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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 한·일 국제학술회의 발제 - 한국인의 생사관 Ⅱ
동양포럼 / 한·일 국제학술회의 발제 - 한국인의 생사관 Ⅱ
  • 박장미
  • 승인 2018.08.05 2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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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시인, 문학평론가)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한국인의 생사관을 살펴보기에 앞서 내가 경험한 가족의 죽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3년 전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죽음을 생각할 때 인간 내면의 이중적 감정이다. 즉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 절망과 무기력에 빠지지만, 반대로 이것을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도전이라고 받아들이면 죽음에 대한 공포나 불안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83세의 어머님은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지 1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고관절이 골절되어 수술했는데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었는데, 갑작스런 의사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가면서 온갖 생각이 다 뇌리를 스쳤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이성으로는 자제할 수 없는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가쁜 쉼을 몰아쉬시는 어머니의 고통이 그대로 전이되는 듯 몹시 괴로웠다. 그리고 심폐소생술에 대한 결정을 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죽음은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을 무차별하게 요구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에 처해지기도 한다. 결국 동의서에 사인하고 죽음을 앞둔 어머니 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진작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어머니와의 대화가 달랐을 텐데’ 그러기를 20여분, 갑자기 초점 없던 어머니의 눈에서 알 수 없는 빛이 감돌았고 순간 나와 마주쳤다. 한 치 망설임 없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자식과 손녀들 걱정 마시고 이제 편히 가세요.”라고 감히 말씀드렸다. 그런데 눈도 깜박하지 않으시던 어머니의 두 눈이 깜박거렸고 이내 한 줄기 눈물이 흐르더니 곧 운명하셨다.

잠깐이었지만 난 어머니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고, 고통에 힘들어 하시면서도 남아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두 눈 속에 맺혀있음을 느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거나 죽음을 예상치 못했을 경우 감정의 대처를 적절히 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때 든 생각은 ‘죽음과 삶이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구나.’였다. 내가 경험한 죽음은 정상적인 죽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비정상적인 죽음 즉 갑작스런 죽음이나 안타까운 죽음이라면 우리가 견뎌야 할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타인의 죽음을 통해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할 줄 아는 감성을 배운다면 인간으로 성숙시키는 공감이 가능해지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

현대 한국인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태도에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자기의 삶의 원리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내밀한 공포가 숨어있다. 이 공포는 우리의 현재 생활방식,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전통적인 죽음은 단순한 두려움과 회피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리 준비하고 이해 할 대상이었다. 묏자리나 수의를 미리 준비하거나 제사가 그 예이다. 자식들은 이러한 준비를 해드리는 것을 효도로 여긴다.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삶의 시작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고대 한국인들은 죽음이후의 삶을 기대하여 물질적이거나 관념적인 여러 장치들을 고안해냈고, 이런 생각을 실천하면서 위안을 받았다.

죽음에 관한 용어의 표현을 보면 ‘숨을 거두다, 돌아가시다, 운명하다, 고인이 되다, 타계하다, 별세하다, 영면하다 등등이다. 이렇듯 한국인의 생사관은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유교적, 불교적, 무교적인 것 어느 하나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사회의 전통적 죽음이해는 크게 유교 상장례와 관련 민속관행, 불교의 윤회사상, 무속신앙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유교적 이해에는 상장례 문화에서 나타난다. 한 가족 성원의 결손으로 인한 공동체의 위기를 최소화하고 극복하기 위해 의례에 집중한다. 일차적으로 죽음을 확인하고 죽은 사람을 산 사람들의 세계에서 분리시켜 처리하는 과정(임종에서 고복, 사자상, 염습, 입관)으로 이해된다. 이차적으로 죽은 자는 조상으로 자리 잡고 살아 있는 후손들과 교류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악상이 아닌 호상의 경우, 한국의 상갓집은 축제 자리였다. 가족과 친지, 마을사람들이 같이 모여 음식과 술을 즐겼고, 춤과 노래, 놀이가 어우러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밝고 화려한 꽃상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죽음문화의 기저에는 죽음이 존재의 소멸이나 무화가 아닌 새로운 존재의 시작이라는 죽음이해가 놓여 있다. 대표적으로 ‘상여놀이’, ‘진도 다시래기’ 가 있다. 이처럼 한국 전통사회에서 망자는 자신이 기거하던 방에서 숨을 거두고, 집과 마을에서 진행되는 상장례를 거쳐 조상이 된 후 다시 가족들과 통합된다. 조상제사는 조상을 통해 삶을 이어받고 자손을 통해 삶을 이어가는 관념적 구도로 설정되어 있다. 이렇듯 삶의 자리에서 죽음을 처리하는 전통 상장례는 자연스럽게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도록 하였다.



죽음, 또 다른 삶의 시작

불교적 이해는 윤회사상으로 해석한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인간으로선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보았다. 죽음이라는 실상을 초연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진실을 체득함으로써 현실적 죽음의 문제가 극복된다는 것이다. 윤회한다는 것은 결국 괴로움이므로 영원히 윤회를 벗어나는 열반이나 극락의 왕생 등을 보다 중요시했던 것이다. 즉 삶에도 번민하지 않고 죽음에도 번민하지 않는, 생명에 대한 추구였다. 삶과 죽음을 초월해 업과 윤회를 벗어난 경지로서 번뇌를 꺼 버린다는 열반의 경지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다.

생사 길은/ 여기 있음에 두려워하여/ 나는 간다 말도/ 못 다 이르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같이/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는구나./ 아으, 미타찰(彌陀刹)에 만날 나/ 도 닦아 기다리련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제망매가’는 인간의 죽음을 노래한 향가로 신라인의 생사관을 엿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불교적 믿음을 통한 재회의 다짐하며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빌면서 극락세계에서 왕생하기를 염원한다. 그 사상적 배경에는 불교의 윤회사상이 있다. 작가 월명은 이 노래를 젊은 나이로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바치며, 인간이 살고 있는 자리를 생사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 두려움 속에서 생사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며, 죽음이 오면 그 길로 가야하는 것이다. 월명사는 생의 한 조건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또 나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누이동생의 죽음이 문제가 된다. 이 관계를 끊어 놓은 것으로서의 죽음, 이별로서의 그 죽음이 문제인 것이다. 그 죽음의 극복은 또 다른 만남에 있다. 죽음은 이렇게 현세의 단절이 아니라 도리어 현세와의 또 다른 맺음(변화)의 형태로 파악되는 것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대화

한국의 무속신앙은 기본적으로 생사회복, 그 가운데 죽음을 다루는 데 특화된 원시종교이다. 이론화되지 않지만 직접적인 삶의 경험과 삶의 욕망을 수긍한다.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은 저승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잘 보냄으로써 산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원혼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초점이 있다. 그래서 이승에 대한 집착이 더욱 뚜렷하다. “사후 술 석 잔 말고 생전에 한 잔 술이 달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라는 말은 모두 현세적인 가치관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묏자리를 손보거나, 조상을 저승으로 천도하는 진오기굿, 씻김꿋, 오구굿 등 죽음관련 무속의례를 보면 죽은 사람이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산 사람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무속문화는 한국 대중문화 속에 이전보다 침투해 들어와 있다 웹툰·드라마·영화 등 콘텐츠형태를 가리지 않고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는 중이다. 그 대표작 영화 <신과 함께>는 무속신앙과 불교가 합작해 낸 사후세계, 저승을 주제로 한국인의 죽음관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49일간 거치게 되는 일곱 지옥의 명칭과 죄목(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천륜)은 무속신앙에 유입된 불교의 지옥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 한국 대중문화의 전반적 추세가 점차 무속신앙에 친화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살아 있게’ 하지 말고 ‘살아가게’

현대인들은 삶에서 죽음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듯 보인다. 현대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서일 수 있다. 즉 죽음을 대하는 태도인데,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는 ‘공포의 이동’이다. 이제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자신을 동일시하기보다는 나이 많은 사람이 생명의 쇠퇴를 겪고 있는 모습에 자기를 투사한다. 죽음의 공포는 저세상의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 이 세상에서의 고독사, 그리고 노쇠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동했다. 젊음에 대한 갈망, 노후생활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오늘날 ‘죽음의 고뇌’를 채우는 실질적 내용들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신체와 정신이 쇠퇴하지 않기를 소망하는 것으로 사고방식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또한 각종 위험에 대한 넘쳐나는 경고도 죽음에 대한 인식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당혹감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좀처럼 쉽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사회의 보호체계를 강화하는 각종 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하지만 그 자리를 의료과학이 완전히 대체하고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그래도 죽음을 앞둔 사람과 중요한 어떤 것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현대사회에서 죽음의 장소가 병원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볼 때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인간에게는 단지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숲에 가면 삶과 죽음의 공존을 목격하고 체험하게 된다. 죽어서 썩어가는 나무와 풀들과 동물들이 없는 숲은 살아있는 숲이 아니고 진정한 숲이 아니다. 죽음과 함께하지 않는 숲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화분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화분을 아무리 많이 모아 놓아도 그것을 숲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숲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을 말해주며 그 둘 중의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것도 사라진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웰다잉은 웰리빙, 웰에이징으로부터

현재 한국사회는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 당연히 가져야 할 품위가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 장례문화는 죽음의 의식이 부존재 한다. 시체를 처리하는 절차적인 기호에 불과한 것 같다. 그곳은 아주 공리적이고 실용적인 이익의 장으로 변했고, 죽은 자를 보내는 어떠한 신성한 의식도 경건함도 없어 보인다.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보다는 죽음을 관리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죽음이 제기하는 질문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단지 숨을 쉬게 하고 심장박동을 뛰게 하는 것만으로 죽음이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것이 제기하는 윤리적인 문제는 무엇인지, 죽음을 정의하는 기준이 복잡한 성격을 띠게 된 현실에서 우리에게는 마땅한 대응책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마련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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