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나츠메 소세키·루쉰의 비교 조명
혼·영·영성의 차이와 식민지화·영토화의 의미를 새밝힘

Ⅴ. 8월 15일 오전회의 -세대간 대화

 

▷김태정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어제와 오늘을 통해서, 그리고 특히 젊은 세대의 자유토론을 통해서 새삼 느끼는 것은, 누구나 젊은 한때 자기나라로부터 탈출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생명의 몸부림이지요. 저도 그랬고 조명희·나츠메 소세키·루쉰도 경험했던 일입니다. 그것은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보려는 생명력의 표출이지요. ‘헬코리아’도 그런 충동의 네거티브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동건 국제퇴계학회 영남지부 이사장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가지는 72번 째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광복의 뜻을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가 얼마나 이루어졌는가를 진솔하게 반성해보는 것입니다. 아직도 어딘가에 식민지화의 잔재가 남아 있지 않는가라는 문제입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 얼마나 자주적이고 자립적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직도 남을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최다울 일본 토호쿠대학 대학원생 “저는 지난해 촛불시위에 참여했는데, 거기서 느낀 것 가운데서 이번 포럼에 관련시켜서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조명희·나츠메 소세키·루쉰처럼 글쓰기를 통해서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에의 길을 열 수도 있겠지만, 반독재 민중운동에 동참함으로써 영혼의 자유를 획득할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저는 김예린씨의 글과 발언을 통해서 오늘의 한국에서, 한 젊은이가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감동했습니다. 지난날에는 국가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화·영토화가 문제였지만, 오늘날에는 기업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화·영토화가 크나큰 문제인데, 자기 생명·생활·생업을 전적으로 기업이나 조직에 의존하려는 추세에 영합하지 않고 독립자존의 길을 자작 얼업에서 찾겠다는 의지와 기획에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안락한 대학 교수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소설가의 길을 택했던 나츠메 소세키나, 수입과 지위가 보장된 의사의 길을 마다하고 글쟁이가 되었던 루쉰이나, 일신상의 생활에는 아무런 걱정도 염려할 필요도 없는 유복한 집안에서 떨쳐나와서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민중문학 운동에 투신했던 조명희의 길과 상통하는 데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김예린 청년농사꾼 “저는 저 나름의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생활을 하고 싶어서 유명 기업에 취직하는 길이 아니고 제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농사짓기를 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기업이나 조직의 소속원이 되어서 그 지배를 받으면서 겨우 연명해갈 수 있는 취직에 목을 매는 것이 내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 길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거지요. 김태창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기업이나 조직에 의한 영혼의 식민지나 영토화에는 강한 반발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명희 선생의 작품을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야규 마코토 원광대 원불교연구원 “오늘날 영성을 보는 관점도 다양하고 영성을 주제로 하는 담론도 다채롭지만, 김태창 선생님의 영성론의 특색은 종교적 문맥이나 신학적 관점에서가 아닌 생명 자각적 체험에서 체득 체인한 것의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공하는 영성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야마모토 쿄시 편집인 “저는 방금 야규씨가 말씀하신 공공하는 영성을 세 가지 차원에서 실천해 왔고, 앞으로도 그 방향으로 활동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동양일보와 제가 발행하고 있는 미래공창신문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상생과 공복(共福)을 지향하는 공공영성=공공하는 근원적 생명력을 기르고 키우는 데 진력하고 싶습니다. 둘째로 그 일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서 한국과 일본에서 지방간·세대간·남녀간 상생과 공복의 인문학적 대화운동을 동반 추진하고자 합니다. 셋째는 이번의 국제포럼처럼 한일 양국간 문화자원의 공동 활용과 상호이해를 심화 발전시키는 일을 계속해 간다는 것입니다. 특히 나츠메 소세키나 루쉰에 비해서 국제적 인식이 미흡했던 조명희 작가에 대한 일본이나 중국 쪽에서의 인식확충에 기여한다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삼차원적 공공대화활동은 결국 한일 또는 한중일간 활명연대(活命連帶=상호간의 근원적 생명력을 진작시키는 실천적 연대 형성)을 심화·확충·진화시킨다는 것이 김태창 선생님의 중장기 구상이고, 저 자신도 그것에 전적으로 동감·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동양포럼과 미래공창신문의 공동기획 사업은 많은 젊은 세대의 참가·협조·동행을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조성환 원광대 원불교연구원 “조명희·나츠메 소세키·루쉰을 비교 조명하거나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을 주제로 삼은 것이나, 그림과 음악과 시를 아우르는 것이라든가, 이 모두가 동양포럼밖에는 볼 수 없는 뚜렷한 특징이라고 느낍니다. 특히 김태창 선생님이 이번 포럼의 취지를 철학시로 요약하신 것은 참신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와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답 없는 물음

물음 1.

글쟁이가 되고 나서야 / 사람의 참모습이 / 잡히던가요? // 고양이의 눈을 빌려야 / 세상의 참모습이 / 보이던가요? // 하늘맘을 헤아려서야 / 땅삶의 참뜻이 / 통하던가요? // 그렇게도 갈구하던 / 미래의 참빛이 / 비치던가요?

물음 2.

의사가 되는 길을 / 버리고 나서야 / 스스로 갈 길이 보였습니까? // 바보들의 모습을 / 그려보고서야 / 자신의 얼굴이 보였습니까? // 미친짓의 역사를 / 훑어보고서야 / 오늘의 모습이 보였습니까? // 노예됨의 굴레를 / 벗어던지고서야 / 넋의 자유가 보였습니까?

물음 3.

땅을 빼앗긴 몸은 / 바위라도 끌어안고 있어야 / 그나마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 님을 빼앗긴 맘은 / 노래라도 읊조리고 있어야 / 그나마 사랑할 열을 지필 수 / 있었습니까? // 불을 빼앗긴 넋은 / 먼 땅으로 멀리 떠나 있어야 / 그나마 길 비칠 빛을 그릴 수 / 있었습니까? // 총에 빼앗긴 삶이 / 씌워진 올가미를 부수고 나서 / 그나마 얼의 자유를 찾을 수 / 있었습니까?

 

Ⅵ. 8월 15일 오후회의

마무리와 새엶을 위한 대화

 

▷최재목 영남대학교 교수 “저도 가끔 시를 씁니다만, 김태창 교수님의 시에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시에는 영혼에 호소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쩌면 영혼의 탈식만지화·탈영토화를 제대로 이루기 위해서는 시가 가장 효과적인 인간적 영위가 아닌가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밝혀 놓고 대화를 전개해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태창 교수께서 이번 포럼 주제로 제시하신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에 관해서 식민지화와 영토화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다르다면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가 확실하게 인식되지 않는 것 같고, 그것이 미래공창과 어떻게 관련되는 것인지도 잘 이해되어 있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김영미 시인 “제가 몇 번 김태창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를 통하여 알게 된 것을 말씀드리면 참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식민지화는 자각을 동반한 자주성 상실이고, 영토화는 자각되지 아니한 자립성 상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식민지화·영토화 된 상태에서는 과거와 현재에 얽매어 있어서 함께 미래를 열어갈 수 없기 때문에 바람직한 미래를 함께 열기 위해서는 서로의 영혼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수 토호쿠대학 대학원생 “저도 이번 포럼을 통해서 혼과 영·영혼과 영성이 어떻게 다르고, 또 그것이 탈식민지화·탈영토화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큰 소득입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이 식민지화 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자각되기 때문에 대책을 강구할 수 있겠지만, 스스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영토화 되어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기는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거기에는 어떤 대책도 만병통치적인 정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각자의 영혼이 자주성과 자립성을 기르고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임지혜 충북대학교 대학원생 “저는 김선우씨의 그림에 대해서 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행인’이라는 나츠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고 그린 것 같은 그 그림을 보면, 한 사람이 눈을 감고 웅크리고 있고 여러 사람의 손이 뻗쳐져 있습니다. 그 손 중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상황에 맞는 손이 있는 거예요. 그 손을 덥석 잡으면 그 사람이 식민지화가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눈을 감고 웅크리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식민지화하는 많은 손이 있다는 걸 깨닫고 저항하고 있는 상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그 사람이 고개를 들고 자신에게 내민 많은 손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거예요. ‘이 손은 이렇고 저 손은 저렇구나.’ 하며 여러 손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면서 이해를 하는 거죠. 시야를 넓히고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면서 어떤 손도 잡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탈식민지화 된 세상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탈식민지화 된 모습을 실천하기 위한 교육적인 길, 방안으로는 다양한 정보나 지식에 접근하는 능력, 다양한 정보나 지식을 수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고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리징 교토대 대학원생 “여기 오기 전에 안동에서 열린 ‘외천활리(畏天活理)하는 영성의 인문학’으로 퇴계학을 개신(開新=새로운 지평을 연다)하는 포럼에 참석했었습니다. 무릇 지상의 권력에 의해서 영혼이 식민지화·영토화 되는 데서 올바르게 해방되는 길은 모두가 몸과 마음과 넋을 다해서 하늘을 두려워하고 하늘의 이치를 이 세상에 펼치고 그것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꾸어 가는 것이 퇴계학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고, 청주에서도 같은 취지의 방향설정이 가능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주희 침례신학대 교수 “젊은 세대들의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생각해야 합니다. 세계와 개인의 관계가 전적으로 폭력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탈식민지화를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 모두가 다 식민지화 되어 있고 영토화 되어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만약에 세계와 개인의 관계가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없습니다. 고립하거나 단절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 폭력이 부분적이라면 그 폭력의 부분을 각성하고 그 각성이 우뚝 서야 하는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가령 탈식민지화를 왜 해야 하는 것이죠? 그 이후에 뭘 할 것이냐 하는 겁니다. 그 부분에서 제가 답답한 생각이 들었어요. 가령 조명희 선생, 소세키, 루쉰은 그 분들이 그 입장, 처지, 정황에서 어떤 태도를 가졌느냐 할 때 공통점은 있습니다. 조명희 선생은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소수가 아니라 우리를 보자. 우리가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를 보자면 개인이 선택을 할 수 없고 실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겁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탈식민화, 탈영토화는 자유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자유는 완성의 개념은 아닙니다. 우리가 늘 추구하는 가치이지 절대적 상태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결국 작가들은 늘 자유를 이야기하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 상황에 대해 답답함이나 폭력을 느끼게 되죠. 젊은 세대들이 이 주제에만 너무 집중하는 것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용환 충북대학교 교수 “그러니까 후카오 교수는 탈식민지화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늘 반복해서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라고 말한 것이고, 야마모토 선생이 영혼이 탈식민화·탈영토화 되고나면 거기서 미래공창을 위한 원동력이 생기고 그래서 한중일의 미래공창적 사고와 판단과 실천으로 연결된다는 말씀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자기 영혼이 알게 모르게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에 의해 지배·통제·억압당해서 자주성과 자립성을 잃고 있지 않는가라는 자기반성·자기점검·자기인식이 생성되어야 적절한 대책을 강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김주희 교수님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태정 교수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겠습니다. 조명희 선생은 민족혼을 이야기하셨어요. ‘우리는 우리여야 한다. 흉내 내지 말자’는 말씀을 하셨지요. 나츠메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철학자를 등장시켜 야마토 타마시이(日本魂)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가 너나할 것 없이 야마토 타마시이를 이야기하고 일본 국내는 물론 해외에 나가서까지 얘기하는 그걸 비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어요. 우리나라의 조명희 선생은 일제에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쓰메 소세키가 있던 일본은 러일전쟁에 승리해 제국주의화 되어 있습니다. 나츠메 소세키는 제국주의로부터 탈피하려 하고, 넘어서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식민지 상태에서 탈식민지할 수 있었던 것이고, 조명희 선생의 경우는 그렇지 않죠. 일제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에, 독립을 쟁취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그 세 분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은 바람직하지 못한 과거와 거기서 빚어진 현재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근원적 변혁의 힘?영성?을 민중 가운데에서 민중과 더불어 함양하고자 했던 데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함께 미래를 열자는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여기 있는 우리가 바로 미래입니다. 그래서 특히 젊은 세대의 참가와 발언을 선배세대가 경청하고, 세대간 대화를 나누는 데 힘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호간의 영혼과 영혼이 상통하는 데까지 이른다면 우리 포럼의 의미가 살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이것으로 국제학술회를 맺겠습니다. 감사합니다.”<정리/신홍경·박장미·임선희>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