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 선생, 조선 3대총독 마코토 향해 폭탄 투척

일제 강점기 당시 남산. 일제는 황국신민화교육을 위해 4대문안 어디에서든 보일수있도록 남산에 신사를 세웠다.

 

 

 

 

 

 

 

 

 

1910년대 산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모습. 일제가 조선의 사정을 소개하기 위해 만든 책 ‘조선 요람속’에 실려있는 사진.

 

 

 

 

 

 

 

 

 

 

 

 

 

 

 

 

이충호일 구마모토 국제대 부이사장

● 신설 당시의 경찰 설비(2)

마루야마 “그리고 나서 나는 탈것이 없었기 때문에 서둘러 걸어서 우체국 앞까지 왔었지만, 총독관저로 가는 길을 잘 몰랐기 때문에 조선인 인력거를 불러 그것을 타고 관저로 갔습니다. 총독·총감 일행은 모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음을 알았고, 바야흐로 만찬이 시작되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확인한 후, 그 길로 물러 나와 경무국 사무실로 갔습니다. 경무국에 가보니 경무총감부를 경무국이 인계하였으나 책상 등등의 몇 가지 물건만 들어와 있을 뿐, 모든 설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어제 도착했기 때문에 이곳 상황을 잘 알 수 없었고,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려고 아무리 벨을 울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마침 급사가 왔기에 그에게 물어보니 숙직이 벌써 돌아가 전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아카이케 국장이 총독관저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얼마 안 있어 도키나가 사무관이 왔고, 또 히가시(東)라는 부하 한 사람도 왔습니다. 이미 해가 기울어가기 시작했으므로 전기를 켜려고 했지만, 아직은 야간에 활동할 것은 상상하지 않았던지 경무국장과 같은 중대한 역할을 가진 사람의 방에 전기도 들어와 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급히 양초를 사러 보내 곳곳에 양초를 켜고 거기서 범인 체포에 관한 수배와 각종 지휘명령을 하게 되었습니다. 건물이 좋지 않다든가, 매우 조잡한 곳이었다는 등의 문제와는 조금은 성질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 하에서 조선의 업무를 맡게 된 경무국장의 상태가 이렇게 살풍경한 것이었으니, 지금 상상해 봐도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이에도 국장의 지휘를 받아 당일을 위한 준비에 임할 수밖에 없었고 일을 끝낸 후 밤늦게 돌아왔습니다. 역시 탈 것은 지금에 비해 거의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없었기 때문에 일을 마치면 언제나 걸어서 숙소까지 돌아와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경무국이 출범한 초창기에는 얼마나 제반 설비 및 시설이 불충분했던가를 알 수 있었고, 시설이 불충분한 만큼 당시 경무국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일했던가를 상상하게 해 줍니다.”

 

1919년 남대문 역에서 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강우규(1855~1920) 선생.

● “헌신 노력하는 제 3부장”

마루야마 “드디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결과 폭탄 범인을 체포했고, 이로서 폭탄사건은 일단락을 지었지만, 이제야말로 조선에서는 치안 제일주의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총독부의 대략적인 방침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 실행으로 경찰부장 즉, 제 3부장회의를 개최하여 어떻게 하면 조선의 치안을 잘 유지할 수 있을까하는 것에 대해 제 1회 평의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회의 진행 모습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격세지감이 들 정도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새로운 포부와 확고한 의지를 품고 대 계획을 실행할 임무를 맡은 총독·총감을 보좌하여 헌신 봉공하겠다는 결심으로 조선에 왔건만 부임하자마자 첫 번째로 이와 같은 폭탄세례를 받게 되었으니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각 지방 또한 여러 의미에서 나름대로 매우 불안한 상태였기 때문에 헌신 노력하여 치안 유지 임무를 담당한다는 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귀한 사명임과 동시에 남자로서의 본의라는 의기에 가득찬 제 3부장 제군의 회의였던 만큼, 일본에서 흔히 있는 경찰부장 회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중한 회의였습니다. 참석자 거의 모두가 결사 봉공의 각오로 심각하게 논의를 계속할 때 지금 생각해 봐도 실로 통쾌감을 느낄 정도입니다. 이 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있었던 한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이는 제가 너무나도 절실하게 느낀 점으로 당시 총독·총감에게도 말씀드린 적이 있고, 이들 제 3부장 제군은 회의석상에서 우국지정을 피력하였는데, 회의가 끝난 후 개별적으로 나를 찾아와서 피력한 개인적인 생활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지금의 조선 사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경성이나 평양이나 대구와 같은 대도회지에 근무하게 된 3부장 제군들은 기대했던 바와 실제가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겠지만, 그 외 지역의 3부장으로 부임하게 된 사람들의 사정은 좀 달랐습니다. 그들 중에는 군장의 경험을 가진 자도 있고, 지방 사무관이었던 자들도 많았으므로 어쨌든 도청 소재지의 3부장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아무리 조선이라 해도 자기가 살던 군 소재지 정도의 문화 수준은 되지 않겠는가 하고 상상하고 있었는듯 합니다. 그러나 지금 말한 대 도회지를 제외한 그 밖의 도청 소재지에는(지금은 그런 곳이 없지만), 당시에는 아직도 전화 설비조차 안 되어 있는 곳이 꽤 많았습니다. 특히 헌병으로부터 업무를 완전히 인수받을 때까지는 당시 헌병 대장이자 경무부장인 헌병이 관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사가 없어서 많은 가족을 끌고 생면부지의 땅에 오자마자 여인숙에 기거를 해야 했던 3부장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몇 수년 만에 남폿불 밑에서 잠들어야 했을 때 일종의 비애를 느끼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때의 참담한 기분에 대해 들었을 때에는 참으로 동정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상황이 중대한 만큼 모두가 분기하여 전혀 불평도 원망도 후회의 생각도 없이 오직 일심으로 조선 치안을 위해 분투노력하고자 결심한 씩씩한 그들의 정신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나는 고하시 차관으로부터 조선의 근무를 권유받고 온 사람들이 실제로 이렇게 큰 정신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오직 조선통치가 중대하기 때문에 분투할 것이라는 결심을 굳히는 비장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일본에 있는 선배 각 위에게 알려 그들의 이러한 노고를 알아주었으면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자세한 현황을 편지로 적어 보냈습니다. 당시 제 3부장 제군이 요즈음 조선에 부임해 오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과 다른 입장에서 비장한 각오로 고군분투했다는 사실이 지금은 하나의 일화가 되었고, 상상할 수 없는 일화가 되어 버렸습니다만, 그 때를 회고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져옴을 느낍니다. 부장회의의 결과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경찰 조직이 정비되었고 경찰관의 증원이 단연코 결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모든 설비시설이 불완전한 것이었고, 참으로 이 중대한 국면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일대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이 당시 모였던 제 3부장 제군의 대체적인 의견으로 모아졌습니다. 그밖에도 회의석상에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모아졌고, 제 3부장 제군들의 협의에서만도 십여 개조였던가 하는 많은 요망사항을 정무총감에게 제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개혁을 촉진토록 요망한 것은 일본에서는 언뜻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습니다만, 다행히도 정무총감의 진력에 의해 이러한 일들이 급속도로, 또한 만족스럽게 실현을 보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경무국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감격했고, 더더욱 치안 유지를 위해 헌신 봉공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으며, 매사에 긴장 속에서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건에 접하면서 점진적으로 대세가 안정을 되찾았던 1921년 봄까지 경무 수뇌부에서 말단 경찰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얼마나 긴장 속에서 일을 했었는지는 도저히 필로 다 적을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상하가 일치되어 분투노력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지만, 이 모든 사건들을 무난히 잘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 언뜻 보면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운이 좋다는 것도, 운명이라는 것도 아무런 노력 없이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요컨대 부임당시부터 긴장을 더하고 마력에 마력을 다해 과거의 제도를 인계했던 것이 적중하여, 다행히 저 만세 대소동(3.1운동) 후 벌집을 쑤셔놓은 듯 한 조선의 안녕 질서를 비교적 짧은 시간에 수습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서서히 교육진흥과 산업개발로 전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물론 총독·총감의 지도와 인도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당시 국(局)을 담당했던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 또한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 “강도·암살·폭탄사건으로부터 평화로”

마루야마 “1919년 9월 이후 계속해서 대규모의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다음해 8월부터는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이 더 더욱 민활해져갔고, 3월 15일에는 신의주에서 가네아키(金明)가 불온한 조선인에게 암살된 사건이 발생했으며, 같은 날 평안남도에서는 태산(泰山)면장이 집무 중 흉적(凶賊)에게 맞아 죽는 등 소위 암살대의 횡행이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를 고심참담하던 끝에 잠시 억눌렀다고 생각될 무렵, 5월 말경 다시 폭탄 소동이 일어났고, 곳곳에서는 폭탄을 가져와 공갈하는 식의 소동이 빈번히 발생하여 평안도 일부의 인심이 매우 흉흉해졌습니다. 그리고 일반 시민의 치안까지도 도저히 유지하기 어려운 군(郡)도 적지 않은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여론 또한 매우 고양되기 시작했고, 조선에서는 처음 있었던 일이지만, 전 조선 신문기자 대회가 개최되었고, 또 전 조선 각도 대표자 회의가 3일간에 걸쳐 경성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제각기 문화통치의 실패를 역설·강조했고, 총독에 대한 비난·공격도 수없이 퍼부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시점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를 보면 다름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임시정부가 군자금을 모금하고, 애국기금을 모집한다 하여 돈을 모으는 것을 신속하고도 철저히 취체(取締)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방법으로는 상해임시정부가 도저히 자금을 모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강도로 변했고, 강도 검거가 심해지자 그 후에는 모든 수단을 써서 협박하는 수단을 취했습니다. 이로 인해 불온문서가 계속 쏟아졌던 것입니다. 이들은 관리는 사직해야할 것이며, 학교의 학생들은 퇴교해야 할 것이며, 상인은 폐점해야하고, 조세를 거부해야 한다는 등 모든 종류의 협박문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사형을 선고하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조선의 민심이 동요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길게 지속되자 협박이 별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3월 15일을 계기로 실제적인 암살 행위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암살도 용이하게 이행되지 않자, 이번에는 폭탄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자, 종국에는 총독부 구내까지 잠입하여 포탄을 던지는 소동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일련의 사태를 보고, 이는 오히려 경찰이 용의주도하게 활약하여 힘써 취체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외부로부터 잠입하여 들어온 불온조선인의 활동이 나날이 압박을 받아 최후의 수단으로까지 발전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이것이 폭탄소동에까지 이르게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며 조선 천지에 평화의 서광이 비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비난과 공격을 받으면서도 단호히 소신을 꺾지 않고 동일한 방침으로 밀고 나갔던 것입니다. 해를 넘겨 1921년이 되자,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우리들을 믿지 않았던 무리들도 우리를 믿어주기 시작했고, 조선은 점점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평온한 분위기 가운데 정월을 맞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해 봄 총독부가 있는 영곡(鸚谷)의 벚꽃이 만개할 때 경찰부장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 때에서야 비로소 각자의 얼굴에 미소다운 미소가 가득하게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때 미즈로 정무총감은 呼拙呼迂任世評 / 至誠優國是眞情 / 春風今日感多少 / 笑見南山萬朶櫻 라는 시를 한 수 지어 읊으셨습니다. 모두 감격에 가득 찼고, 나는 이 시를 제창하고, 13도 경찰부장 및 경무국 각 과장에게 특별히 휘호를 한 장씩 써, 선물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정무총감께 부탁드렸습니다. 이 휘호는 각 부장들 집에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족자를 볼 때마다 처음으로 안정과 온화함을 느낄 수 있었던 때를 회고하게 됩니다. 이를 보더라도 1919년에서 1921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들 모두가 얼마나 긴장했고, 얼마나 고생했던가가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소견남산만타(笑見南山萬朶)의 벚꽃

미즈노 “지금 마루야마군이 이야기했지만, 1919년 10월에 있었던 제 3부장회의 때는 조선전체가 그야말로 분란의 시기였으므로 회의 상황 또한 매우 비장한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제 3부장 제군의 얼굴에는 어떻게 해서 이 시국을 수습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다대한 고심을 하고 있는 흔적이 역력히 보였습니다. 저 또한 누구보다도 말할 수 없는 비장한 감에 젖어 있었고, 그 때 내 심정은 오히려 고통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제 3부장 제군은 자신의 고통과 불만은 잊은 채, 내 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조선의 치안을 잘 맡아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심을 보여 주였기 때문에 저는 마음속으로 감사했고 더욱 마음 든든했습니다. 이렇게 불안한 상태가 1919년에서 1920년까지 계속되었지만, 그 동안 경찰관의 고충과 노력은 말처럼 그렇게 용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당시 총독통치에 비난공격이 빗발쳤고, 총독부의 새 간부들은 문화통치라고 하는 것을 표방했지만, 문화통치는 문약(文弱)정치며 총독의 새 통치방침에 대해 수많은 공격을 가하는 자도 상당히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총독부 동료와 경찰관 제군의 비상한 분투노력에 의해 1년 정도 경과된 후에는 조선 전도가 다소 평정을 회복했고, 평화의 서광을 보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1921년 봄 경찰부장 회의 때는 지난해 비장한 광경이 씻은 듯이 없어지고, 느긋하고 평온하며 유쾌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가 4월 말로 지금 마루야마군이 말한 바대로 마침 벚꽃이 만발한 때였고, 총독부 뒤뜰 앵곡(櫻谷)에 활짝 핀 벚꽃 밑에서 일동이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그 때 저는 감개무량하여 시 한 수를 읊었습니다. 그 시는 ‘呼拙呼迂任世評 / 至誠優國是眞情 / 春風今日感多少 / 笑見南山萬朶櫻’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시 자체는 별 볼일 없는 졸작이지만, 당시의 제 심정을 그대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조선통치를 위해 채택한 정책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형편없는 졸작이라든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식으로 비평을 하는 자가 많았지만, 별 볼일 없다고 말하든지 그것은 세평에 맡길 일이다. 내 진정한 심정은 지성을 다하여 국가를 걱정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런 기분으로 오늘날까지 매진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뒤돌아보니, 우리들의 성의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의 치안도 안정 되 다소 평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봄 경치가 화창한데, 지나온 2, 3년을 회고해보니 실로 감개무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오늘에 이르러 여유 있는 기분으로 서로 웃으며 남산에 만개한 벚꽃을 보게 되니 감개무량하다는 의미로 읊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마루야마군이 제의하여 이 시가 좋은 기념이 될 것 같으니 모두에게 휘호로 써주시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여 보잘것없는 글 솜씨이지만, 제군에게 선물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제군이 이를 보존해 두고는 때때로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이를 볼 때마다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일을 술회하면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그 당시 그 난국을 담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 시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1919년 말부터 1921년까지의 조선의 상황이라는 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고, 언제 이런 상황에서 평정을 되찾게 될 것인가 하면서 비관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총독통치가 국민들의 양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오직 국가를 위해 한 몸을 아낌없이 바쳤던 당시 경찰관 제군의 공로였다고 생각되며 지금도 나 자신 감사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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