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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67)-고령화 시대에 고령자를 생각한다 / 80대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50대의 나
동양포럼(67)-고령화 시대에 고령자를 생각한다 / 80대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50대의 나
  • 박장미
  • 승인 2018.04.22 2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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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성(청주벨로체피아노 대표·수필가)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오늘도 어김없이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방안에 가득하다. 젊은이들처럼 소낙비가 쏟아지듯 날렵하고 빠른 속도로 일정하고 힘 있게 두드리는 소리도 아니고, 봄비가 내리듯 소리 없이 조용조용 하지도 않다. ‘툭~툭~~ 턱~턱~’ 들려오는 소리의 간격은 불규칙하고 소리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듯 하다가도 잠시 후 그 고요한 적막을 깨고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또 들린다, 때론 크게, 때론 작게 귓전에서 항상 들리는 익숙한 소리다. 어머니가 굼뜨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다.

그 소리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들려온다. 팔순의 어머니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도 자다가 일어나 거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컴퓨터 앞에 조용히 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시상이 떠오르거나 좋은 소재가 생각날 때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식지 않는 대단한 열정이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서…….

어머니는 힘들고 고달픈 외로운 중년을 보내셨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몸이 연약했던 어린 시절, 친정어머니의 세심한 보호와 사랑 속에서 행복한 유년을 보냈었다. 하지만 스물네 살 되던 해에 친정어머니의 권유로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남자에게 시집와 오남매를 키우며 여자로서의 아픈 시절을 보냈다. 무뚝뚝하면서 권위적이고 뒤늦게 대학을 다니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어렵고 힘든 경제적 여건, 뒤늦게 겪은 투병의 아픔 등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홀로 감내해야만 했다. 성직자의 아내로서 오 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면서 남편을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으로 성공시켰지만, 긴 인생 속에서 정작 본인은 없었다. 자식들을 다 키우고 나니, 우울증에 걸릴 만큼 인생이 허무해졌다.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가슴 속의 응어리를 글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한풀이요, 황혼에 찾은 행복이며, 가슴이 뻥 뚫리는 게 어찌나 시원한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고 했다.

초창기에 지은 ‘허무’라는 시에는 이러한 심정이 잘 담겨 있다.

“오늘도 밥하고 설거지하고 / 청소하고 빨래하고 / 그이도 학교 가고 / 아이들도 학교 가고 // 내일도 또한 그런 것들 / 지치고 쇠약한 몸과 마음 / 나의 기쁨은 어디에 / 나의 행복은 어디에 // 손은 부지런히 빨래를 비비는데 / 텅 빈 허전한 가슴은 눈물 공장인가”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는 어머니가 회갑을 맞이하던 해부터 시작하여 이십 년이 넘도록 쉬지 않고 두드린다. 놀랍고 반갑기도 하지만 참으로 신기하다. 젊은이들조차도 컴퓨터와 인터넷을 지금처럼 사용하지 않던 오래전에, 딸과 같은 나이의 컴퓨터 강사에게 수많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이런저런 눈치를 살피며 늦깎이에 컴퓨터를 배우셨다. 어머니는 특유의 꼼꼼한 기억력으로 팔십 평생의 지난 과거를 시와 수필이라는 형식을 빌려 표현하며 기록했다. 행복했던 유년을 써 내려갔고, 결혼과 신혼생활을 통해 겪게 되는 여자로서의 아픔과 고독을 풀어냈다. 우울증에 빠져 고통 받던 40, 50대와 그것을 힘들게 극복해 가는 과정을 표현했고, 60대 이후 노년의 세세한 일상들을 차례차례 써 내려 갔다. 특히 우리의 옛 어머니들만이 겪었던 일부다처제의 가정환경과 어린 나이에 겪은 동생의 죽음,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의 결혼, 권위적인 남편과 목사의 아내로서 겪는 말 못할 어려움과, 철없는 아이들 곁에서 겪게 되는 소외감을 표현했다. 육순을 넘어서면서는 노년의 힘든 손자보기, 딸을 외국으로 시집보내는 어머니의 애절한 그리움, 그리고 오래전 뇌경색으로 인한 투병을 통해 겪는 여러 경험을 표현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불편한 손과 팔다리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하루도 글쓰기를 쉬어 본 적이 없다. 이러한 글은 씨실과 날실로 엮어져 한 벌의 옷이 되었다. 어머니는 이 모질고도 모진 옷을 입으시고, 지금은 편안하게 웃으신다. 오늘도 거실 한쪽 컴퓨터 앞에 앉아 마비되었다 풀린 불편한 손으로 더듬더듬 자판을 두드린다. 온 정성과 힘을 다해…….

감사하게도 어머니는 십팔 년 전에 시, 동시, 수필 등 3개 부문의 신인 문학상에 각각 당선돼, 등단 작가가 됐다. 지금까지 천여 편 이상의 글, 여섯 권의 시집과 동시집, 수필집을 출간했다. 또한 여러 문학 단체와 인터넷 문학회에서 많은 글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뒤늦게 찾은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

이제 필자의 아버지에 대해 얘기를 하고자 한다. 이러한 어머니의 뒤늦은 기쁨과 행복에는 아버지의 공덕이랄까 은혜(?)가 크다. 아버지는 45년이라는 긴 세월을 개신교 목사로 목회생활을 하셨고, 누구나 인정하는 성공한 목회자로 은퇴하였다. 오로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어렸을 적부터 보고 자랐기에, 거기에 쏟은 열정과 신실함은 장남인 나로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아버지의 성공 뒤에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의 희생과 눈물이 뒤따랐다.

아버지는 손이 귀한 집안의 9대 독자로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되어, 외갓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면서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다. 혼자서 외롭게 자라났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만을 무척 열심히 하였다. 동네 어른들이 고아인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고 앞길을 걱정했지만, 아버지는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이에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는 이때 다음과 같은 찬송가를 즐겨 부르며 위안으로 삼았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 주 너를 지키리. / 주 날개 밑에 거하라 /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때나 어디서나 /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아버지는 지금도 운전을 하거나 틈만 있으면 혼자 중얼거리면서 여러 가지 찬송가를 부른다.

이후 청년기에 일찍 독립하여 20대 초반의 나이에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어머니와 결혼을 하였다. 어머니도 같은 생각으로 오로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만 믿고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손수 거주할 기와집을 직접 짓고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어가는 어려운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신앙이 돈독하였던 아버지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도시로 나가는 바람에, 어머니를 비롯한 남겨진 가족들은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면서 어려운 농촌 생활을 해야만 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된 아버지는 충북의 한 시골 마을 목회를 시작으로, 경기도 파주와 충남 아산을 거쳐 진천에 있는 진천중앙교회에 부임했다. 1975년도에 진천중앙교회에 부임했을 당시, 100여 명도 안 되는 작은 규모의 시골 교회였지만, 37년간 담임목사로 재직하면서 1500여 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시키고 오래전에 은퇴했다.

아버지의 목회활동은 오직 성도와 교회밖에 몰랐다.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돌볼 겨를도 없이 목회에만 열중했다. 어렸을 때부터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9대 독자로, 고아로 자라서 그런지, 가족들과 다정다감하게 얘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목회활동 중에는 어떤 일을 할 때, 항상 계획을 세웠고 목표가 뚜렷하고, 옳은 일이라 판단되면, 누가 뭐라든 그것을 꼭 해내고야 마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초창기의 시골목회는 경제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오남매 형제들은 하루 세 끼 식사를 해결하기도 힘들었다. 어느 날 아침 온 식구가 멀건 국수를 먹는 것을 본 어느 교인이 “목사님 가족은 국수를 좋아하시나 봐요.”라고 말한 적도 있다. 나는 학교에 낼 등록금이 없어 선생님으로부터 등록금 납부독촉을 수시로 받았다. 또한, 형제들이 한집에서 생활할 형편이 되질 않아, 일부 형제들은 부모님과 떨어져 홀로된 외할머니 집에서 몇 년을 떨어져 살면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더 가슴 아픈 사연은 평생을 행복하게 먹여주고 공부시키고 키워준다는 말에, 막내 남동생을 남의 집에 양자로 보내야만 했던 일도 있었다.

필자의 꿈은 초·중학교 시절에는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는 것이 희망이었고, 부모님을 비롯한 이웃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크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버지처럼 가족들의 희생이 뒤따르고 오직 남을 위해 헌신하는 목사가 되는 길을 나로서는 도저히 감내할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깊어지면서, 그 길을 포기했다. 하지만 셋째인 여동생이 현재 그 길을 걷고 있다.

아버지는 목회 초창기부터 가는 곳마다 낡은 교회를 다시 짓고 허물어져 가는 사택을 새로 지으면서 무던히도 애를 쓰셨다. 손수 기초 설계를 하고 흙을 파서 나르고, 벽돌을 만들어 성도들과 함께 건축을 하였다. 아마 20대 초에 본인이 손수 집을 지어 본 경험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선교에 관심이 무척 많았던 아버지는 진천중앙교회로 부임하면서, 교회가 없는 인근 면소재지에 9개의 교회를 개척해 설립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또한 중국과 우리나라가 정식 수교한 1992년 이전부터 중국 선교에 힘을 쏟았다. 한국에 있는 교회나 지인들에게서 모은 후원금으로, 중국 현지의 교회 부지 선정과 착공, 그리고 준공하여 헌당하기까지 살피며 감독하고 관리하였다. 수교 이전에 중국을 가려면 홍콩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는 힘든 길을 감내해야만 했다. 30여 년 동안 중국에서 소수민족이 가장 많이 사는 윈난성이나 쓰촨성의 오지마을을 찾아 해발 2~3천 미터 고산지대를 버스로 경운기로, 때론 오토바이와 도보로 오가며, 80여 개의 예배당을 개척하거나 신축하는 등 평생 교회설립에 힘을 쏟았다. 또한, 소수민족들을 위해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나, 소수민족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을 지원하기도 했다. 윈난성 차마고도길 오지를 수십 번 다니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 이 사역(使役)은 은퇴한지 10여 년이 되어가지만, 중국 오지를 선교하는 일을 팔순이 다 된 지금도 멈추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성경을 통틀어 요약한다면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이다. 아버지가 하신 일 중에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목회와는 별도로 지역사회와 이웃을 위해 섬기는 일을 많이 했다. 30여 년 전에 진천에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산업화로 공장이 많이 들어섰다. 90년대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이 들어오고, 이후에 결혼 이주여성들도 많이 증가했다. 이때부터 이들을 위한 쉼터와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예배, 한글학교를 교회에 개설하여 이들을 지원했다. 이 당시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들을 위한 지원이나 관심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후에 이것이 모태가 되어 2005년에 진천군 사회복지협의회를 직접 설립하고 이웃을 위한 나눔 행사에 많은 힘을 쏟았다. 또한, 다문화가족지원센터도 설립하여 외국에서 시집온 결혼이주여성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일 외에 지역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하다 보니, 많은 사람의 입소문에 의해 진천중앙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섬김의 교회로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 스스로 찾아오는 교회가 되었다.

이러다 보니 교계에서는 모범적인 교회로 알려지게 되고,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목회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는 교단 노회에서 노회장, 교단 총회에서 선교후원단체 회장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고, 일신학원 이사장을 비롯한 여러 교육활동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적인 목회 뒤에는 가족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에 불만과 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의 희생은 그 긴 세월 동안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가족들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아버지의 발자취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웃을 수 있게 되었다. 팔순이 넘은 어머니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며 과거의 힘들었던 성직자의 아내로서 시간을 잊은 듯 노년인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얘기한다.

은퇴한 아버지는 지금도 중국 선교에 온 힘을 쏟으면서 노구의 몸을 이끌고 수시로 힘든 여정을 반복하고 있다. 또한, 농촌교회나 미자립 교회의 설움과 어려움을 알기에, 은퇴 무렵 선산에 벧엘원이라는 작은 수련시설을 지어, 이러한 교회를 위해 무료로 장소를 제공하고 평생 목회하면서 얻은 지식도 나누어 주며,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부끄럽지만 필자의 얘기를 하려 한다. 어렸을 적 부모님의 희망과 주변의 기대를 버리고 일찍이 목회자의 길을 포기했다. 아버지의 목회를 보면서 가족을 희생하면서 남을 먼저 돌보는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어렸을 때 겪었던 내 마음의 상처를 나의 아이들과 아내에게 똑같이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신학이 아닌 경제학을 전공한 후 일반기업에 취업하여 서울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은 즐거웠으나, 하면 할수록 나의 곧은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할 때도 있었고, 내 생각을 펼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매일 두통에 시달리고 건강도 좋지 않았다. 결국, 5년의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현재 하고 있는 직업을 찾았고 자유를 얻었다.

학창시절에 공부를 즐기지 않았던 나는 무척 힘든 것이 공부라고 생각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면, 이렇게 힘든 공부는 다시 안 한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평생 배워야 하는 것이 사람이고, 그게 공부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영향인지, 좀 늦은 나이에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학 공부도 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터득한 지식을 가지고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또한, 어머니의 영향인지, 수년 전에 수필가로 등단하여 틈 나름대로 글도 쓰고 기고도 하고 있다. 바람이 있다면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디든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다.

어떤 새도 날개를 펴지 않고는 날 수 없듯이, 사람도 자기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으며 행복해질 수 없다. 내가 나를 묶어놓고 있으면 영영 행복해질 수 없고, 날개가 있어도 창공으로 훨훨 오를 수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팔순이라는 노년이지만, 이 간단한 진리를 품고 평안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지금도 바삐 움직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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