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플란트 시술법 국내 첫 도입…“낯선 치료법” 편견 해소 노력 노년치의학회 창설…65세 이상 임플란트 건보 적용 정책 이끌어

(동양일보 이도근 기자) -임플란트 시술법 국내 첫 도입…“낯선 치료법” 편견 해소 노력

-노년치의학회 창설…65세 이상 임플란트 건보 적용 정책 이끌어

-아마추어 사학자…중국·러시아 등지 돌며 독립운동사 연구 활동

-“새로운 기술 배타적이어선 안 돼…과학기술개발 적극 지원해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빠진 치아를 대체하는 ‘임플란트’ 치료법이 대중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임플란트는 상실된 치아 자리에 부과적인 수술 등을 통해 인공치아를 심는 원리다. 한국소비자원 통계에 따르면 국내 임플란트 시술 건수는 연평균 약 50만 건에 달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임플란트 시술·이론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인물이 청주 출신의 이종진(73·서울 청담동 한치과 원장·02-3444-2273) 치의학 박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박사는 청주 남문로가 고향으로, 청주 석교초와 청주중, 청주고를 졸업한 청주 토박이 출신이다. 서울대 치과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에서 인턴·레지던트 등 전문의 과정을 거친 그는 1977년 미국 하버드대와 뉴욕대, 에머리대 연수과정에서 임플란트를 만났다고 술회했다.

“그동안 임플란트는 수차례 ‘빅뱅’을 거쳤습니다. 1936년 정형외과용 합금 개발에 이어 1965년 인공 치근을 심는 임플란트 혁명이 시작됐죠. 치과계에선 ‘페니실린’ 발견에 비유하곤 합니다. 이후 1982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임플란트 대폭발이 이뤄졌고요.”

임플란트의 역사적 기원은 기원전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근·현대로 들어와선 1951년 스웨덴의 정형외과 전문의 브로네막(Branemark) 교수가 우연히 티타늄이 생체 뼈에 고정된다는 ‘골유착현상’을 발견, 임플란트 시술 현대화의 계기가 됐다. 1965년 현재 형태에 가까운 임플란트 첫 시술 성공사례가 등장했고, 1981년 임상자료가 학계 등에 보고됐다.

이 박사는 1981년 미국에서 배운 당시로는 ‘혁신적인’ 임플란트 시술·이론 지식을 국내에 풀어놓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임플란트 자료들은 연방정부 지원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비밀자료여서 밤마다 실험실에 숨다 시피 하면서 자료를 복사하고, 연구하곤 했어요. 농담 삼아 얘기하면 ‘훔쳐 배운’거라 할 수 있죠.”

한국 임플란트 대중화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한 이 박사이지만, 1980년대 당시 치과계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티타늄을 재료로 턱뼈골융합을 기조로 하는 임플란트 시술 자체가 당시엔 상당히 낯선 치료법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곳에서 ‘위험한 금속을 입 안에 함부로 넣어도 되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죠. 그만큼 임플란트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던 시절인 거죠. 협회차원에서 용어 정리조차 제대로 돼있지 않다보니 변변한 학술적 논쟁도 하지 못했고요.”

1989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미국치과임플란트학회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뉴욕대 링코우 임플란트연구소 연구원, 브룩데일병원 임플란트연구소 전임의사 등을 지내며 임플란트 시술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논문·시술활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외산에 의존하던 임플란트 재료를 국산화하기 위한 연구 개발을 추진, 4개의 미국 특허를 얻는 성과도 얻었다. 이 박사는 이후 국내 업체들을 통해 재료를 개발해 보급하려 했지만 이 역시 순탄치 못한 과정을 겪었다.

“국내에 없던 새로운 걸 하려니 ‘탄압’이 많았어요. 당시 일본에서 폐기처분된 재료가 국내 수입되는 걸 보고 국산화된 임플란트 재료를 보급하려 했던 건데, 관련법이 없다보니 불법이라며 검찰에 불려가기도 했었죠. 관련 업체 대표가 구속되는 일도 겪었고요.”

그는 그동안 서울대와 고려대, 인제의대 등에서 강의활동을 하며 800여명의 제자를 양성, 임플란트 알리기에 주력했고, 서울에 한치과를 개원해 직접 시술도 펼치고 있다. 특히 대한노년치의학회를 창설, 학회장을 맡아 노인 임플란트 건강보험 확대에 나선 결과 2016년 65세 이상 임플란트 건강보험 적용 정책 시행을 이끌어 냈기도 했다.

인생을 탄압과 편견과의 투쟁으로 보낸 이 박사는 그 자신이 치과의사면서도 동시에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사, 우리문화선양회 이사로 있는 아마추어 사학자다. 역사 강연은 물론 중국·러시아 등을 돌며 윤동주 생가 복원, 청산리전투 기념조형물 설치 등 활동을 펼치고 있다.

새로운 치료기술이 개발돼 그 치료법이 대중화되기까지는 묵묵히 신기술 보급에 힘쓴 의료인들의 숨은 노력이 있다. 이 박사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 대중화된 국내 임플란트 기술은 이제 3D, 정보통신 기술과 맞물려 더욱 고도화되고 있다.

이 박사는 “새로운 기술에 배타적이어선 안 된다”며 “국제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앞으로 전문적인 과학기술 개발에 더욱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이도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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