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품직지도서관 운영위원장 김수동

(동양일보) “비석치기 할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엄지손가락을 들고 외치면 ‘나’, ‘나도’ 하면서 아이들이 달려든다. 내가 사는 금천동 현대아파트에서 매주 목요일 오후 5시에 펼쳐지는 놀이터의 풍경이다. 2014년 여름부터 시작된 이 놀이판은 지금까지 매주 계속되고 있다. 놀이의 시작은 아파트 에 있는 작은 도서관의 프로그램인 아파트 생태나들이 뒤풀이 한 꼭지였지만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될 아파트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 어른인 내가 놀자고 하면 아이들이 과연 놀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내가 자랄 때는 놀이는 형들이나 누나들한테 배웠다. 그것도 형과 누나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다가 한발 한발 놀이판에 발을 디밀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놀이를 익혔다. 놀이를 못하는 아이들은 깍두기라는 형들이 베푸는 지혜의 보금자리에서 놀이에 참여할 수 있었다. 형들에게 배운 놀이를 우리는 형들처럼 동생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니 예전에는 어른이 놀자고 하는 것도, 어른한테 놀이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른인 내가 놀자고 하는데도 요즘 아이들은 자석처럼 달려든다. 왜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일까?

대기의 구성 성분 가운데 21% 정도가 산소인데, 지금처럼 산소가 충분하다면 산소는 공동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의제가 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10% 또는 그 이하로 산소의 비율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생존이 걸린 심각한 문제가 된다. 마찬가지로 놀이가 삶 속에서 살아 있을 때는 공동체의 운명이 걸린 심각한 의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처럼 놀이가 상실되면서 사람들의 삶과 학습의 토대가 되는 공동체가 무너진 것이다. 산소처럼 충분할 때는 문제가 안 되지만 부족할 때는 생존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 그것이 바로 놀이이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놀 시간도 공간도 없다. 우리 어릴 때는 집 앞마당, 마을 공터, 마을 길, 추수가 끝난 논과 밭, 뒷동산 모두가 놀이터였다. 학교를 다녀오면 가방 던지고 나가서 놀고 어머니의 “○○야, 저녁 먹어라” 할 때까지 정말 많이 놀았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어머니도 동네 사람들도 노는 것에 대해서 나무라지도 놀지 말고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아파트 구석에 놀이터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만 놀라고 한다. 마치 유배지처럼. 그나마 그 놀이터에 놀 수 있는 것도 학원에 가야하기 때문에 찾기 어렵다. 놀이를 가르쳐 주는 형도 누나도 없다.
이처럼 놀이가 사라진 곳에 컴퓨터, 휴대폰, 게임 등이 자리를 잡았다. 놀이를 통해서 서로 소통하고 보살피던 아이들의 세계는 왕따, 일진 등의 문화가 만들어져 아이들과 우리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놀이가 다시 살아 날 기회는 남아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마을과 골목에서 신나게 놀았던 경험을 갖고 있는 어른들이 있다.

어른들이 마음을 모으고 그 경험을 나누면 놀이를 살릴 수 있다. 무엇보다도 마을과 골목에서 전승되던 전래놀이를 찾고 되살려 마을과 학교에서 ‘놀이 꽃’을 피우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가 가르쳐주고 그대로 따라 배우는 레크리에이션이 아니라 서로의 놀이 경험을 살리고 그것을 나누고 함께 배우는 그야말로 집단지성의 문화로서의 놀이 말이다. 놀이를 아이들의 밥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놀이는 어른들의 밥이기도 하고 우리 공동체의 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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