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냘레스 터미널에서 소개받은 까사에서의 식사. 테이블 위엔 손바닥 크기의 랍스터가 갖가지 채소를 곁들여 차려져 있었다.카리브해에서 갓 잡은 랍스터를 배 불리 먹을 수 있는 비냘레스는 천국 못지않다.
김득진 작가

 버스 터미널 어슬렁거리면 합승택시 호객꾼이 금세 달려든다. 그게 귀찮다면 한두 시간 마다 떠나는 비아술 버스도 있다. 때 묻지 않은 자연 품에 안겨보겠다고 까사 손님 말을 믿고 합승택시를 탔다. 나 홀로 여행자에겐 비냘레스 만 한 곳이 없다지만 사기꾼에게 주머니 털릴 까봐 전전긍긍한다.

40쿡으로 계약한 택시 요금에서 1쿡 더 낸 뜨리니다드 호객꾼의 애교어린 사기를 당한 뒤다. 5쿡 받아야 할 보증금을 6쿡 받아간 활달한 성격의 호벤, 젊은 청년 웃음 값이 1쿡인 셈이다. 택시에서 내리고부터 속지 않으려 눈 부라려도 호객꾼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성가시긴 하지만 길잡이 노릇하는 그들이 없으니 막막하다.

뜨리니다드에서는 호벤이 값싼 까사를 알려줬다. 시가지 끝머리인 데다 나지막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그가 건성으로 가르쳐 줬더라면 노숙자 신세가 될 뻔 했다. 피하기 힘든 닭 홰치는 소리를 뺀다면 그보다 나은 까사는 없지 싶다.

역마살 채찍질 땜에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흥정을 구실로 쿠바노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다. 낯설던 스페인어가 점차 귀에 익숙해지고 그들 방식대로 피부색 다른 사람들과 인사도 나눈다. 비냘레스 터미널에서 소개받은 까사도 소통의 창구가 되기에 모자라지 않다. 주인 여자와 밀고 당기는 동안 그들 삶에 점점 동화되어 간다.

주인 여자 마리린은 영어를 모르고 나는 스페인어에 서툴지만 밀당 시간은 흥겹다. 하지만 흥정이 잘못되면 주머니가 온통 비어버릴 수 있어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이웃의 어려움 그냥 봐 넘기지 못하는 그들. 누가 데려왔는지 가방 끈 길다고 목에 힘 준 여자가 둘 사이에 끼어든다. 그녀의 영어 실력도 마리린과 별 차이나지 않는 걸 보면 쿠바 교육제도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답답했던 내가 메모지를 꺼내 끼적거리기 시작하고, 그녀가 아래쪽에다 답글을 적는다. 하루 방값 25쿡이라고 적는 걸 보고 아바나에서도 20쿡 밖에 내지 않았다며 목소릴 높인다. 팔을 벌려 보인 마리린이 하는 수 없다는 듯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며 뒤돌아본다.

방을 둘러보니 정갈하긴 해도 냉방 기구라곤 선풍기뿐이다. 그걸로 푹푹 찌는 더위를 견딜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 다른 곳을 알아보려 했지만 애써 흥정한 게 아까워 선뜻 발길 돌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저녁도 여기서 값싸게 먹을 수 있다고 노트에 금액을 적으며 환하게 웃는 마리린. 그 얘기에 훅 끌려 침대 위에 배낭을 내린다.

식당 믿었다가 굶은 적 있어서 저녁 준단 말에 미끼를 덥석 문 거다. 저녁은 뭘로 할까 묻는 말에 뽀요가 좋겠다 말한 뒤 손을 씻는다. 짐 정리 마치고 샤워하니 나른한 기운이 몰려든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 읽기 뿐이어서 덮어두었던 곳을 펼쳤다가 설핏 졸기도 한다.

혁명은 한 번으로 끝나는 법이 없다는 문장을 몇 번 되풀이해서 읽는다. 프랑스 혁명보단 피 적게 흘렸지만 1차 혁명 성공시키지 못하고 전사한 호세 마르티 정신을 이어받아 피델의 꿈이 이뤄졌다. 정신 번쩍 차리고 보니 식사 시간이 지났다. 책을 덮고, 거울을 살피고 나서 식당으로 간다. 저녁 준비가 되었는지 구수한 냄새가 현관에 떠돈다. 식탁에 앉는 순간 마리린이 커다란 접시 몇 개를 날라 온다. 거기 담긴 건 소스 대충 흩뿌린 닭 요리 뽀요다. 배고플 때 요리 내 놓는 여자의 아름다움에 견줄 만 한 건 없다. 그때부터 마리린을 마리린먼로라 부르기로 했다. 설명 듣고 난 마리린 입 꼬리가 위로 쭉 벌어진다. 가정집에서 근사한 요리 대접받는 설렘이 폰을 켜게 만든다. 세세하게 사진 찍는 동안 목으로 넘어간 침 때문에 속이 쓰릴 정도다. 그득 차려진 걸 혼자 다 먹을 수 있을까 고민에 빠진다. 아무래도 감당할 수 없어서 나이프로 절반을 잘라 주방의 마리린에게 갖다 주며 고맙단 말을 고명으로 얹는다.

내가 건넨 절반의 뽀요에 마리린먼로가 당황하는 눈치다. 부담 갖지 말라며 두 손을 젓고 난 뒤 되돌아와 식탁 앞에 앉는다. 소스 부실한 닭고기가 이렇게 맛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덜어낸 게 살짝 후회스럽다. 내일 저녁엔 돼지고기 먹게 해 달란 말을 시원스런 트림에 얹는다.

전날 절반도 먹지 못한 뽀요를 봤으면서도 마리린은 접시 그득하게 돼지고기를 담아 입 길게 찢은 채 가져온다. 그 또한 절반을 덜어내 주방으로 가져가서 까사에서도 랍스터 요리 할 수 있는지 묻는다. 랑고스타 준비해 달란 말에 마리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면 재료 구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게 어렵다면 뽀요 요리도 상관없다고 그녀를 안심시킨다. 인디오 마을과 동굴 속 연못 트래킹 한 뒤 돌아와서 식당에 들어선 순간이다. 테이블 위엔 손바닥 크기의 랍스터가 갖가지 채소를 곁들여 차려져 있다. 인간 삶에 먹는 게 빠질 수 없지만 카리브해에서 갓 잡은 랍스터를 배 불리 먹을 수 있는 비냘레스는 천국 못지않다. 주방에서 식당을 거쳐 바깥을 드나들던 까사 주인 마리린은 맛은 때로 폭력이란 말을 소스처럼 끼얹고 먹는 내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본다. 마리린몬로라고 치켜세웠던 게 파출부와 나누는 조잘거림을 자장가처럼 바꾼 것 같다. 그녀 티 없는 미소가 꿈속까지 따라와서 아린 발목을 주물러 줄 것 같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