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인 리나의 베지테리언 증명서. 독일 남자 라니와 커플인 덕분에 그들의 몫까지 유기농 아이스크림을 실컷 먹었다.

작은 힘 모아 거대 세력 이기자는 브리가다(연대), 컨벤션센터 세미나 열기에 허기졌다. 행사 끝나기 전인데 음식 냄새가 레스토랑으로 잡아끌었다. 거기엔 나보다 더 배고팠던 젊은 커플이 먼저 와서 자릴 차지하고 있었다.

얼쩡거리는 나를 본 웨이터 손가락이 정겹게 얘기 나누는 커플 곁을 가리켰다. 의자가 내 엉덩일 당기는 동안 커플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캠프에 참가한 일행이 맞을 텐데 낯설었다. 힐끗 바라 본 그들은 나 땜에 얘기가 끊겼다는 듯 잽싸게 고개 돌려 대화를 이어갔다. 느릿느릿 다가온 웨이터가 뭘 먹을 거냐고 커플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제각각 주머니에 든 카드를 꺼내 보여줬다.

그건 내가 쥔 식권과 크기며 색깔이 딴판이었다. 카드 색상만 봐도 알겠다는 듯 입을 찢은 웨이터가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그가 풀이 그득 담긴 접시 두 개를 커플 앞에 놓았다. 전채 요리인가 싶어 기다리는 동안 내게는 손바닥 크기 랍스터가 담긴 접시를 가져왔다. 양쪽을 비교해본 뒤 젊은 커플이 채소만 먹고 케미가 생겨날까 걱정스러웠다. 랍스터를 포크로 해부하는 동안 웨이터가 동그란 통 세 개를 테이블에 놓고 갔다. 글씨를 읽으려 그걸 당긴 순간 감촉으로 아이스크림이란 걸 직감했다.

랍스터를 밀치고 아이스크림을 퍼 먹기 시작한 나와 달리 커플은 컵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채소로 배 채우면서 아이스크림을 마다하다니.

궁금함을 참지 못해 어디서 왔는지, 왜 채소만 먹는지 물었다. 이름이며 얼굴까지 닮은 독일 남자 라니, 스위스 여자 리나가 베지테리언이란 걸 밝혔다. 그때서야 맨 부커상 수상작 채식주의자 읽은 기억이 났다.

얄팍한 지식을 동원해서 비건, 락토, 오보 중 어떤 부류인지 물었더니 완전 채식하는 비건이라면서 핏기 없는 얼굴로 쳐다봤다. 그 순간 내 입이 왜 찢어졌는지 모른다. 표정을 읽은 그들이 앞에 놓인 통을 내게 밀쳤다. 그리곤 손가락에 낀 반지로 아이스크림 숟가락 핥던 시선을 가렸다. 커플 반지냐고 물었더니 디자인 자세히 보라고 말했다. 풀잎 바탕에 박힌 초록색 보석을 본 뒤 숟가락 놀리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코스요리에다 아이스크림 세 통을 먹었으니 태어나 이런 호사는 첨이다. 청정 자연이 만들어 낸 음식이며 아이스크림 실컷 먹을 수 있는 쿠바는 이래저래 기회의 땅이다.

어딜 가거나 떨어지지 않는 라니와 리나. 브리가다 캠프가 그들을 짝 지워준 게 틀림없다. 둘을 알고부터 베지테리언들이 더러 보였고, 그들 테이블을 유심히 살피는 게 버릇이 됐다. 어딜 가나 양배추 샐러드, 토마토, 구아바, 오이가 그들 주식이다. 가끔 망고나 쿠바식 감자튀김 빠빠스프리다가 보이긴 해도 내가 먹는 음식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았다.

망고 주스를 리필하기 위해 줄 섰을 때다. 입소한 베지테리언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 리나에게 말을 걸었다. 전부 알진 못해도 스무 명은 될 거라 했다. 라니 옆에 앉은 뒤엔 리나 눈치를 살피며 귓속말로 물었다. ‘베지테리언이 아니어도 사귀는 게 가능해요?’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아꼈다. 딱 부러지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 내가 다그쳤다. 그때서야 ‘아마도, 힘들지 않겠어요?’ 라고 퉁명스레 말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한창 썸 타는 중인 라니와 리나가 딥 키스하는 걸 상상해 봤다. 먹는 게 서로 다르다면 선뜻 키스할 마음이 내킬까. 둘이 닮아 보이는 것도 식성이 같은 탓이지 싶다. 그런 뒤부터 그들이 입고 있는 옷, 신발, 모자며 가방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라니와 리나의 소지품 중 가죽이라 여겼던 건 죄다 비닐 제품이다.

베지테리언은 가죽 제품을 쓰지 않고 꿀도 먹지 않으며 서커스도 외면한다. 리나의 나라에선 채식주의자들이 펼친 에코프렌들리(ECHO FRIENDLY) 정책으로 여러 가지 천연 화장품이 넘쳐난다. 라니가 사는 베를린 비건 거리 쉬벨바이너에는 그들만의 아이스크림, 애완견 사료, 화장지, 세제 파는 곳이 있다고 한다.

베지테리언은 부자가 아니고선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얘기에 뜨악하다. 상류층이라야 비싼 채식주의 물품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다고. 독일에는 비건이 백삼십 만이고 락토며 오보, 락토 오보까지 합치면 팔백만 명이나 된다고 했다. 그의 얘기에 독일의 애완견 숫자 팔백육십 만이 왜 떠올랐을까.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운 뒤 급히 인터넷을 검색해 봤다. 우리나라 베지테리언도 백만이 넘는다고 한다. 연예인 중에서 이하늬, 이효리, 송일국, 박진영도 채식주의자란 얘기가 떠돈다.

먹거리로 쉬 장난칠 수 있는 한국에선 엄격한 채식이 어려울 것 같아 그들에게 말했다. 베지테리언 실천하긴 어렵지만 음식을 좀처럼 남기지 않고, 유통 기한 지난 것도 잘 먹는다고. 내 얘길 들은 라니가 ‘그게, 프리건(FREEGAN)이죠.’ 라며 활짝 웃었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 육식 절제하는 플렉시테리언이나 프리건도 엄연한 베지테리언이라며 엄지를 치켜 올리는 그들. 나랑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낀 게 틀림없다.

김득진 작가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