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가? 김용환(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60대의 나에게 있어, 현재 최대의 관심사는 죽음이다. 사람의 삶의 궁극적 의의는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납득을 마련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의도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가?’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물음과 마주하면, ‘그렇다’라고 답변한다. 그리고 남은 인생의 시간을 가능한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볼 만한 곳을 많이 보고, 많이 즐기면서 보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친구 죽음을 목격한 한 지인이 “인생이 한 방에 훅 가버리니,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느니. 화무십일홍이오 달도 차면 기우니라.” 하였다. 이 애기를 듣던 주변의 한 청년은 이런 노래를 즐긴 어른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마도 게으른 사람들의 비열하고 변명 같은 노래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고령자가 늘어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남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많은 사람들은 아름다운 삶 중의 하나는 열심히 사는 삶이고, 열심히 사는 삶 중에 재미있게 노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놀 때는 열심히 놀고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다. 이 생각에는 내일의 행복보다 오늘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감히 새로운 죽음이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죽음은 없다’는 생각이다. 여기에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사상이 내포된다. 이를 영성인문학 관점에서 검토하여 생각해본다. 영성인문학에서는 첫째, 삶의 실재, 합리적 구조 혹은 자연법칙을 중시한다. 노장철학에서는 '도(道)'이다. 둘째, 도덕법칙으로서의 로고스이다. 칸트철학 용어로 말하자면 '실천이성'이고 유가 인성론에서 말하면, 사람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이다. 셋째, 현실적 실재계를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능력으로서의 이론이성이다. 넷째, 사물의 합리적 구조와 정신의 합리적 구조를 연결하고, 매개하고, 새롭게 살리는 언어로서의 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면, '달마'(법,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

삶의 실재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생명흐름의 한 과정이다. 사람을 주관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나’라고 표현한다. ‘나’는 과연 어떤 것을 가리키는 말일까? 먼저 여섯 감각기관을 떠올릴 수 있다. 그 보다 더 근원적인 나를 추구해 들어가면 느낌, 생각, 감정, 의지, 기억하는 주체를 떠올릴 수가 있다.

그런데 감각이나 기억의 ‘나’를 떠올리면, 그 ‘나’는 ‘항상성’을 지녀야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몸과 마음은 시시각각 변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나’로서 상정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육체와 정신현상 배후에 존재하는 본체요 생명의 주인공이라 할 것이다. 또한 내가 지닐 또 다른 성질은 주재성(主宰性)이다. 마음의 주인공이 되어 삶을 이끌어가고 다스릴 수 있는 성질을 지녀야 주재성이 있다 할 것인데, 실제 삶에는 그렇지 못하다. ‘나’라는 감각에는 이러한 항상성이나 주재성이 없다. 감각 쾌락은 무상하기에 항상성이 없고,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주재성도 나타내지 못한다. 현상계의 감각이나 감각 또는 생각으로 이루어진 더미들은 나의 실체가 될 수 없다.

‘나’라는 생각들, 감각들 · 지수화풍 사대 등은 내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다. 자연법칙이나 도의 흐름에 연동되어 나타날 뿐이다. 이것에서 나의 ‘항상성’을 발견하거나 ‘주재성’을 찾을 수 없다. 이들 또한 마음의 주인공으로서 영성의 ‘참나’를 찾기 위한 요건은 되겠지만, 마음의 주인공 자체라고 말할 수 없다. 흔히 나의 주인공은 항상성의 ‘나’이며, 주재하는 것으로서의 ‘나’이기에, 그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지의 의문이 남아 있다.

둘째, 도덕법칙으로서의 로고스이다. 도는 그에 상응한 덕의 구현으로서 인간답게 만든다. 도덕법칙으로서 로고스는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인생여정에서 ‘참 나’를 되돌아보고 찾도록 인도한다. 일찍이 녹야원에서 초전법륜을 마친 붓다는 우루벨라로 향해 가시는 도중에 나무 그늘에서 잠시 선정에 드신 일이 있었다. 그 때 마침 그 부근에 행락을 나왔던 사람들이 귀중품을 챙겨 달아난 한 유녀(遊女)의 행방을 묻자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젊은이들이여,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는 일과 도망친 유녀를 찾는 일 중에서 어떤 것을 더 시급하게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죽음의 허무에서 벗어나고자 쾌락에 탐닉하던 모습을 돌아보며 ‘참나’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유녀를 쫓아 쾌락을 따라가는 것보다 중시함이다.

서양 칸트의 실천이성은 도덕적 실천의지를 규정하는 이성이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사변이성과 실천이성을 대비적으로 비교하였다. 사변이성과 실천이성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성이라기보다 하나의 이성이 서로 다른 관심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말했다. 하나의 이성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관심의 차이 때문이다. 이성의 사변사용 관심은 선험원리까지에 이르는 객관인식에서 나타나고, 그것의 실천사용 관심은 궁극적 인생목적과 관련하여 의지를 나름대로 규정하는 데 의존한다. 그렇다면 죽음으로 끝난다면, 인생의 궁극목적 성취는 처음부터 요원한 과제가 될 것이고 실천이성의 존립가치에도 어긋날 것이다.

또한 유가 인성론에서 말하는 ‘본연지성’은 '사람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심성'이다. 지극히 착하고 사리사욕이 없는 천부자연의 심성이다. 이를 천명지성(天命之性)이라 한다. 유가 인성론에서 사람의 성(性)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뉜다. 주자에 따르면, 본연지성은 천부심성으로 지선(至善)이다. 기질지성은 타고난 기질과 성품을 가리킨다.

기질의 청탁(淸濁)과 편벽되고 막히는 편색(偏塞)에 따라 선하게도 나타나고 악하게도 나타난다. 본연지성은 이(理)에 해당되고, 기질지성은 기(氣)에 해당된다고 한다. 기질지성은 노력과 수양에 따라 탁한 것(濁)을 맑은 것(淸)으로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유가 인성론에서는 기질을 정화시켜 지선의 본연지성을 회복하여 발현할 수 있게 하고자 교육을 강조하였다. 유가 이상의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차이는 성인은 기질이 맑아서 본연지성이 잘 발현되는 반면에 범인은 기질이 탁하여 본연지성이 잘 발현되지 않는 데 있다. 이러한 논리에 비추어 보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단절되고 사라진다면, 이러한 논의자체가 애당초부터 잘못된 문제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 현실적 실재계를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능력으로서 이론이성이다. 이론이성에 따르면, 죽음은 곧 죽음이 아니며 단지 그 이름만을 가지고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즉비(卽非)의 논리라고 한다. 여기서는 먼저 긍정을 하고, 다음 부정을 한 뒤 또 다시 긍정하는 구조로 나타난다. ‘나’라는 존재는 외부 요인이 모여 ‘나’를 구성한다. ‘나’를 구성하는 개체들은 고정됨이 없이 끊임없이 생멸하고 변화한다. 각각은 개별적으로 실체가 없다. 실체 없이 각각이 모인 것이 ‘나’이므로 실체를 지닌 ‘나’라고 말할 수가 없다. 취합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나’라고 이름을 붙일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달이라고 집착하는데, 언어 문자에 집착하는 자는 ‘참나’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한다. 흔히 언어와 문자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한다. ‘장자’에서는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는다.’는 뜻에서 ‘득어망전’, ‘금강경’에서는 대기설법을 뗏목에 비유하였다. 당나라 임제종 황룡파의 청원유신(靑原惟信)은 법상에 올라가 “이 늙은이가 삼십년 전, 참선을 하지 않았을 때는 ‘산을 보면 산이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그 후 선지식을 친견하고 선의 이치를 깨닫고 보니,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다. 마침내 철저히 깨닫고 다시 보니, 산을 보면 산은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 물이었더라고 전하였다.

이 선사가 이전 보았던 산과 물은 육안 번뇌로 본 것이며, 깨달은 뒤에 본 것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혜안으로 본 것이다. 이를 ‘즉비’라고 한다. 청원유신이 처음 보았던 산과 물은 번뇌에서 목격한 것이다. 그 다음은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외부에서 진리를 찾았으므로 산과 물에 대한 부정 견해를 나타냈다. 세월이 가면서 심안을 체득함으로 마침내 여리실견의 정견을 나타냈다고 할 것이다. 이론이성에 의하면, 죽음이라는 허무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삶의 쾌락에도 매달리지도 않기에 중도의 이치에 접근하게 된다고 할 것이다.

넷째, 사물의 합리적 구조와 정신의 합리적 구조를 연결하고, 매개하고, 새롭게 살리는 언어로서의 말씀의 관점이다. 1세기 지중해 문명권을 풍미하던 스토아사상이 '로고스‘ 개념을 기독변증 목적으로 차용하였다. 스토아사상에서 말하는 로고스 개념과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로고스 개념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로고스는 단순히 중성적 이법(理法), 원리(原理), 질료(質料)에 머물지 않고, 활동적이고 능산적인데 그 자체 안에 '생명'과 '밝음의 빛'이 함께 있다는 주장을 낳았다. 이는 곧 생명과 빛이 되어 요한복음의 키워드로서 자리 잡았다.

이제는 로고스가 만유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만유 안에 합리성, 당위성, 자기초월성, 하느님의 종자, 영성으로 존재한다고 믿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의 전통에서도 이러한 영성의 로고스가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일찍이 신라 원효는 '성자신해'(性自神解), 고려 지눌은 '공적영지'(空寂靈智), 조선 권근은 '허령불매'(虛靈不昧), 한국의 함석헌은 '환희 뚫려 비취는 깨달음'의 표현들을 사용하였으니, 로고스가 영성으로 사용된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은 비록 현실세계의 어두움, 어리석음, 불의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어둠속에 하나의 촛불만 켜두고 있더라도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듯, 악이 진리와 선을 이기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예수는 세상의 권력주체와 현실구조, 악 앞에서는 미미하고 패배한 것처럼 비치지만, 그 분 안에 나타난 '생명과 진리의 빛'을 세상이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예수에 나타난 그리스도 생명과 연합한자를 세상이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비전을 낳았다. 결국 어둠은 이 세상을 나타내는 상징어이며,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의 로고스 빛이 죽음이라는 어둠을 뚫고 다시 작용할 것이라는 부활의 신앙을 배태하였다.

성경에는 여러 명의 ‘마리아’가 등장하는데, 두 사람이 특이하다. 하나는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이다. 교황청은 2016년,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 중의 사도’로 공식 인정하였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강제로 정한 결혼을 결단을 통해 거부하게 되자 가족들은 마리아에게 ‘네 속에 불길한 것이 들어 있다’며 물에 빠뜨리면서, 일종의 귀신 쫓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이에 막달라 마리아는 가족들에게 마음 문을 닫고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이후 예수를 만나 마리아가 진심으로 위로를 받으면서 그에 이끌린 마리아는 집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와 제자들의 여정에 합류하게 되었다.

예수는 유다의 배신으로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붙잡혀 온갖 고초 끝에 십자가에 못 박혀 목숨을 잃는다. 이 과정은 마리아 시선에 고스란히 담겼다. 예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마리아는 무덤을 지켰고,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의 첫 목격자가 되었다. 신약성서에는 마리아에 대한 묘사가 미미하기에 외경, 마리아복음서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묘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예수죽음으로 꿈꾸던 이상이 무너졌다고 여긴 유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베드로와 마리아는 예수부활을 믿고 복음전파에 나섰다. 베드로가 예수부활을 극적장치로 활용하여 복음으로 전파하려 하였다면, 마리아는 순수하게 죽음 너머의 인식지평을 열어 갔던 것이다. 아무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교훈을 이 세상에 남긴 것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서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했다'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의 기초를 이룬다. 예수 인격의 생명체 안에 나타난 진리, 생명, 빛을 증언하기 위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음을 말한다. 불행하게도 초대교회 교부들은 기독론을 정립할 때, 영혼이 육체 안에 거주한다는 영육이원론의 헬라철학 사유체계에 갇혀서 다양한 기독론 논쟁을 전개하였다.

로고스는 특정 시공에 갇히거나 제한될 수 있는 물질적 실재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를 신격화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예수 자신이 가장 철저하게 경계하였다. 예수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생명체가 그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친근한 하나님과 '뜻의 일치, 의지의 일치'에서 ‘하나’이지 헬라철학의 의미에서 '존재론적 본질의 일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요한복음서는 '은혜와 진리'가 추상적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예수의 삶, 생명, 활동에서 실재로서 충만했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이 로고스에 죽음은 존재하지 아니한다고 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불교용어의 '달마'에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본다. 불교의 달마는 흔히 삼법인(三法印)을 말한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부단히 변화하여 항상 함이 없으므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상의상관(相依相關)의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생주이멸(生住異滅)과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반복한다. 그 어떤 존재도 상주불변하는 실체가 없기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말한다. 세존은 이 현상계가 아닌 본체계에서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불성(佛性)이 존재하고 있음을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 주장하였다. 그리고 열반에 이르러 이루어진 최후 설법을 통하여, 자신과 법에 의지하라는 의미의 ‘자등명(自燈明)·법등명(法燈明)’이라고 하여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참나’를 증득하도록 주문하였다. 죽으면 그만 이라면 이러한 주문은 무의미한 명제일 것이다.

불교의 달마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는 ‘개체생명으로서 나(我)라는 생각이 실제로는 없음’을 의미한다. 우주생명의 달마에서 말하면, 청정한 우주의 근원적 생명 에너지, 공성(空性)과 계합하여 맑은 거울처럼 깨끗한 마음, 청정심(淸淨心)으로 증득함으로써 금강과 같은 반야의 지혜를 성취하도록 주문하며, 중생을 화육하고 끊임없이 돕는 바라밀 실천은 죽음저편으로 넘어갈 수 있는 자비로운 삶의 원리가 된다.

삶과 죽음이 나뉘지 않고, 존재도 비존재도 나뉘지 않는 공(空)에서 무분별의 청정심(淸淨心)을 구현한다. 언어가 속제이고 방편이라면, 붓다의 달마 역시 속제이고 방편이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그런데 그 비유는 반야바라밀의 실천으로 생명파도와 바다는 하나라는 이치를 일깨워준다. 파도가 사라졌다고 누가 바다가 없어졌다고 할 것인가? 개체생명의 사라짐을 이름을 붙여 ‘죽음’이라고 말하지만 방편의 시설에 불과할 뿐이다. 생명파도와 생명바다는 한 몸을 이룬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기에 일상에서 청정심의 영성에 깨어 있음을 실천적으로 주문하고 있다.

죽음은 생명의 욕망파도가 낳은 물결이다. 이제까지 보았듯이, 죽음이 모든 것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아니한다. 삶 너머 죽음이 있고 죽음 너머의 또 다른 삶이 있다. 달마 관점에서 바라보면, 생멸의 유위법은 꿈과 환상 같고 물거품과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번개와 같다.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원인은 ‘나’라는 관념에 사로잡힘이다. 거짓 나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로고스가 함께하는 ‘참나’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영성회복이 죽음의 파도너머 생명의 큰 바다에 복귀하는 새 길이다. 이 새 길은 이미 도와 말씀, 그리고 달마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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