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아메리카 의과대학생 레네. 카리브해 섬나라 안티구아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 쿠바로 왔다.
김득진 작가

 안티구아에서 온 두차 텔리에르 레네. 그는 1999년 세워진 라틴 아메리카 의과대학 3학년이다. 영 연방 소속 독립국가인 안티구아를 의료 사각지역에서 탈출시키고자 의학 공부를 하고 있다. 미라마르에서 만난 그는 학교에서부터 걸어오느라 옷이 축축했다. 20킬로미터 가까이 땀 흘려 걷고도 환하게 웃을 수 있다니. 푹푹 찌는 날씨에 버스 탈 생각조차 않았다는 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 가지곤 버스 탈 형편이 못 되나 보다. 레네를 만난 건 지인이 맡긴 장학금 때문이다. 책 살 형편이 못 되는 그에게 지인이 한푼 두푼 모은 돈을 보낸 거다. 얼마 간격으로 보내 주는지 알 순 없지만 그 돈이면 한 동안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것 같다. 검은 얼굴이며 여드름 가리려고 모자를 썼지만 미소는 감추지 못한다. 모자 챙 아래 드러난 그의 선한 눈빛은 소를 닮아 유난히 반짝거린다. 레네를 양아들 삼으려고 한 지인의 뜻을 알 것 같다.

1998년 불어 닥친 허리케인 미치가 중남미에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라틴 아메리카 의과대학은 허리케인 피해를 입은 이재민을 도울 목적으로 세워졌다. 정부에서 의료 환경이 열악한 라틴 아메리카에 파견할 의사를 길러낼 결심을 한 거다. 그란마 해군기지는 학교로 리모델링하기에 제격이었나 보다. 거기에다 레네처럼 가난한 농촌 출신 학생들을 불러들여 6년 동안 임상 교육과 기초 의학에다 인술 과정의 실습까지 거쳐 의사 면허를 발급한다. 그 중 2년은 마을 커뮤니티의 가족주치의를 보조해서 내원환자 진료와 왕진을 돕는다. 레네가 곧 실습할 가족주치의는 24시간 문을 연 채 내원환자를 진료한다. 오후엔 거동 불편한 환자를 위해 왕진을 가서 체크 리스트에 주거 환경부터 꼼꼼히 살펴 기록한다고 한다. 하수구가 막히진 않았는지, 바퀴벌레며 모기가 들끓진 않는지, 양식이 부족하진 않는지, 전날 술을 많이 마시진 않았는지, 처방한 약은 잘 먹고 있는지…… 쿠바 의사 1인당 환자수가 165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전 세계를 통 털어 가장 낮은 수준이다. 자국민 먹이고 입히는 것도 부족한데 국방비 55%를 삭감해서 의료 혜택이 고루 돌아가도록 힘쓰는 것이다. 쿠바 의사들의 헌신은 2005년 8월 파키스탄 대지진 때 두각을 나타냈다. 지진의 아수라장 속으로 뛰어든 그들은 병원을 세운 뒤 숱한 사람들을 살려냈다. 레네는 그걸 본받아 돈벌이나 안락함 따윈 팽개치고 인술 펼치는 과정을 체험하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연대성, 통합성, 인도주의를 내세워 의술보다 인술을 먼저 가르친다고 한다.

의과대학 6년 동안 정부에서 교육비, 책값, 하숙비, 식비, 의복에다 월 백 페소의 장학금도 준다. 그게 바로 혁명적 의학으로서 체 게바라가 갈망한 길이다. 의사 양성은 순수한 국제적 지원활동이어서 체제 다른 국가 학생도 배척하지 않는다. 국민들의 빈곤과 건강악화를 염려해야 하는 나라의 학생이라면 누구든 입학을 허가한다. 그런 조건으로 수학하는 학생이 만 명이 넘는데 그 중 한국 학생도 섞여있다는 건 아이러니다. 예비 의사 두차 텔리에르 레네는 스페인어와 영어를 섞어 자랑스레 말한다.

“타인의 아픔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낄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한 의사입니다.”

에스꾸엘라 라띠노아메리까나 데 메디시나 3학년인 레네. 성적증명서, 출생증명서, 건강증명서, 에이즈증명서, 임신증명서, 범죄사실증명서까지 제출한 뒤 입학했다. 그가 의사 면허증을 받은 뒤 안티구아 시골에서 2년 동안 일하겠다는 서약서를 쓸 순간을 상상해 본다. 번득이는 눈빛이며 자신감 실린 어깨를 보더라도 선배들 빛나는 이름을 더럽힐 리가 없다. 자본주의의 잡스런 것들이며 편리함 따윈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게 눈동자에 오롯이 드러난다. 반짝이는 눈으로 안티구아 홍보 팸플릿을 펼친 레네는 여기가 고향이라고 자랑스레 얘기한다. 섬 세 개로 이뤄진 가난한 나라지만 자연의 향기 넘실거리는 레네 고향 안티구아를 허리케인 이르마(IRMA)가 할퀴어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가 보낸 동영상엔 부엌까지 밀려든 바닷물이 허리짬에서 찰방거린다. 레네 엄마는 그런 곳에서 의사되어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물 속에서 식탁을 꾸릴 그의 엄마 밝은 표정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저릿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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