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데 쿠바를 둘러보면 전쟁 중인가 싶기도 하다. 모든 운송 수단이 대중 교통을 대신하고 있어서다. 트럭을 개조한 시내버스 '구아구아'가 손님을 태우려 대기하고 있다.

(동양일보 김득진 기자) 사흘 머물렀던 산티아고 데 쿠바, 고스란히 남겨진 전찻길과 항구가 전하는 낡은 메시지에서 뾰족함이 느껴진다. 몬카다 병영 총탄 자국과 피델 초상화며 군데군데 내걸린 M7-26 깃발이 게릴라전 무대였던 1972미터 삐꼬 뚜르끼노에 나부끼는 듯하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 정기 받은 주민들 혈기에다 카리브해 햇살까지 덧씌워져 시가지는 더 뜨겁다. 피델이 산티아고 데 쿠바 지방색을 믿은 거나 모든 혁명이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게 증명되고도 남는다. 그걸 눈치 챈 뒤 땀과 음악이 춤에 뒤섞인 살사 공연장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아바나만 해도 열기가 장난 아닌데 산티아고라면 더 볼 필요 없을 것 같다.

길가다 마주치는 떠돌이 개 눈빛도 아바나와 딴판이다. 똑같이 방목하는 개가 어째서 그토록 사납게 짓는지. 숫자에 뒤지지 않는 곤충들도 드세긴 마찬가지다. 새벽에야 짐 풀고 설핏 잠들 무렵 몸 여기저기가 가렵다. 모기가 물은 게 틀림없다며 불 켜고 살펴도 눈에 띄는 건 한 마리도 없다. 혹시나 싶어 모기약을 가방에서 꺼내 머리맡에 두고 펜스 치는 게 옳다며 이불로 가리고서 잠을 청하지만 가려운 곳은 늘어난다. 잠자긴 글렀다 싶어 불을 켜고 이불까지 들춰 샅샅이 훑는다. 졸린 눈에 보이는 건 매트리스 위를 기어오르는 개미 떼다. 오르미가라는 놈들도 물려받은 지방색으로 외지인 공격에 밤을 잊고 있다.

기울기 가파른 전찻길 따라 땀 흘리며 고개를 넘어선다. 저만치 구도틀 모양 골목이 항구 풍경을 액자 속에 담고 있다. 아지랑이 커튼 드리운 화물선은 여기가 산업 도시라며 뿌우 뱃고동 울려대고, 오랜 소리 따라 공간 이동하면 어선이며 화물선 빼곡하게 들어찬 부산 남항 모습이 희부윰 떠오른다. 느리게 치켜드는 영도다리와 그 위를 덜컹덜컹 다니다 1967년 멈춰선 전차도 어렴풋이 드러난다.

내리막길 끝에 펼쳐진 어물전, 난전 악다구니 따라 하나 둘 손님이 모여든다. 펄떡이는 생선과 싸웠으면서도 장바구니랑 실랑이 하는 것마저 이겨내야 하는 장사치에게서 비단결 같은 성정을 기대하긴 어렵다. 가득 채워진 장바구니에서 삐져나온 연민이 비린내와 뒤엉킨 수산시장. 아귀다툼에 떨어진 생선 비늘에 어룽거릴 무지개는 부모 대신 동생 돌보는 아이 향한 응원가다.

1900년 문 열었다는 레스토랑에 들어선다. 오래된 식당이 널린 곳이지만 호텔 버금가는 인테리어가 시선을 끈 탓이다. 해지려면 한참 남았지만 미리 저녁을 먹어둘까 싶어 메뉴판을 뒤적거린다. 내국인용 식당 빨라다르보다 스무 배 비싸다니, 도저히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아 나중에 오겠단 말만 남기고 돌아 나온다. 바깥에는 끝없는 평행의 철길과 드리워진 전깃줄 아래서 고등학생들이 아이스 바를 빨고 있다. 전차가 덜컹거리며 달려와 부모 곁에 데려다 줄 거라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오래 전 떠나버려 지구 한 바퀴 돌아야 도착한다는 사실은 모르는 듯.

해 묵은 오크통 하나가 걸음을 막아선다. 그걸 본 뒤 근처에 럼 박물관이 있단 얘기가 떠올라 가이드북을 펼친다. 책에 실린 사진과 똑같은 건물을 보고 무릎을 친 순간 박물관이 만든 널따란 스크린의 마술 속으로 훅 빨려든다. 미리 온 팀과 섞여 럼 제조와 저장법을 알아두란 뜻이라 싶어 일행과 섞여 귀 기울이는 사이, 눈치 빠른 직원이 ‘치노, 돈을 내야지’ 하며 손을 내민다. 치노 아니라며 손을 내젓지만 입장료에 차별은 없다며 두 손 벌려 어깨를 치켜든다. 돈을 건넨 순간 럼주를 맛 볼 수 있다고 웃으며 얘기하는 직원, 입장료 깎아 주는 게 훨씬 낫겠는데 그를 설득하기엔 스페인어 실력이 모자라 입을 다문다. 벽을 따라 럼 만드는 공정을 이해하기 쉽도록 여러 가지 그림이며 사진이 걸려 있다. 오크통이라 여겼던 백삼목 럼주 통이 전차 다니던 골목을 삼백 년 가깝도록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칵테일용으로 쓰이는 투명한 럼주는 싸지만 벨벳으로 감싸 나무 상자에 넣은 건 엄청 비싸다고, 그 중 2005년산 막시모는 귀한 데다 2000달러가 넘어서 아무나 사기 어렵다. 술을 즐겨 마시진 않지만 5년짜리 시음용 럼을 조금씩 입에 넣고 혀를 굴려본다. 단맛 뒤에는 켜를 이루며 밀려드는 노예들 한숨이 목구멍에 턱 걸린다. 몇 백 배 비싼 막시모에는 그들 한 맺힌 피가 응축되어 있을 것 같기도 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땅 모양 들쑥날쑥한 곳일수록 인심은 야박하고 성품은 거칠어지는 게 당연한가 보다. 산티아고 데 쿠바 전찻길 따라 걸으며 인간 심성은 자란 환경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힌다. 악 쓰지 않고선 살아낼 수 없는 처지, 지형 험한 곳에서 살아가면서 부드러운 성정 갖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남보다 한 발 뒤처지면 가족들을 굶겨야 할지도 몰랐을 산티아고 데 쿠바의 혁명기, 박물관에서 마신 럼주 취기가 근근이 살아낸 시간 속으로 여행자를 끌어들이면 어선이 피워 올린 연기는 체 게바라 시가 향기처럼 구수하다. 억척스레 살아낸 사람이라면 혈기만으로도 난관을 뚫고 나갈 거란 믿음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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