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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 노년철학 2회 국제회의 한·일의 노인상 대비: 새로운 노인상을 찾는다-노년기 주자의 삶과 사상
동양포럼 / 노년철학 2회 국제회의 한·일의 노인상 대비: 새로운 노인상을 찾는다-노년기 주자의 삶과 사상
  • 박장미
  • 승인 2018.09.10 1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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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경(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임연구원)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사람은 일정한 시기에 이르게 되면 누구나 예외 없이 노년을 맞이한다. 주자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년을 담담히 수용하면서도 노년기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엄습해 오는 삼고(三苦, 나이듦, 병듦, 죽음)에 대한 갈등과 긴장에 대처하는 자세를 보인다. 본문의 주제가 노년기에 대한 것인 만큼, 대체로 60대 이후 주자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본문을 전개하기 전에, 중국의 현대 학자인 뚜웨이밍(杜维明, 1940~)의 글을 소개한다. “노인에 대한 존경은 노인이 자기 개선이라는 길고 피할 수 없는 여행에서 인생을 활기차게 꾸미려고 앞장섰을 것이라는 전제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늙어가는 것은 지혜의 표시이자 경험과 인내의 원천이다. 그러나 연장자가 자동적으로 절대적 가치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뚜웨이밍의 유학 강의’) 이 말은 노인에 대한 존경과 공경은 단순히 나이 많은 연장자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노년의 인격적 성숙함이나 어른다움과 같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댓값을 만족시켰을 때라야 비로소 대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노인은 단순히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노인다운 또는 어른다운 덕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노년의 존엄성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년 주체가 어른다움의 덕을 갖추어야 얻어지는 것이다.

●정치적 시련-‘위학(僞學)의 금’

60세 이전까지 주자는 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에 힘쓰는 등 평온한 생활을 전개한다. 그러나 60세에 접어들면서 주자의 신변은 갑자기 어수선해진다. 주자는 60대에 늙은 몸을 이끌고 두 차례의 지방관에 부임한다. 한번은 1190년 4월 24일부터 다음해 3월까지(61-62세)에 장주지사(漳州知事)이며, 다른 한번은 65세 때인 1194년 5월 5일부터 8월 중순에 이르는 3개월간의 담주지사(潭州知事)이다. 또한 65세에는 당시 재상 조여우(趙汝愚)의 추천에 의해 시강(侍講, 임금에게 강의하는 관직)에 제수되는데(10월), 이 또한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주자가 당시 권신인 한탁주(韓侂冑)를 멀리하도록 임금에게 진언한 것이 한탁주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그의 책동으로 겨우 45일 만에 내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주자의 조정에서의 추방은 그의 생애 최대의 수난이라고 할 수 있는 ‘위학의 금’의 개막이었다. 한탁주의 무리들(탁주파)은 주자의 학문(도학파)을 ‘위학(거짓 학문)’이라 하여 주자와 그의 제자들을 무고 중상하였는데, 이것을 경원당화(慶元黨禍)라고 한다. 그리하여 68세에는 주자의 학문이 ‘위학’으로 공인되어 금지된다. 이때 친구이며 그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채원정(蔡元定)이 귀양 가서 죽는 등 제자와 친구들이 막대한 핍박을 받는다.

주자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탄압이 격화함에 따라 문생들이 주문(朱門)을 떠나간 것이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차례차례 주자의 곁을 떠나갔으며, 이에 주자학단이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늙은 주자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제자 반시거(潘時擧)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때의 심정이 잘 나타나있다. “저 성현들조차 이런 재앙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재난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정사에는 봄 동안에 몇 사람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만, 요즈음에는 살며시 빠져나가 한두 명이 남아 있을 뿐 기대할 만큼 공부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또한 제자 정가학(鄭可學)에게 쓴 편지에서도 “지금은 방도 오랫동안 텅 비어 있습니다. 시절이 이렇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도 돌아오기를 원치 않습니다”라고 하여 주자학단이 텅비어가는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이렇듯 주자가 가장 고통스럽고 두려웠던 것은 자신의 불행보다 제자들과 함께 쌓아올린 학문이 단절되어 가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질병과의 싸움

만년의 주자를 괴롭힌 것은 ‘위학의 금’만이 아니었다. 외부의 적과 더불어 내부의 적, 즉 질병과의 싸움도 강요되었다. 주자를 괴롭힌 병은 족질(足疾)․각기(脚氣)․눈병․기비(氣痞)․내장질환 등이다. 다리의 질환인 족질은 매우 일찍부터(40대 후반) 시작되었고, 심할 때에는 땅을 밟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정(程) 아무개라는 도사에게 침을 맞고 쾌유한 적이 있어 주자가 그 보답으로 선사한 시가 지금도 남아있다. “십년간 부행(扶行)하며 짧은 지팡이를 의지하였는데, 일침을 맞고 나서 크게 효험이 있었네. 문을 나서 걸어가니 사람들이 다투어 쳐다보네. 이는 전에 절며 다니던 그 늙은이가 아니라네.” 또한 오늘날 류머티즘의 일종인 각기도 그의 고질병 중의 하나였는데, 여동래(呂東萊)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역시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친구인 장남헌(張南軒)에게 보낸 편지에는 눈이 침침해져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물론 노안은 나이든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도 있을 수 있는 그리 대단치 않은 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60대에 이르러 두 눈을 완전히 실명한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왼쪽 눈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자, 남은 오른쪽 눈마저 위험해지지 않을까 불안에 떨게 된다. “병은 점점 더 깊어가고,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데다가 오른쪽 눈조차도 침침하여 이 며칠 동안은 거의 사물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만, 병세가 이렇게 악화되고 있으니 앞으로 장차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눈병은 주자를 깊은 내면의 세계로 침잠케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만년의 주자는 병중한좌(病中閑坐)라는 말을 즐겨하였는데, 우선 반경헌(潘景憲, 자는 叔道)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력은 점점 더 쇠약해지고 시력도 심하게 떨어져 글자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흩어진 마음(放心)을 수습할 수 있으며 눈앞의 외계 사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 좀 더 일찍 눈이 멀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스러워할 정도입니다.” 또한 65세 쯤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위 황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최근 눈병 때문에 글자를 전혀 읽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토론을 통해 도리를 점점 더 확실히 알게 되었으며, 나아가야 할 길을 더욱 확연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노년의 주자는 ‘백병(百病)이 번갈아 공격한다’는 그의 한탄처럼 각종 질병으로부터 고통을 받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도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병중환좌’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정치적 탄압과 온갖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여기에서 늙고 병들어 막바지에 이르러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노년의 삶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대학’의 편찬에 주력하다.

주자는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으로부터 노쇠한 육신을 이끌고 힘들어하면서도 서책을 편찬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60대에 들어서서 주자의 학문은 새로운 대상을 향하기보다 그 이전까지의 저술을 수정하는데 주력한다. 특히 주자의 ‘대학’에 대한 주석은 평생의 숙업으로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자는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까지도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에 대한 주석을 수정하는 일에 몰두한다. 주자 자신도 “나는 ‘대학’ 연구에 많은 힘을 쏟았다. 일찍이 사마온공(司馬光)이 ‘자치통감’을 지었을 때 자신의 평생 정력이 이 책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 나에게 ‘대학’도 그러하다”라고 심경을 밝힌 바 있다.

주자가 ‘대학’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글이 있다. 어떤 사람이 주자의 막내아들 주재(朱在, 자는 敬之)에게 ‘당신은 선생께 무언가 특별한 것이라도 배웠습니까?’라는 질문에, “평소에는 그저 자리 밖에서 여러분의 토론을 경청하고 있을 뿐입니다. 때로는 아버님의 방에 들어가기도 합니다만, 아버님께서는 제 결점을 지적해주실 뿐입니다. 어느 날 ‘대학’을 가르치고 나서 아버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평생의 정력은 이 책에 쏟았다. 먼저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다른 책을 읽도록 해라.’” 이 글은 공자가 아들 공리(孔鯉)에게 ‘‘시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사람과 사귀지 못하고 ‘예기’를 공부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처세할 수 없다’고 하여 ‘시경’과 ‘예기’를 먼저 공부할 것을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자도 아들에게 가장 먼저 읽어야 할 도서로서 ‘대학’을 지목하였던 것이다.

‘대학’은 원래 ‘예기’의 49편 중 42편에 실려 있던 내용을 따로 단행본으로 만든 것이다. 주자가 ‘대학’에서 특히 중시한 것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이다. 그래서 주자는 ‘대학’을 주석하면서 전해 내려온 고본(古本)에는 편차가 뒤바뀌고 빠진 부분이 있다는 정자의 말에 근거하여, 편차를 다시 정하고 ‘격물치지장’을 지어 보충해 넣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학장구(大學章句)’는 임종 며칠 전까지 수정작업을 계속한다. ‘대학’의 내용은 크게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으로 나눌 수 있다. 삼강령은 명명덕(明明德)․친민(親民)․지어지선(止於至善)을 말하며, 팔조목은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격물은 이 팔조목 가운데 첫 번째 조목이다. ‘대학’은 격물과 치지를 말하여 유가사상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하는 기초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유가의 중심사상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하려면 먼저 ‘격물치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격물치지’란 무엇인가? 주자는 어째서 ‘대학’ 원문에 원래 없던 내용을 새로 보충해 넣을 정도로 격물치지에 주목하였는가? 주자의 ‘대학장구’에서는 격물과 치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격(格)이란 이른다는 것이고 물(物)이란 사물과 같다. 사물의 리를 끝까지 궁구하여 그 지극한 곳에까지 이르지 않음이 없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치(致)는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뜻이고 지(知)는 아는 것과 같다. 나의 지식을 끝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그 앎을 다하지 않음이 없고자 하는 것이다.” ‘격물’은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고, ‘치지’는 격물의 과정을 통해 나의 지식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나의 지식을 넓혀서 확충하려면 반드시 사물에 나아가서 이치(리)를 궁구하는 격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격물’의 노력을 많이 할수록 ‘치지’라는 지식의 확충도 그만큼 넓어지고 완전해진다.

특히 ‘치지’에서는 지(知)에 함축된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지’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객관사물에 대한 리를 궁구하여 얻은 지식이니 이것을 ‘견문(見聞)의 지’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하늘이 부여한 것으로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고유한 본성(리)을 아는 지식이니 이것을 ‘덕성(德性)의 지’라고 부른다. 물론 이때는 외부사물의 리를 궁구하여 얻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내 마음속의 고유한 본성(리)을 자각하는 것이 객관사물의 이치를 탐구해가는 격물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주자는 외부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확충해나가야 비로소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본성도 자각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결국 외부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격물의 과정이 없으면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고유한 본성도 자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자의 격물치지는 외부사물만을 탐구해가는 단순한 인식론적 의미가 아니라, 내 마음속의 고유한 본성을 자각하고 이를 실천해나가는 수양방법의 근거가 된다.

주자는 수양방법으로 격물궁리(格物窮理)와 거경함양(居敬涵養)을 제기한다. ‘격물궁리’는 격물치지의 다른 표현이니 밖으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넓혀나가는 것이요, ‘거경함양’은 안으로 내 마음속에 갖추어진 덕성을 함양해나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자는 외부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격물궁리’와 내면의 자기 성찰을 대상으로 하는 ‘거경함양’의 두 가지 수양방법을 동시에 강조한다. 이 두 가지 수양방법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이며,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주자는 ‘거경함양’을 견고히 하는 바탕이 ‘격물궁리’에 있다고 강조한다. 즉 ‘격물궁리’를 통해야 나의 지식이 넓어지고, 이러한 지식의 누적이 있어야 결국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본성도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주자는 거경함양에 앞서 격물궁리를 통한 외부사물의 지식을 확충해나갈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격물궁리에 반대하고 다만 마음속의 고유한 본성에 대한 자각만을 강조하는 육구연의 공부 방법을 비판한다.

●격물치지로 노년의 삶을 완성하다.

격물궁리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독서이다. 주자는 독서 가운데서도 특히 사서(四書)오경(五經)을 중심으로 하는 유가경전을 읽을 것을 권장한다. 독서를 통해 유가경전 속의 성현의 말씀을 배우고 익혀서 점차 지식이 쌓여지면, 이에 근거하여 결국 내 마음속에 갖추어진 본성을 온전히 실현해나갈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주자는 죽기 전까지 노쇠한 육신을 이끌고 유가경전에 대한 주석 작업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주자는 왜 이토록 ‘격물치지’를 강조하였는가? 그것은 격물치지를 통해 먼저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배우는 목적은 진실로 실천에 있으니 알고서 행하지 않는 것과 배우지 않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비록 행하고자 하여도 이치에 밝지 않으면 실천하는 것 또한 어떠한 결과에 이를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대학’의 도가 비록 성의(誠意)정심(正心)을 근본으로 삼았다고 해도 반드시 격물치지를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물론 배우는 목적은 실천하는데 있다. 그렇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여 행동한 것이 좋은 결과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 먼저 격물치지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정확히 알아야 행동의 준칙이 바로 서게 되고, 그런 다음에 그 이치에 합당한 행동을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주자는 사서(四書) 중에서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으로 ‘대학’을 지목하고, 또한 ‘대학’의 핵심 내용이 ‘격물치지’에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상으로 노년기 주자의 삶을 통해 볼 때, 노년으로서 극복해야 할 것은 단지 현실에서 드러나는 질병과 노화가 아니라 죽음에 이를 때까지 얼마나 철저히 자기 성찰을 하는가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자기 성찰’이란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하고 성장시켜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노년으로 깊이 진입할수록 삶에 대한 경계를 한시도 늦추지 않고 더욱 철저히 자신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질 때라야 노년으로서의 자기완성이 자연스럽게 현현된다. 철저한 자기 성찰만이 노년의 넉넉한 공간을 마련할 수 있으며, 이것은 밖에서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년 스스로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조우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타고난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게 되고, 이러한 본성의 회복에 근거하여 천리에 순응하는 노년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노년이란 노년의 회피가 아니라 적극적인 노년의 수용이다. 이 때문에 주자는 ‘격물치지’라는 수양(공부)방법을 통해 노년의 넉넉한 공간을 마련해나갔으며, 노년기의 주자를 괴롭혔던 정치적 탄압이나 각종 질병 등 현실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던 것이다. 이를 통해 노년기의 심약해질 수 있는 내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으며,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가는 마지막 순간조차도 자신에 대한 경계와 긴장을 늦추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주자는 격물치지의 공부를 통해 노년을 준비하고, 격물치지의 공부를 통해 노년의 삶을 넉넉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으니, 격물치지의 공부야말로 노년의 준비이자 노년 삶의 내용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주자의 죽음은 1200년 3월 9일이었다. 제자이며 사위인 채침(蔡沈)의 몽전기(夢奠記)에는 주자가 죽기 7일 전인 3월 2일에서 3월 9일까지의 일을 기술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죽음 직전의 주자의 모습을 소개한다. “3월 9일, 붓을 잡는 것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붓을 옮길 힘이 남아 있지 않으셨다. 조금 있다가 붓을 놓고 침상에 기대려 하시다가 잘못하여 손이 두건에 닿았으므로 내게 눈짓을 하시어 바로잡게 하셨다. 선생께서는 위아래를 둘러보셨는데, 눈동자는 여전히 타는 듯이 빛나고 있었지만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뜨기를 몇 번, 숨소리가 끊어질듯 희미해지시더니 마침내 숨을 거두셨다.” 이로써 주자가 죽음의 순간까지 붓 잡는 것을 멈추지 않고 두건을 바로잡는 등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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