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 방불케하는 상황에서 순사 3000명 교습시켜”

1919년 사이코 마코토 총독과 미즈노 랜타로 정무총감이 조선에 취임하면서 독립운동가(1855~1920)선생의 폭탄 세례를 받아야 했다. 사진은 당시 남대문역 현장 약도(왼쪽)과 사건을 보도한 매일신보 1919년 9월 10일자.

 

 

 

● 경찰제도 개정의 고심(2)
▷마루야마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도내에 있는 큰 경찰서에 20~30명씩을 배속했고, 경찰서에서도 순사로서 갖추어야할 교양 교육을 시켰습니다. 마치 전장(戰場)을 방불케 하는 상황으로 3000명을 교습시킨 사실 하나만 보아도 실로 대단한 작업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자도 없고, 신발도 없고, 하물며 복장도 못 갖추었으며, 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찰서에 배속된 신규 순사들 중에는 둥글납작한 모자를 눌러쓴 자가 있는가 하면 학생복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학습훈련을 했던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이론을 교육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교련이 중요한 과목이었기 때문에 교련을 시켜야 했습니다. 이를 보고 조선의 경찰은 마치 백귀주행(百鬼晝行)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고 참으로 천태만상의 상황에서 교습을 했던 것이 사실이며, 비상시가 아니었더라면 이는 도저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내지(일본 본토)에서 전입해온 1500명은 전혀 조선에 대한 기초적 지식조차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리도 상황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본 각 부현으로부터 부산에 상륙해 왔던 것입니다. 이 1500명을 어떻게 배속시킬 것인가를 연구 조사한 후, 당시 교습소장이었던 후루하시 사무관 혼자서 부산으로 출장을 가서 일본 각지에서 온 순사들에게 조선 지도를 펼쳐 놓고 한 장의 배속 표를 건네주며, “자네는 ○○도로 가게”, “자네는 ○○도 ○○지역이야”는 식으로 배치했던 것입니다. 지도를 보면서 그곳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준 후 부임지로 보내는 식으로 배속이 결정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군인 1500명을 동원할 때를 상상해 보면, 그 때의 배속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일까 하고 생각되겠지만, 당시는 단 한 사람의 사무관이 부산에 출장을 가서 전혀 지리나 인정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1500명을 각도에 배속해야 할 만큼 급박했던 것입니다. 그 때의 고심이 어떠했을지 지금 상상해 보아도 아찔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모든 일이 너무도 잘 처리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합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처럼 신임 순사들에게는 교습을 재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군 출신자의 경우는 그다지 조련교습(操練敎習)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들을 순사로 배치해야 했고, 지방의 헌병 중에서 출원하는 자는 보통경찰로 받아들여 이를 각각 배치한 후 드디어 11월 4일 총독관저를 경비하고 있던 헌병들 대신 보통경찰관에게 모든 업무가 이관되었습니다. 이로써 헌병이 맡고 있던 일 전부를 보통경찰이 책임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 경찰 재건의 경로
8월 20일에 관제개혁이 발표된 후 헌병경찰이 맡고 있던 일이 전부 보통경찰의 손에 인계되기까지 대략 2개월 반이 소요되었습니다. 이처럼 대단한 일이 겨우 2개월 반 만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당시 국(局)을 책임졌던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던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도쿄경출장소에서 만났던 노구치 국장의 계획은 전혀 무모한 계획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에 와서 대개혁을 실행하는데 참가하면서 직접 경험을 통해 느낀 것은 이 일은 6개월 후에 완성될 것이라든가, 8개월 후에 완성될 것이라는 식으로 기한을 정한 후 일을 처리하면서 도저히 신속하게 일을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앞에서 말한 노구치 국장의 계획을 비판적으로 논의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를 그 후에서야 통렬히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이미 보통경찰에게 경찰권을 옮기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거 경비업무를 맡고 있던 헌병들은 진정으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려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거기에다가 조선내외에 불온한 분위기는 팽배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헌병대가 모두 물려갈 때까지는 헌병대 책임이니까 그들도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리야 없겠지만, 그들은 헌병이 다년간 쥐고 있던 경찰권을 강제적으로 보통경찰들에게 빼앗기는 듯 한 기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경찰에 대해서 호의를 갖고 있을 리 없었고, 사태 또한 절박한 때였으므로 만약 이를 반년 후나 8개월 후라는 식으로 여유를 두고 일을 추진했다면 경비상 매우 심각한 간격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보통경찰의 재건을 담당한 사람들 또한 너무나 느긋해져서 그 사이에 생각지도 않은 불상사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화급하고도 강경하게 일을 마치게 되었던 것은 그 뒤에 생각해 보아도 매우 만족할 만한 일이었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이제 당시 경찰 당국자들의 고충과 걱정을 말씀드려 보면, 일본에서 전입해온 1500명의 경찰관은 당시 정무총감께서 내무대신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기꺼이 우수한 순사를 조선으로 이관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부현(府縣) 중에서 어떤 곳은 20명, 또는 50명이라는 식으로 순사를 조선으로 보내려고 하면 결국은 고액의 월급을 받는 자나, 나이 먹고, 기력이 없는 자, 또는 무능한 자들을 가리지 않고 뽑아 조선에 보내게 되었고, 불행히도 그 실례는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새롭게 힘을 합한 1500명의 전관(轉管)순사의 기질이 얼마나 좋았는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이를 지도 편달하여 비상시에 분투할 수 있도록 하라 하니 저희들이 고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요. 새로 모집한 3000명도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경기가 매우 좋을 때에 무리하게, 또 성급하게 모집했던 관계로, 채용된 자 중에는 목욕탕 집 때밀이도 있었고, 요리 집 배달부가 있는가 하면, 학문이나 경력 인물 등에 대해 면밀히 조사를 한 후 채용한 보통 때의 인물과는 달리 마치 오합지졸을 모아놓은 듯 한 느낌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충분한 교양을 심어줄 시간과 여유 또한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실무에 임하도록 배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이렇게 심각한 긴장을 요하는 이 때에 이 같이 많은 수를, 게다가 비교적 기질이 좋지 못한 자들로 경찰을 재건해야 했던 만큼 당시 당국자들의 고심은 더한층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 신설 당시의 경찰 설비
경찰을 재건하는데 있어서의 그 경위는 대략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만, 제가 조선에 도착한 후, 경험한 경찰에 관한 일을 말씀드리면 당시 경찰이 얼마나 빈약했고, 시설 설비 또한 얼마나 공허했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한두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도 여러 번 말씀이 있었습니다만, 사이토 총독과 미즈노 정무총감이 조선에 취임하실 때에 조선 내의 분위기가 매우 불온하고 심각하다는 통보가 자주 들려왔습니다. 예정한대로 총독·총감 일행은 부산에서 1박을 하게 되었지만, 저는 아카이케 국장과 함께 부산에 머무르지 않고 직행열차를 타고 먼저 경성으로 들어왔습니다. 천진루(天眞樓) 여관에 도착하여 당시 총독부간부 교체상태의 과도기에 조선총독부의 모든 업무를 맡고 있던 도키나가 사무관을 불러들여 대략의 형세를 들었습니다. 듣고 있는 사이에 주위가 점점 어두워졌습니다만, 다음날의 행사인 총독·총감의 남대문 도착 당시의 경비 배치 상황 등에 대해서 까지도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시찰하러 왔다간 것이 불과 며칠 전 일이었는데도, 당시와는 꽤 상황이 바뀌어 있었고, 또한 경성 지리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던 관계로 제반 사항에 관한 협의를 끝내고 숙소에 돌아와 보니 벌써 새벽 2시였습니다. 그러나 아카이케 국장께서는 저에게 ‘아무래도 다음날 밤에 총독각하가 도착하시게 되니까 이때 경비를 맡을 경찰관에게 한층 더 긴장하여 경비에 임할 수 있도록 당부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니 자네가 고생스럽겠지만, 내일 일어나는 대로 경찰부를 방문하고, 또 시내 경비 담당 경찰서에 가서 그곳 간부를 소집하여 매우 긴장한 상태에서 경비에 임해 달라고 훈시하고 오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저는 숙소를 나와 경기도청으로 향했는데, 당시 경무국에는 자동차가 한 대도 없었기 때문에 인력거를 타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은 지금도 생생히 제 기억 속에 살아남아 있습니다. 당시는 지바 경찰부장이 아직 업무에 착수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등과장을 불러 제반 정세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치계획을 살펴본 후 여러 가지 주의를 주고 도 경찰국 즉, 제3부의 간부를 소집하여 신임 총감의 조선 부임에 있어 가져야할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그 후 불온한 분위기가 온 시내에 가득하니 오늘밤 경계를 함에 있어서는 오직 일심으로  임하고, 한 치의 소홀함도 없도록 노력해 달라는 훈시를 정성껏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차례로 본정(本町)·종로·용산 경찰서에 들러서도 간부 모임을 소집했는데, 경찰 간부보 이상의 간부를 한 곳에 불러 모아 앞에 말한 것과 같은 취지를 열심히 설명한 다음 그 결과를 아카이케 국장에게 보고 드렸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총독의 도착과 신임이 바로 눈앞에 닥쳐왔기 때문에 이 이상의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었고, 일단 경비배치 상황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인력거로 한 바퀴 돌았습니다. 과거 경시청에 근무했었던 다소의 경험을 살려 그들을 지도한 후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총독·총감 일행의 도착 시간이 임박해 와 다시 인력거를 타고 남대문역에서 총독관저에 이르는 길을 두 차례나 왕복하면서 경비배치 상황을 둘러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남대문역에 갔을 때에는 벌써 마중 나온 사람들이 타고 온 자동차들로 대단한 혼잡을 이루고 있었고, 귀빈실 바로 옆은 마치 주차장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 차가 너무 많이 주차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 그곳 경계 책임을 맡고 있던 본정 서장을 불러 주의를 주었지만, 이미 도착시간이 임박한 탓에 갑자기 주차장을 변경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경비 배치는 잘 되어 있는가’하는 등 여러 가지로 물었지만, 배치는 충분하다는 대답이었고, 따라서 안심하고 플랫폼으로 나아가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저 또한 총독·총감 양 각하의 도착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양 각하가 도착하여 귀빈실을 나와 마차를 탄 후, 그 마차가 움직이려는 순간 폭탄이 투하되었고, 이상한 굉음이 함께 작열했습니다. 다행히 일행에게는 별고가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고, 그 부상으로 인해 죽기까지 하는 대참사가 발발했던 것입니다. 이 사고는 역시 내가 주의를 주었던 주차장 배후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현장에서 나는 참으로 조선 경찰의 임무에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본정 서장은 흉부에 파편을 맞아 흰 바지에 선혈이 낭자한 채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역 앞에서 검을 뽑은 채 서서 지휘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오전 중에 국장의 명령을 받아 도 3부·각 경찰서를 훈시하면서 돌아보았던 결과였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본정 서장의 용태가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총감의 마차가 지나간 후 ‘이제 괜찮으니까 어서 자동차를 타고 총독부 병원으로 빨리 가 보게’하고 말했지만, ‘저는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 만큼 훈시를 들으면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게 했다는 것은 저의 책임입니다.’하고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큰 소리로 꾸짖으며, ‘지금 책임을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하며 강제로 경부(警部)를 딸려 차에 태웠습니다. 그러나 책임을 중시한 서장은 다시 마차 뒤를 쫓아 총독이 관저에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병원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후문으로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국을 책임 맡았던 경찰들은 지극히 긴장된 상태에서 경계에 임했다고 생각되지만, 여기서 중차대한 착오가 생겼기 때문에 경비 당국으로서는 뭐라고 말할 면목이 없습니다. 이처럼 급한 상황에서 바로 전날 밤까지 모든 주의를 끝마치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생각이었으나 결국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

남대문 현장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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