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어느 곳을 가더라도 볼 수 있는 소박한 별, 꼭지점에 자리한 다섯 영웅은 그들 자부심이다.
김득진 작가

 브리가다 캠프 컨퍼런스 룸, 낯선 화풍의 팝업창이 열린다. 룸 절반을 의자로 칸 지르고, 가운데엔 2미터 길이의 테이프를 걸쳐두었다. 하나 둘 모여드는 대원들 틈으로 훤칠한 키에다 준수하기까지 한 육십 대 남자가 들어선다.

그때 귀를 쫑긋하게 하는 낭랑한 사회자 목소리가 막 도착한 남자를 소개하고, 아내로 보이는 여자의 온화한 미소가 따라붙는다. 일본인끼리 그걸 지켜보다가 힐끔 내 눈치를 살핀다. 그 중 친해서 옆에 앉은 마끼꼬가 고개 돌려 그들 얘기를 귓속말로 전해준다.

저 사람은 1998년 플로리다에서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미국 교도소에 구속되어 있었던 안토니오 게레로예요. 형기 마친 뒤 쿠바로 돌아와 영웅 칭호를 받았는데, 그런 사람이 경호원 없이 혼자 차를 몰고 왔대요. 체 게바라 마지막을 보더라도 그를 CIA가 가만 놔 둘 턱이 없는데 말이에요.

마끼꼬 얘길 듣고서 깜짝 놀란다. 미국인들이 쿠바에 맘대로 들락거리기 시작했는데 위험에 처하진 않을까 해서다. 마이크가 안토니오 게레로에게 건너가고 꼿꼿이 선 그의 낭랑한 목소리가 홀을 메운다.

따스한 목소리로 홀을 데운 지 십 여 분, 터질 듯 한 열기를 감당하기 힘들다. 남자 얼굴에 넘실거리는 미소 말고는 어느 것도 특별하달 수 없는데 신기한 일이다. 인사말이 끝나고, 아내와 손잡은 그가 테이프 걸어둔 곳으로 간다. 사회자가 다가와 가위를 건네준다. 웃으며 그걸 받아든 그가 몸을 돌려 청중을 살핀다.

브라질 아가씨 아만다 산토스와 눈이 마주치고, 그녀에게 선뜻 가위를 건넨다. 새카만 눈을 크게 뜬 아만다는 쑥스러운지 손을 가랑이 사이에 감추고 허리를 꼰다. 둘 사이에 어떤 짬짜미도 없었다는 제스처다. 그가 웃는 얼굴로 다시 건네준 가위를 받아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만다 산토스. 그녀 등을 안토니오 게레로 아내 손이 떨린다. 머뭇거리던 아만다가 앞으로 조심스레 나서서 테이프를 자르고, 곧바로 홀에 박수 소리가 흘러넘친다. 머쓱하게 악수를 나눈 그녀가 안토니오 게레로와 나란히 전시장으로 들어선다. 컨퍼런스 룸에 모였던 대원 모두 그걸 지켜보며 안토니오 게레로 그릇 크기를 짐작하고서 잦아들었던 박수 소리를 드높인다. 서로 역할을 바꾼 조연과 주연이 통로를 열고, 벽에 걸린 액자의 코사지인 듯 대원들이 붙어 선다.

홀을 둘러본 안토니오 게레로가 자리에 앉는다. 티셔츠 차림인 나와 그의 시선이 마주치고, 찬스를 놓치기라도 할까봐 앞으로 성큼 나선다.

한국에서 쿠바와 체 게바라 공부하기 위해 온 킴이라고 어눌하게 소개한 순간 그가 벌떡 일어선다. 호수 같은 그의 눈망울이 나를 빨아들이고, 뺨을 맞댄 순간 혁명 전사 아니랄까봐 뜨거운 열기가 오롯이 건너온다. 인사 끝나기 바쁘게 늘 끼고 다니던 수첩을 안토니오 게레로 앞에 펼쳐 사인해 달란 눈짓을 보낸다.

그의 정성스런 필체의 행간에는 쿠바를 위해 몸 바쳤던 영웅담이 꼬불꼬불 드러난다. 나의 찢어진 모양을 바라본 대원들이 너나없이 다가와 줄을 선다. 뿌듯한 감동을 느껴보라고 동영상 찍던 마끼꼬를 찾으니 보이지 않는다. 목 길게 뽑아 살펴보니 줄 맨 끝에서 부러운 듯 손을 들어 휘젓는다.

사인 받은 수첩을 품에 감추고 그림이 전시된 홀을 둘러본다. 친필 사인을 품었으니 그림 따위가 귀하게 보일 리 없다. 대신, 쿠바의 또 다른 별들에 시선이 머문다. 총을 멘 체 게바라며 군복 차림 빌마 에스핀 고혹적인 모습이 이채롭게 망막을 장식한다. 그걸 보더라도 라울 카스트로가 눈부시지 않은 광채를 지니게 된 까닭을 알 것 같다.

마르크스 레닌 사상에 홀딱 빠져 형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지만 그녀를 만난 뒤부터 어떤 미녀도 여자 사람으로만 보였겠지. 그가 쿠바 민중들에게 존경받는 건 따랐을 여자가 많았지만 한 눈 판 적이 없어서일 것 같다.

자신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아내를 기리며 여생을 국민 위해 오롯이 바치는 그의 태도에서 지도자의 의연함이 드러난다. 개막식은 한 시간이 못 돼 끝난다. 쿠바 다섯 영웅 중 한 명인 안토니오 게레로는 어느 새 사라지고 없다. 청정한 쿠바 하늘의 별, 꼭짓점에 이름 올리긴 했지만 올 때처럼 홀가분하게 떠나는 게 그들 전통인 듯하다. 빛나되 눈부시지 않은 인물이니 경호원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보다. 그의 잔영 위에 피델이 남긴 유언이 오버랩 된다. 반딧불이처럼 홀 여기저기를 떠다니는 마지막 부탁이 휘황한 빛을 튕겨낸다. 자신의 흔적을 어디엔가 남기기라도 했을까봐 번득거리는 시선마저 느껴진다.

그림에 멀뚱한 시선을 던지던 대원들이 묘한 포만감을 안고 식당으로 향한다. 이름만 그럴 듯하게 레스토랑이라고 투덜거렸던 게 미슐랭 별 세 개를 단 요리처럼 맛깔스럽다. 여태 입이 귀에 걸려 입맛조차 잃은 듯 보이는 아만다 산토스, 안토니오 게레로가 보여준 광이불요(光而不耀)의 선연한 기억을 곱씹느라 밤잠을 설치진 않을지 걱정스럽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