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 대통령인 임정은 실로 눈부신 활약을 했다”

조선에서의 ‘성공적인’ 식민통치 체제를 정착시켰다며 1922년 그 사례들에 대한 좌담회에 참석한 이들. 이때 좌담내용은 15년이 지난 1937년 조선총독부 편집국에서 ‘조선통치비화’란 이름으로 발간됐다.사진 위 왼쪽부터 시바다젠 사브로, 아카이케아츠시, 모리야에이후, 마루야마츠루키치, 사진 아래 마츠무라마츠모리, 치바료. 미즈노랜타로.

●내용 간략 소개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통치에 있어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는 이에 대한 대책 강구에 나섰다. 당시 하라다케시 수상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사이토 마코토 총독과 부총독격인 미즈노 랜타로 정무총감을 조선에 부임시켰다. 그들이 중심이 된 일제는 3년간 조선에서 ‘성공적인’ 식민통치 체제를 정착시켰고 그 사례를 당시 담당 국장들의 좌담식으로 정리했다. 이때 좌담 내용은 조선총독부 편집국에서 15년이 지난 1937년에 ‘조선통치 비화’란 이름으로 발간됐다. 이것은 당시 2차 조선통치기에 해당되는 이른바 ‘문화통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가를 분야별로 소상히 정리해 둔 귀중한 자료이다.

이충호 일본 구마모토 국제대 부이사장은 1988년 도쿄 간다(神田)의 고서점에서 이 책을 우연히 발견해 구입한 뒤 번역 및 편역한 내용을 동양일보 지면에 게재하고 있다.

● 조선통치의 한 삽화

이충호구마모토 국제대 부이사장

▷미즈노= “지금 스코필드씨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나도 스코필드씨에게 대해서는 한 가지 인상적인 일이 있어 지금까지도 스코필드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정무총감으로 임명된 후 제일 처음으로 만난 외국인이 그였습니다. 1919년 8월 중순경 스코필드씨가 동경에 와 가네코(金子)자작의 소개장을 가지고 나에게 면회를 청해 왔기 때문에 총독부 출장소에서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스코필드씨가 나를 보자 던진 첫 번째 질문이라 할까 비난은 ‘요즈음 신문을 보니 당신이 조선인을 동화(同化)시키겠다는 뜻의 말이 신문에 실렸던데, 나는 이것을 읽고 조선의 신정(新政)에 대해 실망을 금치 않을 수 없었소. 동화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려운 일이어서 어떤 나라의 식민지에서도 동화정책이 성공한 적은 없소. 이번에 조선에서 신정이 행해질 것이라 해서 나 자신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당신이 조선인을 동화시키겠다하니 그것이 불가함을 말해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왔소.’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스코필드씨에게 ‘그 신문이 영자신문이었소. 일본신문이었소’하고 묻자 그는 ‘광고란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문자로 썼던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어시미레이트(assimilate·동화)라는 문자가 있었다’고 대답하던 군요. 그래서 나 자신의 신념으로는 조선인은 우리 동포입니다. 때문에 소위 일시동인(一視同仁)으로 조선인을 취급해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이에 어떤 차별도 없게 하고 폐하의 충량한 신민으로서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본인은 가능한 한 그들을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해서 그들로 하여금 참으로 일본 신민인 기분을 갖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인은 신문기자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이고 그 말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다할지라도 이러한 심정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이 영어의 어시미레이트라는 말에 해당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본인의 신념은 그것이었습니다. 조선인을 지금 당장 일본인과 똑같이 취급해서 일본의 모든 법률을 그들에게 적용시킨다거나 혹은 조선의 풍습 관습을 전혀 무시한 채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본인의 마음이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지극히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어시미레이트라는 것은 실제로 어려운 점도 있고, 또 조선인을 위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서로 헤어졌습니다. 그 이후 스코필드씨와는 매우 흉허물이 없게 되어 경성에 간 후에도 종종 방문을 하곤 했지요. 그 후 그가 귀국한 후에도 종종 편지가 오갔는데 지금도 1년에 한 두 번씩 편지 왕래가 있곤 합니다. 그는 무어라 할까 약간 편협한 모습이지만 이는 조선인을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배일(排日)의 결과 그런 식으로 된 것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우리들이 접촉한 바로서는 상당히 강한 편견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스코필드씨의 일은 특히 중점을 둘 필요는 없지만, 이것도 조선 문제에 대해서 한 삽화로 해도 좋다고 생각되어서 서두에 이 이야기를 해 두는 것입니다.”

● 상해임시정부의 해산

▷아카이케= “만세소동은 1919년 3월 1일 갑자기 경성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음모 분위기가 조선 내외 곳곳에 팽배해 있었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세소동 본부와 연락을 갖고 대책에 응했던 것은 미국 및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이었고 그들은 그 땅에서 정부 또는 유력자와 친분을 맺고 동정을 얻은 후 그 후원을 받아 음모를 계획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1919년 3월 경성에서 만세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위 가정부를 세워서 독립운동의 본부로 삼고 맹렬히 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가정부(임시정부를 일본식 표현)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이동휘라고 하는 군무총장(후에 국무총리)과 안창호라는 비서장(후에 내무총장)을 중견으로 하고 종래 조선에서 저명했던 인물인 노백린, 이동녕, 이시영, 문창범, 신규식, 유동설 등을 총망라하여 결성되었습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이를 보고 대단한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총독부는 경성에 있지만 우리정부는 상해에 있다는 식이었던 것입니다. 또 실제로 그들은 실로 눈부신 활약을 했습니다. 먼저 사회 각 방면에서 배일사상을 고취와 황당무계한 말을 퍼트려 민심을 혼란시키고 미국인을 비롯한 세계 각 국민들에게 조선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 일으켜 그 운동을 지지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또 언론 매체를 이용하여 조선내의 인심을 선동할 뿐만 아니라 많은 돈을 뿌려서 불온운동을 조성시켰습니다. 그런 이유로 조선인들에게는 상당히 유력하게 비춰지기 시작했고, 단지 외국의 지지를 받기만 하면 살 수 있는 것 같이 보였던 것입니다. 임시정부는 문치파(文治派)와 무단파(武斷派) 두 파로 구성되었는데 문치파는 이승만, 안창호가 대표이고 주로 미국의 후원에 의해 독립의 열매를 거두려고 한 반면 무단파는 이동녕이 그 수령(領首)이 되어 러시아의 후원을 받아 만주 및 시베리아의 무장단으로서 국경지대에서 조선 내에 침입토록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위세는 세계에 알려졌으므로 사대사상에 사로잡힌 일부 조선인은 미국의 힘을 빌리면 무엇이라도 안 될 것이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세계는 미국 대통령 윌슨의 14개조에 의해서 새로운 현실이 열려질 것이라고 믿었고, 이에 자극 받은 조선 인민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해서 독립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미국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임시정부의 실력을 잘못 알고 또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무력을 잘못 믿고 있었던 결과였습니다. 거기에다가 당시 임시정부는 비밀리에 폭탄을 제조하고, 단총을 구입하여 밀사를 조선 내에 보내어 유명인사나 고관들을 암살할 것이라는 사실이 자주 보도되었습니다. 또한 현지에서 폭탄을 휴대하여 조선에 들어온 자도 있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조선 사람들은 임시정부에 대해 매우 큰 기대를 하게 되었고, 그 성과 또한 클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가을과 겨울철은 국경지대 곳곳에서 무력 침입이 행해지고 있다는 소문이 곳곳에 퍼져서 인심이 매우 흉흉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내외로 넓혀서 각지에서 정보를 찾지 않으면 안 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총독부는 봉천 총영사, 길림 총영사, 안동의 영사에 총독부 사무관을 겸임시키고 새롭게 총독부 통역관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봉천, 길림, 북경에 배치해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이들 기관을 정돈함에 따라 군부의 정보기관과 협력해서 조선의 상황을 차차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후일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독립만세 소동은 세계 혁명과도 관계가 있었고, 제 3의 인터내셔널과도 관계가 되는 것으로 판명되어졌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판단하면 판단할수록 만세소동 사건은 만만한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이를 진정시키는데 1년이 연장되었다면, 어떠한 일이 야기되었을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이 극히 대규모로 계획되어져 그 뿌리가 상당히 깊었고, 그 연락망이 매우 넓었기 때문에 총독부는 내각, 원로 이런 방면에 대해서도 상당한 주의를 쏟았던 것이었습니다. 경무국도 역시 군부 내무성 그 밖의 부서와 항시 교섭하면서 인심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서 사회적 사상적 각 방면으로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경무국의 사무는 상당히 복잡하게 되었고, 따라서 마루야마군(丸山)과 시라가미(白上)군은 한층 분주했고, 시라가미군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으며, 그 상세한 비밀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세상에 발표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따라서 나는 상해임시정부의 존재가 조선인에게 일종의 오해를 갖게 했고, 이로 인해 총독정치에 막대한 불이익을 준다는 것은 일본 외무성에 누누이 강조였고, 프랑스 정부(상해는 프랑스가 조차한 거류지였기 때문에)와 교섭하여 결국 이를 해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해산이라는 명분으로 그들은 다른 장소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지만, 여하튼 관헌에 의해 해산되었다는 사실, 즉 그들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조선에 준 영향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인심을 안정시킨다는 점에서 볼 때도 성공의 한 방법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에 대해서 한 마디 해 둘 점은 척식국장관 고가랜죠(古賀廉造)씨가 여운형을 상해에서 초청했다는 사실입니다. 고가랜죠씨의 생각으로는 여운형이 임시정부의 영수의 한 사람인 안창호와 친교가 있어, 만약 그를 일본에 초청하면 안창호의 간담이 서늘해져서 임시정부를 해산시키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통역으로 당시 호의도(胡衣島)에 유배되어 있는 장덕수(張德秀 1894~1947)를 석방하여 일본으로 보내줄 것을 신청해 왔습니다. 총독부는 이를 듣고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유치할 뿐 아니라, 유해무익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극력 반대했지만 고가랜죠씨는 정부를 배경으로 강력하게 요구해 왔습니다. 할 수 없이 장덕수를 일본에 보냈으나 고가랜죠씨는 여운형으로부터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여운형(1886~1947)씨에게 고가랜죠씨가 궁전 정원을 구경시키는 등의 노골적인 저자세 외교를 폈다는 이유로 일본 의회의 규탄까지 받게 되었고, 결국 공손히 사죄하기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 시정(施政) 기념일의 강제적 개호(開戶)

▷아카이케= “총독부가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 신정이 시작됨과 동시에 총독부의 위신은 날이 갈수록 점점 회복세를 보였습니다. 그리나, 불온 운동자 또한 자취를 완전히 감춘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일단락을 짓는 듯 했습니다. 10월 10일 시정 기념일에도 불온한 무리들은 불온전단, 즉‘대한민국임시정부 축하회 및 시중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등의 불온 문서를 살포하고 민중의 인심을 현혹했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시중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습니다. 경찰은 경계에 힘을 기울였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도를 강구했습니다. 당일 총독부에서는 시정을 축하했고 이로 인해 태평의 기운이 남산에 가득했지만 종로일대의 조선 상인들은 상가의 문을 꼭꼭 걸어 닫은 채 가게를 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경찰 당국자는 정치의 대세로 이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필요할 경우에는 권력을 사용해서라도 개호(開戶)시켜야 하고,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인심을 회복하지 못하고, 흔들릴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단연 개호시키는 방침을 세우게 되었고, 결국 시민들을 회유해서라도 모두 상점들을 개점시키기로 방침을 굳혔습니다. 이를 결행한 이래 폐점 행위로부터 총독부의 통치에 대항하는 무리들이 모두 없어졌기 때문에 총독부의 위신이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루야마군 이하 경찰관의 공로가 실로 현저하므로 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마루야마군과 지바군의 설명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 정확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미즈노= “과거부터 조선에는 폐점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는 당국 관헌에 대한 불신의 뜻을 표하는 행위라고 하더군요. 금번 기념일에도 폐점할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으므로 이에 대해 총독부는 과연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제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국부장 회의에서는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설과 경찰력을 동원해서라도 개점시켜야 한다는 양설이 있었습니다. 폐점이 당국이나 관헌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시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장사를 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 이를 방임해 두어도 그렇게 오랫동안 폐점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이들 폐점한 모든 상인들을 검거하여 처벌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곤란했던 일이었습니다. 또한 이들 전부를 검거한다 하더라도 개개인 모두를 처벌할 수 없게 되면 오히려 총독부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결과가 되므로 이 일을 방임해 두는 편이 오히려 좋을 것이라는 취지를 말한 것은 체신 국장과 법무국장 등이었습니다. 경무국장은 이에 반대하여 어디까지나 강력하게 맞서 개점시켜야 한다는 설을 주장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방임해 두는 것이 좋다는 편으로 기울어졌습니다. 따라서 국부장 회의에 상정한 결과는 그대로 접어두고 잠시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이를 들은 마루야마 사무국장은 정무총감실을 둘러보고 와서 지금 들은 바에 의하면 국부장 회의에서 폐점을 그대로 방관해 두기로 결정했고, 그 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경찰관과 관계없는 체신국장이나 법무국장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 경찰당국으로서는 그 의안에 승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경찰의 위신이 실추되어, 앞으로 취조하는 데도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므로 반드시 이번만은 개점시킨다는 방침을 취해야겠다며 매우 노기등등한 자세로 강경하게 주장했다. 나는 국부장 회의에서 추이를 보기로 했지만 경찰 측에서 이를 개점시킬 자신만 있다면 그렇게 해도 좋을 것이라는 뜻을 전했습니다. 그 후 경기도 경찰국에서 강력히 노력한 결과 폐점을 못하게 하고 전 상인이 개점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는 경찰력의 위대함을 과시함과 동시에 앞으로의 조선통치상 적지 않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했던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당시 담당자였던 마루야마군이나 지바군이 가장 맹렬하게 활동했으므로 그 두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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