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정 청주두리이비인후과 원장

매해 8월이면 언제 의료봉사를 가는지 미리 챙겨보곤 한다. 수십 년 봉사활동을 다니신 선생님들이 많으신지라 아직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이제는 어느덧 일상처럼 되어버린 여름의 캄보디아... 올해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곳으로 가는 터라 조금 걱정이 되지만 새로 합류해 주신 소아과, 안과, 비뇨기과 등 다른 해보다 다양한 과의 선생님들과 경험 많은 간호사 분들과 자원봉사자님들로 인원이 꽉 차 든든하기도 하다.

 8월 11일 드디어 떠나는 날이다. 늘 인천공항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싣는 짐은 한 가득이다. 버스 안에서 짧게나마 새로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작년 이맘 때 쓰고 난 후 한번도 쓰지 못한 짧은 캄보디아 언어를 다시금 상기하다보니 어느 덧 인천공항에 도착이다.
 늘 짐을 보낼 때마다 문제가 없도록 신경을 쓰건만 왜 매해 문제가 생기는지 스스로 반성한다. 작년엔 뾰족한 의료기구, 올해는 이경의 배터리다. 내년엔 문제가 없게 다시 꼼꼼히 챙겨야지 반성하며 어스름한 저녁 7시 30분 비행기에 오르고 꾸벅 졸고 나니 어느덧 캄보디아 프놈펜에 도착이다. 밤 12시가 넘어 멋진 숙소에 도착하여 웰컴차를 마시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감사하며 곧 잠이 든다.

 12일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관광한다. 올해는 다른 해와 달리 교회에서 의료봉사를 하게 된지라 일정상 하루 휴식인 날이 가장 앞서 있다. 귀한 휴가를 쪼개어 참석하시는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죄송하게도 이미 개인적인 휴가를 다녀온 터라 관광일이 마냥 달갑진 않으나 한번도 보지 못한 곳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다. 아름다운 왕궁을 보고 들으며 감탄하지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햇살엔 속수무책이다. 킬링필드와 뚜얼슬랭 박물관을 둘러볼 때는 이전에는 말로만 들었던 캄보디아의 슬픈 역사가 새삼 무겁게 느껴진다. 백골의 탑을 바라보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먹먹함과 멍함을 동시에 느낀다. 작은 향을 피우고 꽃을 헌화하는 것으로 그저 슬픈 명복을 빌 뿐 이다. 뚜얼슬랭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희생자들과 가해자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인간의 잔인한 역사는 과연 어디까지 인지 슬픈 고민을 하게 된다. 관광이라 부르기엔 슬픈 장소를 떠나 캄보디아의 현재의 삶이 녹아있는 시장에 도착하자 가라앉았던 기분이 풀린다. 시장 구석구석을 찾아보니 거리의 화가가 그린 앙코르와트 그림 한 점이 마음을 사로잡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는 사람들이며 좌판 위에 차려진 간단한 노점상이며 심지어 미래를 알아보는 점집 등 다양한 가게들이 위치해 있다. 사진 몇 장으로 그 신기함을 다 담을 수는 없음에 아쉬워하며 자리를 떠난다.

 봉사활동을 할 깜뽕츠낭은 프놈펜에서 2시간 거리에 있기 때문에 다음 날 13일엔 새벽에 일어나 준비를 한다. 조식을 먹는 식당에서 우리 일행 외에 한국에서 온 다른 봉사팀을 만나 기분이 묘했다. 나중에 들으니 캄보디아에 매해 점점 더 많은 한국 봉사팀이 오고 있다고 한다. 우리 충북의사회 봉사가 끝나고 돌아가는 날 다른 의료 봉사팀이 들어올 예정이어서 우리가 사용하고 남은 약제들을 이용하실 수 있도록 넘겨드리고 오기도 하였으니 이전과 다른 풍경이다.

 버스를 타고 새벽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예상과 달리 너무나 깨끗한 건물의 교회이다.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 부부가 너무도 청결히 관리하고 계셔서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작년 하루종일 화장실을 가지 않길 바라도록 만들었던 최악의 화장실과 대조적인 깔끔한 화장실은 경탄을 금하지 못할 정도이다. 오전에 진료 준비를 하며 자리를 정돈하고 오후에 바쁜 시간을 대비하여 얼른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가이드분의 독촉에 제공해주신 맛있는 점심을 먹곤 환자분들을 기다린다. 근데 자꾸 일정이 늦어진다. 우리 의사회의 방문에 감사를 표해주시기 위해 방문해 주신다는 캄보디아 국회의원님과 도지사님 등이 참석하시는 공식행사가 자꾸 미뤄진다. 시간 관념이 아직 철저하지 못한 캄보디아의 관행에 먼저 나설 수도 없는 지라 그저 더위와 싸우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드디어 도착하신 높은 분들의 연설을 듣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열정적인 연설에 감탄하고 박수를 치고 빨리 마치도록 사진도 기쁘게 찍고는 오후 진료를 시작한다. 예상보다 시간이 늦어진만큼 보다 빨리 진료를 볼 수 있도록 노력하며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어느 덧 마칠 시간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일찍 진료를 시작할 수 있으니 오늘보다 더 일할 수 있을꺼라 아쉬움을 달래며 새로운 숙소로 향한다.

 몇 달전 새로 오픈한 중급 호텔이다. 작고 깔끔한 호텔이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다. 3층까지 짐가방을 가지고 올라가는 수고 쯤은 괜찮다. 땀에 찌들어 소금기가 배어 흰 줄이 생긴 진료복을 벗고 씻을 수 있고 에어컨만 있으면 그 정도는 괜찮다. 아침에 모닝콜은 시스템이 없어 할수 없고 시간에 가이드 분이 직접 문을 두드려 깨워주신다고 한다. 다행히 핸드폰 알람소리에도 잘 깨는 터라 이런 새로운 경험도 괜찮다. 근데 각자 방으로 들어간지 10여분 지났을까 갑자기 에어컨이 꺼지더니 전깃불도 꺼진다. 아무리 스위치를 올렸다 내렸다 해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 방만 이런가 해서 복도를 나가보니 다른 방들도 마찬가지 이다. 한동안 소란스럽더니 무언가 수상한 탄 냄새 같은 것이 희미하게 난다. 갑자기 이 호텔에서 못 잘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니 어떻게든 몸의 끈적함은 없애고 나가야 한다는 절박감이 들어 보이지도 않는 화장실에서 더듬더듬 몸을 씻고 나왔다. 다행히 그 사이에 전기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중이어서 이대로 잘 수 있다는 안도감에 곧 잠이 들었다.

 다음날 14일 아직은 어두운 시간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알람소리가 아직 울리지 않았는데 가이드분이 더 빨리 깨우시나 잠결에 일어나는데 빗소리가 크게 울린다. 이런 빗소리라면 잠시 지나가는 스콜이 아니라 홍수 수준이 아닌가 싶어 창밖을 보는데 왠지 하늘은 깨끗하다. 이상한 느낌에 방문을 열고 나가니 호텔 계단을 통해 물이 콸콸 쏟아지는 중이다! 호텔 천장이 무너졌다며 얼른 나오라는 일행분의 말을 들으니 잠이 번쩍 깨고 챙겨둔 짐을 즉시 챙겨 3층을 쏜살같이 내려왔다. 그 와중에 1달러 팁은 어디가 가장 잘 보이고 없어지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고 두고 나오고 열쇠는 문에 끼워 두는 것이 가장 좋겠다 고민하며 내려왔다.
 맑은 새벽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니 새벽 5시 30분. 새벽에 방 천장이 무너지며 쏟아져 내린 물벼락에 깜짝 놀라 나오신 선생님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던 중 주머니에서 꺼내시는 텔레비전 리모콘이 모두에서 큰 웃음을 선사하는 사이 물벼락이 멎고 다행히 누구도 감전되지 않고 다치지 않았으며 호텔이 더 이상 무너져 내리지 않음을 감사하게 되었다.
 
 하루의 시작을 어느때보다 일찍 시작하여 주변 시장에서 진정한 현지식을 먹고 봉사장소인 교회로 다시 자리를 옮긴다. 어제보다 아침 일찍 시작된 진료에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매해 느끼지만 좀 더 좋은 기구를 가지고 올 수 있고 설비가 있다면 이 분들께 보다 나은 의료 봉사를 할 수 있을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큰 병원에 가서 검사하고 수술해야 한다는 말만 통역을 통해 전달해야 할 때마다 추후 기회가 된다면 본격적인 의료봉사를 이 곳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쉬움을 남기며 짧은 의료봉사를 정리하고 공항으로 다시 출발한다. 따로 몸을 씻을 수 있는 곳이 없어 프놈펜의 대중목욕탕을 이용한다. 캄보디아에 여러 번 왔었지만 대중목욕탕은 처음이다. 주의사항을 알려주시는데 목욕탕을 들어갈 때 속옷을 입고 들어가라고 주의를 주신다. 샤워 시설이 얼마 없으니 얼른 씻고 나가야지 올라가는데 현지인분들이며 직원분들도 우르르 몰려드는 외국인들을 당황스런 눈길로 바라본다. 그들도 어색하고 우리도 어색하다. 탈의실은 작고 락커는 수가 부족하여 짐을 넣을 수가 없다. 얼른 씻고 나가야 다른 일행도 씻을 수 있어 속도전이다. 얼마 전 긴 머리를 잘라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머리의 물기는 자연건조하며 급히 정리하곤 나왔다.

 저녁식사를 하며 모두 이번 봉사여행 때 느낀 점을 이야기 나누고 내년을 기약한다. 함께한 사람들이 내년에도 또 함께 하길 바라며 늦은 밤 9시 30분 프놈펜 공항에 도착한다. 출발할 때 보다 한결 가벼워진 짐을 정리하고 예정시간보다 늦어지는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밤 12시가 넘어 15일이 되어서야 한국으로 출발한다.

 올해는 의료봉사의 기억도 소중하지만 여행으로서의 새로운 경험, 잊지 못할 추억들이 많이 생겨 유난히 기억에 남을 듯 하다. 불편하였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었고 감사할 수 있는 건 여기 모인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봉사의 집단이었기 때문일꺼다. 내년에도 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2018년 여름이 되길 소망해본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