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진 (국민대 강사)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의 일생은 비유하자면 한폭의 병풍(屛風: folding screen)입니다. 그가 강조한 ‘경(敬)’이나 ‘정(情)’의 개념이 눈앞에 펼쳐지며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 세간의 풍파로부터 지켜줍니다. 그의 일생과 사상은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은은함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특히 퇴계 후반생은 오늘날 우리가 잊고 있는 점들을 되새겨줍니다.

퇴계의 생애는 크게 초년기인 수학의 시기와 중년기인 출사의 시기, 그리고 말년기인 강학의 시기로 나눕니다. 출생부터 과거 급제까지인 33세까지가 수학의 시기(총 33년), 벼슬을 처음으로 맡은 34세부터 병으로 사직서를 제출하며 해관을 청한 49세까지가 바로 중년기(총 17년)입니다. 마지막 강학기는 50세가 되는 해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20년입니다. 퇴계의 70생 중 가장 빛나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50세부터 70세까지 가장 주요한 저작들이 완성되며 퇴계의 철학적 이념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대부로 기억되는 그이지만 사실상 관직에 있었던 시기는 매우 적었습니다. 하지만 관직에서 물러나서 세속을 등지고 은둔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더 치열하게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를 돌보는 공부)에 몰두한 결과 사상을 완성시키는 공을 이룹니다. 사화와 당쟁 등이 격동하는 시대에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는 경험이 겹쳐지며, 세속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데 회의를 품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46세 때 둘째 부인을 잃고, 48세에 둘째 아들을 잃고, 50세에 가장 의지하던 형을 잃는 등 사생활에서 큰 상실이 연달아 닥친 일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들과 손자들에게는 계속해서 과거시험 응시를 종용하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채찍질하기도 하는 엄한 부모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에게도 “공부는 고통스럽지만 절대 그만두지 말라.”고 권유합니다.

그렇다면 퇴계가 노년에 생각하고 권유했던 진짜 공부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퇴계의 노년을 특징짓는 점을 세 가지로 꼽아 살펴보려 합니다.

첫 번째는 하강의 움직임 즉 퇴로(退路)를 선택한 점입니다. 그건 은둔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를 배려하는 처사였습니다. 예전에는 오늘의 정년퇴임에 해당하는 치사(致仕)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치사에 해당하는 70이라는 나이가 되기 20여년부터 계속해서 관직을 고사하거나, 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퇴계는 돌아가신 1570년까지 3회의 파직 외 약 90종의 관직을 임명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퇴계는 79회의 사직원을 제출했지만 조정이 30회는 사면하고 49회는 무리하게 출사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43, 46, 50세)에 걸쳐 퇴귀했다가 소환당하기를 반복합니다. 이름 그대로 물러날 퇴(退). 퇴계였습니다. 그가 낙동강 상류인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며 호를 퇴계라 개칭한 게 46세입니다. ‘물러날 퇴’자를 넣은 것도 정계 은퇴에 뚜렷한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퇴계를 네 번이나 불러도 응하지 않자, 명종은 과거 시험 제목으로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는다(招賢不至, 초현부지)’라고 낼 정도였습니다. 명종은 상사병으로 퇴계를 그리워하며 계상서당을 화폭에 담아오도록 시키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성리학적 질서는 오로지 리(理)를 향한 상승지향의 정치이념을 갖게 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퇴계는 그 안에서 적극적으로 하강의 움직임을 개척합니다. 그 특징이 그를 조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선비’의 모습으로 만들어냅니다. 권력과 부를 등에 지고 도덕성을 설파하는 양반과 사대부 이전에, 오로지 도덕성을 향한 철저한 자기투쟁을 벌이는 자기회귀적 선비의 자화상입니다. 그는 헛된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퇴로를 적극적으로 개척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편지에 주목해봅시다.

“오늘날은 신하가 벼슬을 버리고 물러날 수 있는 길이 영영 막혀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물러나기를 청하는 이가 있으면 허락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뭇 사람들의 분노와 시기를 사게 되어 갖은 핍박을 받고, 다시는 물러나 피하지 못하고 그들과 한데 휩쓸리고 맙니다. 이렇기 때문에 선비가 한번 조정에 서게 되면, 모두 낚시에 걸린 고기 꼴이 되는 것입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중)?

영산대 배병삼 교수는 퇴계가 기묘사화에서 조광조 등 혁신파 정치인들이 몰살당한 근본적 이유는 “물러나고자 하여도 퇴로가 봉쇄된 조선의 정치 구조 때문”이라고 결론내린 이 편지글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는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며, 있는 줄만 알고 없는 줄을 모르며, 얻는 줄만 알고 잃을 줄을 모르면 어찌 성인이겠는가?(知進而不知退하며 知存而不知亡 知得而不知喪이니 其唯聖人乎)”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이 구절에 따라 치사에 대해서도 당시의 세태를 비판합니다.

“옛날 치사(벼슬을 그만함)하는 예가 있었는데 염치를 숭상하고 절의를 면려하는 수단이었다. 송나라 때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되기 전에도 염퇴(恬退)하는 것을 허락해 그 뜻을 이루도록 해 줬으니, 그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예절이 있었다. 후세에는 이런 길이 꽉 막혀 한번 공명의 굴레 속으로 얽혀 들어가면 다시는 허락을 받아 물러날 기회가 없으니 정말 한탄스런 일이다.”(‘언행록’ 중)

이런 의미에서 퇴계가 지속해서 퇴로를 선택한 것은 은둔이나 도피라기보다는 자기에의 배려 즉 수기(修己) 또는 위기(爲己)의 공부를 단단히 부여잡기 위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치사의 기준이던 70세보다 20여년 이른 조기 퇴직를 한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 노년이 갖는 새로운 중요성과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서양철학에서 미셀 푸코가 세네카에게서 발견한 노년을 정의했던 방식과 흡사합니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세네카는 60세 즈음에 은퇴했고,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향유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이상적 노년, 자기 스스로 만드는 노년, 단련시키는 노년’을 설정합니다. 노년은 양면적 경험입니다. 숙련도가 높지만 일상생활에서 혹은 정치생활에서 능동적이지 못한 상태기도 합니다. 노년은 남들에 조언할 수 있지만 타자에 의존하는 허약한 상태기도 합니다. 노인은 자기 자신에게 완전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자, 자기에게 만족할 수 있는 자, 모든 즐거움과 만족을 자기 내부에 설정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키케로는 노년을 실존의 긍정적 목표로 생각합니다. 세네카는 노년을 적극적으로 향하는 운동을 제안합니다. “당신은 확실한 은신처를 제공할 수 있는 곳으로 서둘러 가십시오. 그게 바로 노년입니다.” 다시 말해 노년은 생의 애매모호한 종말이 아니라 생의 집중점, 즉 지향해야 할 긍정적 중심점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늙기 위해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년의 평정과 자기만족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퇴계의 적극적 하강의 운동이야말로 조선 사대부들을 상승지향의 전장에서 해방시키는 퇴로의 개척이자 노년을 향한 긍정의 운동이었습니다. 오늘날 고령화사회에서 특히 노년의 하강운동이 절실히 다가옵니다. 퇴로는 사실상 지식인이나 위정자의 자기 회귀적 성찰을 촉구하며 영혼의 돌봄을 어느 때보다 강력히 추동하는 때입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일단 나라를 위해 일하는 정치인이나 관리가 되면 그들의 도덕성을 재고하고 자아회귀적인 성찰을 할 수 있는 시간, 재교육 절차가 없습니다. 퇴계가 우려했던 꽉 막혀 낚시에 걸려버린 고기가 되는 꼴입니다. 이런 자기 반성적 퇴로가 보장되지 않은 사회에선 내면적 자존감을 지닌 선비가 나올 수 없습니다. 내면적으로 단단하지 못한 통치자는 결국 피통치자를 불안하게 합니다. 자아통치가 타자통치와 긴밀히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퇴사운동, 기본소득론이 고개를 드는 이유도 이런 퇴로의 움직임을 살려주려는 일종의 기획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회에 퇴로를 선택한 선비에 대한 모델이 많아지면, 아마 이런 삶이 실패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잘 늙기 위해 사는 삶’이라는 가장 자기 배려적 삶이라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금욕적일 정도로 진실을 수호하는 용기입니다. 또 이것은 타인에의 돌봄입니다.

그가 퇴로를 선택한 후 얻은 삶의 목표는 자신의 학문적 완성과 후학의 양성이었습니다. 실제 퇴계의 주요 저술은 주로 이 시기인 50~60대에 걸쳐져 있습니다. ‘성학십도’, ‘계몽전의’,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심경석의’, ‘사칠논변’ 등 입니다. 퇴계는 이 시기에 자신이 좋아했던 중국 송나라 주자(朱子)처럼 만세의 정론을 세워 정학을 옹호하고 이단을 비판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퇴계의 후반생을 보면 ‘논어’에 나오는 ‘배우는 데 싫증내지 않고, 가르치는 데 게으르지 않다(學而不厭 誨人不倦)' 는 문구가 생각납니다. 퇴계는 서거 전 4일 “죽는 마당에 안 볼 수가 없다.”며 제자를 불러모았다 합니다. 평생 그토록 정성스레 제자를 가르쳤으면서도 “평소에 올바르지도 못한 견해를 갖고 종일토록 강론한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란 마지막 인사를 남깁니다. 평소에 잘못 가르친 게 있을지 모르니 이해해달라는 당부입니다. 스승으로서 제자를 대하는 예의와 성실이 아니라면 하기 어려운 행동일 겁니다. 그는 진실을 말할 용기를 갖고 있었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성심성의껏 실현합니다.

주요 저서 역시 제자사랑 덕에 탄생합니다. 주자의 편지글을 모아놓은 ‘주자서절요’는 원래 퇴계가 스스로 참고하기 위해 또 제자들과의 강습에 편하게 하려는 교안용이었습니다. 제자 황중거가 인간(印刊)하자고 주장해 출판된 것이었습니다. 퇴계는 주자대전 편지글들 속에서 사제 간 두터운 의리와 인정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한수작, 군소리’까지도 그게 딱딱한 의리보다 인생의 진짜 맛을 찾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며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주자를 닮아갑니다. 그가 300여 제자들과 주고받은 1500통의 편지들은 문목(問目: 특정 주제에 대한 질문목록과 그 답)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최근에야 교수와 학생들이 카톡이나 이메일로 쉽게 질문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전라도 광주에 사는 고봉 기대승과 경상도 안동에 사는 퇴계가 9통의 편지(일명 사단칠정논쟁)를 주고받는 데 걸린 시간은 자그마치 8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볼 때, 퇴계가 허약한 몸에 제자들의 간절한 질문에 답하며 썼던 1500통의 성의는 우리를 숙연하게 할 만합니다. 그 문목을 보면 제자 대하기를 친구 대하듯, 아무리 나이가 어린 제자라고 해도 이름을 부르지 함부로 너라고 칭하지 않았습니다. 26세 연하의 고봉, 35세 연하의 율곡과도 공(公)이라 칭하며 주고받은 편지를 직접 읽어보면 느낌이 옵니다. 공자가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교육비를 낼 수 없으면 ‘속수(束修, 일종의 육포같은 말린 고기)’를 내도 제자로 받아준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정신을 퇴계는 확대시킵니다. 퇴계의 제자 중 배점(裵漸)은 천민이었는데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강의를 할 때, 반드시 뜰에 절하고 청강을 하는 것을 보고 학문을 좋아한다고 기뻐하며 제자로 받아들입니다.

조선시대는 어느 시대보다 그 도덕적 쟁탈전의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쟁이나 사화의 형태가 아니라, 진실을 가리는 시비의 쟁탈전을 조용하게 치룹니다. 평생 주자와 주자학을 신봉하고 계승하고자 했습니다. 퇴계는 몇 번이고 학문을 그만두고 싶었으나, 자신이 맡아서 꼭 해야 할 큰 사업이며 자신의 사명 ‘만부각오(晩復覺悟)’라 느끼면서 전전긍긍해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선인(善人)이 많아지는 것을 ‘평생숙원이자 평생사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본성의 선함에 한 치의 의심을 하지 않는 주자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가 편지를 통해 동시대인과 논쟁하고, 그 기록을 통해 치열한 도덕적 쟁탈전을 벌인 이유입니다.

때문에 퇴계가 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22편을 모아놓은 문집인 ‘자성록’은 아주 특이합니다. 서문에서 “자신이 쓴 편지를 다시 보고 재점검하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밝혀놓고 있는 것을 보면 퇴계는 거의 결벽에 가까울 만큼 자신의 성찰에 투철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처럼 이메일이 편하고, SNS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쉽게 알릴 수 있는 때가 아니었고, 사람 인편에 이 글을 전하면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도착할 수도 있고, 또 유실될 확률이 많다보니, 편지를 쓸 때는 항상 자신이 저장을 해뒀다가 두고두고 읽기 위해 필사를 해둡니다. 일종의 팩트의 크로스체크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자세를 통해 퇴계가 진실을 대하는 자세가 얼마나 엄중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훈계할 때는 매우 엄숙하게 했지만, 절대로 자상함을 잃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면서도, 그것이 진실이 아닐까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기탄없이 말하기를 좋아하고 말을 앞세우며 말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세태, 즉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나 가짜 뉴스(fake news)가 횡행하며 반지성주의라는 얘기가 나오는 현실에서, 퇴계가 보여준 진실을 대하는 자세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중국 뚜웨이밍 교수는 퇴계의 자성록에 대해 “퇴계의 반성의 특징은 자신의 잘못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 감정, 그리고 잘못을 알면 방향을 바꾸려는 열렬한 결의에 있다”고 평가합니다.

세 번째는 건축가적인 요소입니다. 즉 환경에의 돌봄입니다. 퇴계는 오천지교(五遷之敎) 즉 삶의 거처를 다섯 번이나 바꿔가면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청빈한 삶의 형태 안에서 자신의 사상을 펼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를 찾아 이상향을 꾸몄던 건축가기도 합니다.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지만, 우주론과 심성론을 꿰고 있었던 퇴계로서는 우주의 기운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거처지가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철칙이 있었으니, 바람과 비를 겨우 피할 정도의 집 세 칸을 넘지 않아야 했습니다. ‘초가삼간’이란 말에서 보듯 청렴과 절제의 극치를 보인 것입니다. 제자 학봉 김성일은 퇴계선생에 대해 “살림은 소박하고 청렴해 가난하여, 사는 곳이 겨우 비바람을 가렸고, 거친 밥을 먹고 나물을 씹으니,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는 바였으나 그렇게 사는 것이 편했다. 후학을 가르치는 데 싫어하거나 게으르지 않아서 비록 병환이 있을지라도 강론을 그만두지 않았다.”고 회상합니다. 끝까지 단칸 방에서 살다 가기를 원했지만, 그 방에서 우주를 통찰했고, 인물을 길렀으며, 학자로서의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퇴계는 퇴로를 개척하기로 결심한 후 강학을 위한 자리는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신중하게 자리를 고르고 또 고릅니다. 퇴계는 경천(敬天)-외천(外天)-사천(事天)의 정신으로 하늘을 섬기듯 자연을 섬기면서, 그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하고 더 좋은 자연적 환경을 따라 거처를 옮깁니다. 그 결과 지산와사(芝山蝸舍)-양진암(養眞庵)-한서암(寒棲庵)-계상서당(溪上書堂)-도산서당(陶山書堂)으로 이동합니다.

퇴계는 노송정 퇴계 태실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 30세까지는 삼백당이란 온계 형의 집에 살다가, 처음 지은 집이 지산와사(芝山蝸舍)입니다. 30세에 재혼한 권씨부인과 이듬해 처음으로 살림집을 마련한 곳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달팽이 껍질을 엎어놓은 듯 겨우 몸을 감출만한 작은 집이었습니다. 이때 퇴계는 영지산인이라고 줄여서 자신을 지산이라고 불렀습니다. 당호는 선보당이었는데, 주역의 “무구자, 선보과야(无咎者, 善補過也)”에서 취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퇴계가 46세에 권씨 부인을 잃고 귀향했을 때, 지은 집입니다.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병을 치료했으며, 이때 자신의 호를 지산에서 퇴계로 고쳐부르고, 이름 그대로 진리 탐구에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는 퇴계가 다시 50세에 고향에 돌아와서는 자리를 옮겨, 서쪽에 세 칸짜리 지은 한서암(寒棲庵)을 건축합니다. 조그만 한서암에서 짚자리와 갈대를 깔고 청렴한 생활을 하는 데 깊은 감동을 받은 제자들, 이현보? 이문량 부자와 황준량은 이런 퇴계가 좋아서 자주 술을 들고 찾아와 시를 읊고 세상을 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인이 늘어 강학을 위한 서당을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끼자, 51세에 한서암을 아들에게 살림집으로 내주고, 토계 북쪽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습니다. 58세의 퇴계가 23세 이이를 만난 곳이 이곳이고, ‘천명도설’과 ‘주자서절요’를 완성한 곳도 이곳입니다. 천 원짜리 지폐의 앞면엔 퇴계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데 그 뒷면에 나오는 그림이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고 그 집 안의 선비가 퇴계며, 그때 쓰는 책이 주자서절요라 전해집니다.

그 계상서당도 비좁아 제자들의 애원에 못 이겨 결국 퇴계는 강학할 공간을 찾게 됩니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은 그렇게 5년간의 구상으로 지어진 집입니다. 마침내 이문량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의 안식처를 도산에 마련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만년에 기쁜 일입니다.”며 환호를 지릅니다.

아름다운 산과 물을 너무나 좋아했던 퇴계는 만년에 도산 아래 낙수의 위에 땅을 점쳐 방을 짓고 책을 갈무리하고 꽃나무를 심고 못을 파고 마침내 도옹이라 고쳐 불렀습니다. 도산서원의 도(陶)자는 도연명의 성이기도 합니다. 도산서당의 대문은 유정문(由正門)으로 싸리가지를 얽기설기 낮게 세운 문입니다. 그윽하고 곧다는 뜻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아담하지만 좁은 세 칸 서당 안에서도 탁 트인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안과 밖에 따로 있을 수 없다는 내포적이면서 초월적인 뜻을 다 함축하고 있는 퇴계의 철학이 여기에 반영돼 있습니다.

또 풀 한포기도 이름을 지어주며 의미 부여를 합니다. 서당주변을 유교적 이상이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 퇴계의 생각이 반영된 것입니다. 퇴계는 세 칸을 열어 우주를 담을 줄 알며, 기본을 지키면서 필요에 따라 변하고, 변화 속에서 원칙을 지킬 수 있었던 사상의 건축가였습니다. 퇴계가 남긴 책 속에 철학적 사유가 담겼다면, 도산서당에는 원칙을 지키며 실생활을 고려한 건축한 개론이 담겨있다는 셈입니다.

퇴계는 비석을 세울 때 작은 돌 앞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늘그막에야 도산에 물러나 숨어산 진성 이공의 묘’라고만 쓰고 간추리라고 명합니다. 이렇게 퇴계의 노년은 자기 배려-타인 배려-환경 배려가 동심원적 질서를 이어가면서 확장되는 은은한 배려의 노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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