을 올라가는 것도 힘겨워 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우리들은 언덕 아래 문 앞에서 내려 도보로 관저까지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총독이 관저에 도착하고 나서 약 10분에서 15분 정도 늦게 도착했던 것입니다. 이상은 남대문 역에 도착하여 총독관저에 들어가기까지의 실황입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총독이 탈 마차가 나온 후 정무총감이 탈 마차가 곧이어 도착하지 않았고 10분 이상이나 지나서 총독의 행렬과 떨어진데다가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이를 보고 고의인지 선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무총감이 겁을 먹었다고 재미 삼아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 개중에는 정무총감이 역 귀빈실에 숨어 있었다고 하는 사람조차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연유로 인해서 그렇게 생각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츠나가 지사가 정무총감이 탈 마차를 끌 말이 다쳤다는 말을 듣고서 말을 바꾸는데 상당히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 탓인지 내게 행렬이 이미 흩어졌으니 앞으로 20~30분은 더 걸릴 것이니까 어디서든지 쉬고 있으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그러나 마츠나가 지사가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역전에 있는 군중들의 혼잡한 모습을 보려고 역 출구에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이때에 마츠나가 지사가 나를 안내하러 와서 부상당한 말이 끄는 마차에 타게 되었던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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