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호(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부교수)

이영호(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부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노년은 때로 고독과 상실의 시간으로 인식되곤 한다.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젊음이 주었던 많은 것들이 자연스레 소멸돼 간다. 그리고 남아있는 시간을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면 노년의 풍경은 자못 을씨년스럽다. 외로움과 소멸, 그리고 남아 있는 시간이 주는 쓸쓸한 풍경 때문이다. 인류의 철인(哲人)이라 칭송받는 공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년에 여러 나라를 떠돌던 공자는 어느 날 저녁 제자들과 시냇가에 앉아서 흐르는 시냇물을 보고서는 이렇게 탄식을 했다.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멈추지 않는구나.”(논어 ‘자한’. “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인저 不舍晝夜로다”) 이 경문에 대해, 위진남북조 시대 경학가 하안(何晏)은 “공자가 시냇가에 있다가 시냇물이 빨리 흘러가며 잠시도 멈추지 않음을 보고는, 인생의 흘러감도 또한 이와 같아 어제의 내가 오늘 날의 내가 아님을 탄식한 것이다.”(논어집해 ‘자한’)라고 해설을 붙였다. 어제의 검은 머리 나는 오늘 문득 흰머리의 노년으로 접어든다. 공자 같은 현자도 이 느닷없이 닥친 늙음에 망연자실이다.

생로병사는 고래로 현자들의 숙고의 주제였다. 이 중 ‘늙음’은 병마, 죽음의 문턱 바로 앞에 놓인 것이기에 성범(聖凡)을 막론하고 회한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앞서 보았듯이 공자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인류의 스승들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속세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다양하고도 정성스레 우리들에게 제시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어록집인 ‘논어’에는 늙음에 대처하는 공자의 곡진한 마음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늙음에 대한 탄식은 공자도 비켜가지 못했지만, ‘논어’ 전편을 보면 이것이 공자의 주된 심리상태는 아니다. 오히려 공자의 노년풍경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어 주는 말은 ‘기쁨’, ‘즐거움’이라고 할 것이다.

‘논어’를 펼치면 첫 장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배우고 수시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는가! 친구가 멀리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는가!”(논어 ‘학이’.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기쁘고 즐거운 인생! 이것이 공자의 어록집인 ‘논어’의 첫 구절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공자는 유복자였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회상을 보면, 가난하여 비천한 일도 했다. 아버지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빈한한 가정, 거기다 당대의 사회적 상황은 혼돈의 시기, 이런 정황을 보면 공자의 삶은 기쁨과 즐거움에서 한참 멀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그 반대에 있는 고단함, 외로움, 슬픔이 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삶은 보통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행복이 함께 했다. 이것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논어’에는 공자의 삶의 완숙함이 그의 노년과 더불어 담담하게 제시되고 있으며, 이런 삶을 체득하는 방법도 정성스러운 언어로 전하고 있다.

어린 시절 15살의 공자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이 학문은 공자의 삶을 온통 사로잡았으며 그가 일생을 마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학문의 과정에서 앞서 말한 ‘기쁨’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기쁨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함께 ‘즐거움’의 공동체를 이루어 풍족한 노년을 구가했다.

공자의 ‘학문’은 지식의 축적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학문에 뜻을 둔지 15년 만인 30세에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을 세웠다. 이른바 ‘이립(而立)’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이후 또 10년 동안 학문을 지속하여, 40세에는 세상의 어떤 일에도 미혹되지 않는 ‘불혹(不惑)’의 경지에 이르렀다. 공자의 학문역정은 70세까지 계속되었는데 50세에는 천명을 아는 경지(知天命), 60세에는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초연한 ‘이순(耳順)’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드디어 70세에 이르러서는 마음의 절대적 평화라고 할 수 있는 ‘종심(從心)’에 도달했다.(논어 ‘위정’.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하고 三十而立하고 四十而不惑하고 五十而知天命하고 六十而耳順하고 七十而從心所欲호되 不踰矩호라”) 이렇게 보면, 공자의 학문은 내면적 성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그 종착역은 우주의 비밀을 아는 것을 넘어서서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공자의 노년이 그려내는 최종적 색채는 마음의 평화였고, 이 평화가 밖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그의 기쁨과 즐거움을 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자가 도달한 마음의 평화는 오롯이 그 혼자만 향유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성인들이 그러하듯이, 공자 또한 남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마음의 평화를 구축한 것이다.

논어를 보면, 공자의 남과의 어울림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기’, ‘수시로 자신에 대하여 반성하기’,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하여 지나치게 공격하지 않기’, ‘즐겁고 슬픈 감정을 적절하게 가질 것’, ‘가급적 아프지 않기’, ‘말보다 행동 먼저’, ‘모르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기’, ‘친구에게 입바른 소리 하지 않기’, ‘오래 사귄 친구일수록 존중하기’, ‘두 번 정도만 생각하고 행동하기(세 번은 지나침)’, ‘없는 것은 없다하고,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하기’,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기’, ‘가난해도 남 탓하지 않기’,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지속할 것’ 등등이 그것이다.

한편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지녀야 하는 이러한 실천 강령은 오롯이 개인의 수양 위에서 가능하다. 공자는 노년에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으로 ‘탐욕(혹은 집착)’을 들었다.(‘논어’ ‘계씨’. “孔子曰 君子有三戒하니 及其老也하여는 血氣旣衰라 戒之在得이니라”) 혈기가 쇠퇴하는 노년에는 무언가를 잡으려는 본능이 강해진다. 그러므로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에 집착하는 ‘탐욕’이 강렬하게 일어난다. 이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공자의 생 전반을 관통하는 이념인 ‘인(仁)’이 이것을 가능케 한다. 번지라는 제자가 ‘인(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는 그것은 바로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논어 ‘안연’. “樊遲問仁한대 子曰 愛人이니라”) 탐심 혹은 집착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 집중했을 때 나오는 것이라면, 인은 그 정반대의 지점인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 같지만 주변의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데서 탐심이나 집착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이렇게 탐심에서 멀어지게 되면 특별히 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절로 마음의 평화가 오게 된다. 탐심에 의한 집착의 제거가 바로 평화이다. 마음의 평화는 흡사 구름에 가려진 태양과 비슷하다. 탐심이라는 구름이 흘러가면, 태양은 그 본래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이순’을 거쳐 ‘종심’에 이르게 되면, 내면의 평화를 상징하는 태양이 환하게 빛을 발휘하게 된다.

한편 이런 삶을 살아 내면에 구축되는 상태를 공자는 ‘덕’이라 불렀으며, 이렇게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게 살지 않고 반드시 함께 하는 이웃이 있다고 했다.(논어 ‘이인’. “子曰 德不孤라 必有鄰이니라.”) 안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고 밖으로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공자가 그려내는 노년 풍경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풍경은 일반적으로 노년이 상기시켜주는 외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 공자는 훗날 제자에게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됨이 분발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즐거움으로 근심도 잊어서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알지 못한다.”(논어 ‘술이’. “其爲人也 發憤忘食하고 樂以忘憂하여 不知老之將至云爾오”) 즐거움이란 별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음이 평안하고 함께 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은 공자에게서 늙음이 주는 불안감과 쓸쓸함을 떨쳐버리게 했다. 보통 사람이 예외 없이 맞이하는 쓸쓸한 노년의 풍경은 공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인’에 의거하여 탐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이를 바탕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요청되는 실천적 덕목들을 행했기 때문이다.

한편 공자 노년 풍경의 성취에는 이러한 실천적이고 이성적인 노력에 더하여 몸의 돌봄과 감성도 한 몫을 했다. 섭생을 통한 건강의 증진과 감성의 확장이다. 병든 몸과 고목 같은 감성으로는 풍부한 노년을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먼저 공자의 섭생을 통한 건강의 증진은 식생활에서 몸가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논어’에 제시되어 있다. 공자의 식생활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까다롭다고 할 수 있다. 그 대체만 보면 다음과 같다.

“밥은 도정을 잘한 것을 드셨으며, 회는 가늘게 썬 것을 드셨다. 밥이 상하여 쉰 것과 생선이 상하고 고기가 부패한 것을 먹지 않으셨으며, 빛깔이 나쁜 것을 먹지 않으시고 냄새가 나쁜 것을 먹지 않으셨으며, 요리를 잘못했거든 먹지 않으시고 제철 음식이 아닌 것을 먹지 않으셨다. 자른 것이 바르지 않으면 먹지 않으시고, 장이 적절해야 드셨다.”(논어 ‘향당’)

공자시대에는 먹는 것이 풍족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상하거나 색깔과 냄새가 나쁘거나 자른 면이 바르지 않은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았다. 매우 까다로운 음식관이다. 그러나 공자의 이러한 음식관은 실상 음식을 통한 건강의 유지, 즉 섭생과 연관이 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공자는 “고기가 비록 많으나 밥 기운을 이기게 하지 않으시며, 오직 술은 일정한 양이 없으셨으나 주사를 부림에 이르지 않게 하셨다. 시장에서 산 술과 포를 먹지 않으시며 생강을 먹는 것을 그만 두지 않으시며, 많이 먹지 않으셨다.”라고 했다. 공자의 섭생관은 고기보다는 밥, 술은 몸이 받는다면 즐기는 정도까지, 불결한 음식은 사양, 생강 장복, 소식(小食) 등이 뼈대를 이루고 있다. 소식과 밥, 그리고 집에서 만든 깨끗한 음식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술과 생강은 왜 그렇게 한량없이 마시거나 장복했을까? 이에 관한 공자의 설명이 없기에 우리는 이렇게 추론해 볼 수 있다.

공자의 앞뒤로 술을 경계하거나 찬양하는 주장들은 무성하다. 유가에서는 대체로 경계하는 편이다. 그런데 정작 유가의 비조인 공자는 술에 대하여 어떤 음식보다도 관대했다. 어쩌면 공자의 즐거운 인생에 술은 필수불가결한 음식이 아니었을까? 건강을 해치지 않고 주사를 부리지 않는 범위에서라면, 한량없이 마셔도 되는 유일한 음식이 술이 아니었을까? 실상 공자의 삶 전반을 살펴보면, 의외로 감성이 풍부한 지점이 넘쳐 남을 볼 수 있다. 농담도 하고, 울고 웃기도 하며, 노래도 즐겨했다. 함께 노래 부르다가 상대가 잘 하면 앙코르를 요청하기도 하고 앙코르 곡이 끝나면 자신도 한 곡조 답가를 부르기도 했다.(논어 ‘술이’. “子與人歌而善이어든 必使反之하시고 而後和之러시다”) 이런 삶에 술이 더해져서 흥(興)이 더욱 넘쳐났으리라고 생각해본다. 한편 생강은 한의학에 의하면, 항암, 해독, 그리고 기혈소통의 효과가 있다. 노년이 되었을 때 닥쳐오는 암, 염증, 마비 등의 증세에 대한 생강의 특효를 공자는 알았던 모양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보면, 공자는 마음의 평화, 몸의 건강, 술, 노래와 함께 하는 즐거운 감성의 발산 등등 현대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노년을 구가했다. 더하여 자신을 부모처럼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과 노년을 함께 하는 친구가 있었다. 공자의 노년지기(知己) 중에 원양(原壤)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하루는 공자가 원양을 찾아 갔다. 원양이 무람없이 공자를 맞이하자, 공자는 원양을 보고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를 한다. “어려서 버릇없더니, 나이 들어서는 칭찬할 구석이 없고, 늙어서는 죽지도 않는 도둑놈!” 이런 격의 없는 농담을 하면서, 지팡이로 정강이를 툭툭 쳤다.(논어 ‘헌문’. “原壤이 夷俟러니 子曰 幼而不孫弟하며 長而無述焉이요 老而不死가 是爲賊이라하시고 以杖叩其脛하시다”) 오래 사귄 친구일수록 존중하는 공자였건만, 노년의 격의 없는 지기는 이렇게 서로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함께 늙어갔다. 공자의 노년은 인류의 사표로서 모자람 없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들에게는 이런 친구와 함께 늙어가는 공자가 더욱 친근해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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