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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치비화(19)/ 통치방침의 확립과 제 1차 예산 편성
조선통치비화(19)/ 통치방침의 확립과 제 1차 예산 편성
  • 동양일보
  • 승인 2018.04.01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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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가봉(加俸) 폐지론(2)

▷미즈노 “‘그래서 경성, 부산, 대구 같은 곳은 조선에서도 대도시인만큼 일본에 있는 다른 지방과 그다지 문화, 시설 면에 큰 차이가 없을지 모르지만 거기서 한 걸음만 더 오지로 들어가 보면, 실로 비참한 상태입니다. 의료기관도 없고 가족과 떨어져 있으니 따뜻한 위안도 없을뿐더러 불안감은 한층 더합니다. 특히 국경변방에 근무하는 관리는 밤낮 할 것 없이 위험에 처해 있는 실정입니다. 어쩌다 가족 내에 병자라도 생기게 되면 지금까지 저축해둔 돈 몇 푼까지도 송두리째 투자해야 하는 상태이므로 일본에 근무하는 관리에 비해 다소나마 급여에 여유를 두고 지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만의 하나라도 가봉제를 폐지하게 된다면 앞으로는 조선에 근무하기 위해 오고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고 밝힌 후 가봉 삭감론에는 절대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당시 각의 석상에서 오쿠라대신은 물론 다른 각원들 중에서도 가봉폐지론에 찬성하는 듯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수상에게 ‘각원들은 조선이나 대만 등의 사정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가봉폐지론 등등을 왈가왈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상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만큼 반드시 이에 대해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리라 생각되므로 이 일은 수상의 직권으로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하고 말하자 하라다카시 수상은 이를 받아들이시어 ‘조선이나 대만 사정은 일본 내에서 일하고 있는 관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안일한 상황은 절대로 아니다. 그곳에 근무하는 관리들에게 다소 급여의 우대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므로 가봉 삭감제는 없었던 걸로 해주었으면 좋겠다.’라는 수상의 한 마디로 결국은 가봉폐지론이 꼬리를 감추게 됐습니다. 그 때의 하라다카시 수상의 현명한 판단에 대해 충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국고 보조금 문제

▷미즈노 “그러나 오쿠라대신은 당신이 조선의 예산중에서 도저히 변통할 길이 없다고 한 만큼 오쿠라성의 예산(안)에서도 이 이상의 보조금을 각출 해낼 수는 없다고 되풀이 말했기 때문에 나는 나대로 ‘그렇다면 나도 이 이상 조선통치에 대해 책임을 질 수가 없습니다.’하고 상당히 기분이 격앙돼 강경한 주장을 한 후 그 자리에서 나와 버렸습니다. 하라다카시 수상은 이러한 상황을 보고, 즉시 나를 자택으로 불러 ‘오늘 자네가 한 발언에 대해 나는 충분히 동조하고 있네, 나 자신 어떻게든 해보려 하니 너무 흥분하지 말게.’하고 위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하라다카시 수상의 재단(載斷)에 의해 우리들이 희망한 것과 똑같이는 되지 않았지만, 국고보조금 1000만원과 공채 모집액 2000만원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때 저의 사직설이 나돌아 조선의 신문 등에 정무총감이 사직할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던 것은 예산과정에서 내막이 세어 나와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됩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제 1차 예산이 성립됐고, 거기에 보조금도 1000만원이 나오게 됐으므로 대략 우리들의 주장이 관철됐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후 보조금은 해마다 증액돼 1500만 원까지 늘어났습니다. 보조금 문제에 대해서는 이러한 내막이 있었습니다. 조선에 대한 보조금을 앞으로 계속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에 중지할 것인가에 대해 의회에서 누군가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 오쿠라대신은 장래 머지않아 중지할 것이라고 답변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정무총감 이면서 정부위원이기도 했으므로 저에게도 ‘조선 당국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라고 질문을 해 왔기 때문에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쿠라대신은 머지않아 조선에 대한 보조금을 중지할 것이라고 말씀했지만, 조선 당국자인 저로서는 이를 중지하면 매우 곤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는 점차 이를 증액시켜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앙의 재정 상황을 생각하시어 오쿠라대신은 그렇게 답변하신 것 같습니다. 조선 사정을 감안해 말씀드리면 앞으로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보조금 없이는 조선 예산을 편성할 수가 없을 것이므로 최소한 현상 유지를 해주어야 할 것은 물론, 가능하다면 앞으로는 이를 증액시켜 주셔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그 후에 오쿠라 대신으로부터 그런 식으로 답변을 하면 내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겠냐며 언짢아하는 말을 들었는데 오쿠라 대신이 보조금을 중지하겠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조선 당국자인 나로서는 어디까지나 이를 주장해야 할 것이고, 보조금은 계속 받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이 당신과 나와의 의견의 차이라면 차이겠지만, 조선 당국자로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점은 마땅히 그쪽에서 양해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해 놓고 서로 웃고 말았습니다.”



●조선통치 정책의 확립

▷미즈노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나는 조선총독부 예산을 세 번이나 편성하게 됐는데 조선의 미래를 생각하고 우리 제국의 정책을 실행해나가기 위해서는 일정한 정책을 확정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제 사견을 피력해 다음과 같은 의견서를 써서 하라다카시 수상에게 제출했습니다.”



조선통치 사견 / 미즈노랜타로(水野鍊太郞) // 우리 조국의 조선에 대한 정책은 시종일관 조선 2000만 민중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그 문화를 향상시켜 동양평화의 기초를 확보하는데 있음을 지금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이 또한 내외가 널리 인정하는 바입니다. 한일합병 전에도 우리 제국은 항상 한국을 인도하고 가르쳐 양국의 복리를 증진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일찍이 한국이 타국의 위협을 받은 바, 이것이 우리 제국의 지위까지도 위태롭게 할 염려가 있었으므로 거액의 국가 재산을 투자하고 수많은 생령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국력을 걸고 조선의 어려움을 구했던 것입니다. 청일·러일 양대 전쟁은 지금도 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조선을 양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보장했고, 한국을 개발시키는 데 진력을 다했으며, 때로는 지도자로서 때로는 조언자로서 음으로 양으로 한국을 부조하고자 노력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실정은 스스로 지위를 보유하고 1국의 체면을 완벽하게 유지하기에 그 힘이 부족했고, 항상 화란(禍亂)의 위험에 가득 차 있었던 바, 1906(明治 39)년 우리 제국 정부가 한국정부와 협정(1905년에 맺은 을사조약을 말함)을 맺어, 한국을 우리 제국의 보호 하에 둠으로써 화근을 없애고 평화를 유지할 것을 기약했습니다. 그러나 통감통치 실시이래 시정의 개선, 제도의 개혁을 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의 힘이 너무나 미약해 국내의 치안조차 유지하기 어렵게 됐고, 민중이 이 울타리 안에서 안주할 수가 없게 돼 불안한 정세가 극에 달했으므로 1910(명치 43)년, 명치대제(明治大帝)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한국 황제와 우리 정부의 협정을 거쳐 양국이 병합하기로 대의를 결정해, 한국 영토 및 국민을 우리 제국의 주권 하에 두고 통치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원래의 병합 취지는 다시 환발(渙發)하신 조서(詔書)에서도 이미 분명히 밝히신 바와 같이, 일본과 조선이 서로 일체가 돼 병합함으로써 그들과 우리 사이의 차별을 없애고, 상호 전반에 걸쳐 안녕과 행복을 증진하도록 노력하는 데 있습니다. 역대 총독들은 모두 이 성지를 마음에 새겨 지키고자 노력했고, 조선의 개발을 꾀하고 민중복리를 증진시킴으로써 오랫동안 치평의 화(治平의 化)를 13도 전역에 보급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반 제도 시설들을 한국시대와 전혀 다른 면목으로 일신함으로써 반도의 민중이 비로소 광명어린 정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게 됐던 것입니다. 이어서 1919(大正 8)년 8월 정부는 다시 시세의 진운에 비추어 총독부 관제를 개정해 종래의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더욱더 치화(治化)의 보급을 꾀하고자 노력했고, 조선 민중으로 해금 문명정치의 혜택을 입을 수 있게 해 문화의 향상을 꾀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습니다. 그 개혁 조치로서 병합의 취지를 발양(發揚)하고 시세에 순응토록 함으로써, 더욱 더 그 제도가 민중에서 철저히 침투·시행될 수 있도록 했고, 이로써 조선이 점차 일본과 동일한 제도를 갖출 수 있게 함으로써 종국에는 양자 간에 전혀 차이가 나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조선 민중의 향상 발전을 기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병합의 취지를 관철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대명을 받들고 조선에 부임해 와서 직접 조선의 정세를 시찰한 적이 있는데, 조선 문화의 정도가 너무나 유치한 경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일본과 너무나 거리감이 있어 일본과 똑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에는 아직도 멀고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때문에 점차적으로 순서를 밟아 개발계획을 추진할 것이고,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수준에 도달할 때를 기다려 일본과 동일한 제도적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것이 통치의 근본적인 정책이 돼야 할 것이고, 세계의 대세에 비추어 제반 문화 시설 또한 설치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돼 총독을 도와 그 방침에 따라서 △교육의 확장 및 충실 △산업의 개발 △교통기관의 정비 △지방단체의 육성 △치안유지 및 위생시설의 완성 등을 대강으로 정한 후 대략 아래와 같은 계획을 세웠습니다.

1. 교육의 확장 및 충실

교육의 보급 및 진흥에 관해서는 역대의 담당자들이 이미 상당한 심의를 거듭해 그 대책을 강구해 놓은 바 있지만, 일본과 조선의 교육과정이 매우 달라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차이가 심했습니다. 이들 교육제도들이 병합 당시의 조선 실정에 비추어 시행됐던 것인 만큼 당시의 실정에는 아주 적합한 제도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이를 의심할 여지 또한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병합이후 10년의 세월이 경과했고, 그 동안 문화도 향상됐을 뿐만 아니라, 특히 세계의 추세와 시운의 진보에 따라 조선인들의 향학심이 근래 눈부시게 향상되고 있는 현상에 비추어 볼 때 병합 당시의 구제도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이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즉 초등교육기관인 보통학교의 수가 너무나 적어서 학령아동 중 겨우 2할 정도 밖에 수용하지 못하는 실정이고, 수업 연한도 4개년으로 돼 있어 일본의 교육 연한이 6개년에 비교해 볼 때 매우 큰 간격이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이 졸업해 일본에 있는 중학교나 기타 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할 경우 다시 보습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의 중학교에 해당되는 고등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이 4년으로 돼 있어 이들 졸업생에게 일본 중학교 졸업생과 똑같은 자격을 줄 수도 없습니다. 또한 고등보통학교의 수는 전도(全道)를 합해 겨우 5개교 밖에 없어, 이 또한 일본의 각 부현이 평균 3, 4교 이상의 중학교를 보유하고 있는 실정에 비교한다면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초등 중등 할 것 없이 교육 전반에 걸쳐 교육기관 및 시설이 부족한 실정이고, 일본에 있는 학교와의 연락 조정이 전혀 안될 뿐 아니라, 교육정도의 불균형 또한 너무나 심한 실정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향학심에 불타고 있는 조선인들의 상황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상황으로서는 교육에 적합한 시설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이로 인해 향학의 꿈을 키우고 있는 조선인들이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수긍하는 바입니다. 이와 같이 교육기관이 충실하지 못한 탓에 학업에 정진하려다 좌절감을 맛본 학생들이 그 기세로 다른 분야에서 길을 찾게 됨으로써 오히려 자국인 일본에는 유학하지 못하고 멀리 중국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조선 내에 있는 외국인이나 조선인이 사설로 경영하는 불완전한 사립학교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불문에 붙이고, 이를 절대로 불가할 것이라며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게 되면, 이들 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학생들이 불온한 사 상에 빠져들어 배일 기풍을 띄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더라도 가능한 가장 긴급하고도 중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거액의 경비를 필요로 하는 만큼 처음부터 한꺼번에 모든 일의 완성을 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에 대한 적당한 계획을 수립하는 일이 위정자로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외 중등 이상의 교육기관에 있어서도 현시점에서 보면 이렇다 할 시설이 전혀 없고, 겨우 의학, 공학, 농학, 법학전문학교가 각각 하나 씩 있으나, 그 규모가 매우 적어 일본에 있는 같은 종류의 학교와는 거의 비교가 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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