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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교육의 역사
재일조선인교육의 역사
  • 박장미
  • 승인 2019.03.03 2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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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동양일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재일조선인 교육의 역사’를 매월 1·3주 월요일 특집면에 게재한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일본에 남은 우리 동포들은 갖은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이 책의 내용은 광복은 되었으나 여전히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재일동포 1~3세들이 민족교육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펼쳤던 투쟁사이다. 저자 오자와 유사쿠(小澤有作 ·1932~2002) 전 도쿄도립대 교수는 도쿄대학 재학 중에 일본인으로서 비인도적 식민지 교육에 분개해 재일동포 교육투쟁에 동참했고 그의 체험과 여기저기에 흩어진 자료를 수집해 정리했다. 1920년~1995년의 재일조선인 교육 75년사가 소상히 기록돼 있다. 이 자료를 한국어로 옮긴 이충호 전 옥천상고 교장은 3.1운동·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시점에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 재일동포들의 힘겨운 투쟁사를 바로 알리고, 이를 통해 재일동포 사회를 바르게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이 자료를 동양일보 지면에 연재하기로 했다. <편집자>



■재일동포 교육의 역사(삶)에서 그 시대구분

재일동포는 일본에 정착해서 민족의 설움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삶을 자녀 교육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 그들의 75년(1920~1995)간의 역사를 시대를 구분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재일동포 자녀들의 취학처는 크게 민족학교와 일본학교로 나눌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이 두 종류의 학교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어떠한 교육정책을 취했는가? 또한 그 특징은 어떻게 변했는가? 이에 대한 추적을 해보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재일조선인은 어떻게 대응하였는가? 민족학교의 동향을 초점에 맞추어서 이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다.

더 나아가 일본인은 이들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왔는가? 이것을 일본인 교사의 대응법의 변화를 추적하는 형태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 중에서도 교사가 일본학교에 다니는 재일동포 자녀들에 대해 어떻게 교육해 왔는지를 추적해 보는 것이 세 번째 목적이다.

이상과 같이 3가지 목표로 재일동포 자녀들의 교육의 역사를 3시기로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제 1기 : 1920년에서 1945냔 8월 광복까지의 25년간



일본정부는 민족학급의 설립을 금지·억압하고 일본학교 취학을 의무화시켰다. 다른 한편 민족학교는 설립이 알려지면, 즉시 경찰로부터 폐쇄당하였다. 일본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사가 일본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말하자면 동화교육의 시대이다. 1930년대에는 이것을 ‘협화교육’이라고 부르고 천황숭배 의식을 주입했다.



●제 2기 : 1945년 8월 광복으로부터 1970년까지의 25년간

이는 두 개의 국면으로 이뤄져 있다.

광복 후 재일동포들은 즉시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1948년부더 1949년에 걸쳐 민족학교를 강제로 폐쇄하고 재일동포 자녀들을 일본학교로 전학시켜 동화교육을 재현하였다(제1국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후 1950년에 민족학교는 부활 할 수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1965년 이후 다시 억압을 가해 동화교육의 체제화를 추진하였다(제2국면).

이 25년간은 일본정부가 민족학교에 대해 억압을 가하고 동화교육을 실시한 데에 대한 민족학교가 민족교육을 지키기 위해 저항을 계속한 시대이다. 탄압과 저항의 시대라고 할 수 있. 1960년 후반의 제2국면에서 일본인 지시인과 교사 사이에 일부이기는 하지만, 동화교육을 비판하고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을 지키는 운동이 시작됐다.



● 제 3기 : 1970년부터 오늘에 이르는 30년간

일본 정부는 민족교육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변함없이 동화교육을 획책하고 있지만, 바야흐로 그 존재를 묵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인 교사들 사이에 재일동포 재학생을 조선인으로 의식화시키는 교육실천이 일어났다. 또한 지방자치단체는 민족학교를 각종학교로 인가하고 재정적 지원을 해주기 시작했다. 일본의 학교와 사회에 민족공생 교육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싹트는 시대였다. 반면 재일동포의 생활 스타일에도 변동이 일어나 ‘민족’에 구애받지 않는 층이 생겨나고 있었다. 민족교육은 이러한 면에서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됐다.

이상과 같이 재일동포의 교육(삶)의 역사를 이렇게 3시기로 구분해 자료를 정리하기로 한다.



●시기구분의 의의

이와 같이 3시기로 구분해 보니 재일동포 교육역사의 특징이 명확히 드러나게 됐다.

또한 재일동포들의 삶의 흐름과 일본 정부의 재일동포들에 대한 정책변화도 잘 읽을 수가 됐다. 재일동포들이 민족학교를 설립할 자유를 끊임없이 요구하였지만, 이 자유를 일본 정부로부터 보장받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학교를 계속 지켜나감으로써 일본의 학교와 사회에 민족공생교육의 움직임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됐다. 한편, 이 작업은 역사의 전망을 세우는데도 유익했다. 우리는 민족공생교육이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에서 이탈하고 있는 재일동포 젊은 세대도 민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시대구분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논의를 기대해 본다. 이런 것을 시도한 논문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시기구분을 시도한 최초의 제안이 될 것이다. 논의를 위한 비판·검토가 향후에 있었으면 좋겠다.



■식민지 지배가 만들어낸 교육문제 – 제1기



●재일동포 교육의 기원

앞에서 3시기 가운데 제1기와 제2기, 즉 192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재일동포 교육 반세기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다. 우선 그 역사의 기원과 제1기(광복 이전)의 특징을 정리해 보자.

재일동포라는 존재는 원래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만들어 낸 사회적 산물이다. 식민지 지배가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일하거나 강제로 연행당하여 일본에 정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먼저 남자들이 일본으로 건너오고, 그에 이어 그 가족이 일본으로 건너오면, 아이들도 동반하게 됐다. 일본에 온 후 가정을 꾸리게 되면 자녀가 태어나 성장하게 된다. 이런 삶의 시작으로 동반되는 것이 교육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아동 수를 추정해 보면 1924년에 4000명이던 것이 7년 후인 1931년에는 무려 4만명으로 10배가 증가 하였고, 그 후 1940년에는 20만 명에 다하게 되었다. 정확히 이는 자연 증가가 아니라 사회 증가로 본다.이리하여 1920년대부터 30년대까지 재일동포 자녀의 교육문제는 일본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대두됐다.

이는 외국인 유학생에 대한 교육과는 달리 외국인 정주자 자녀에 대한 교육문제였다. 전자는 고등교육의 문제이지만, 후자는 초등교육에 속하였다. 이는 그 이전에 없엇던 새로운 교육문제였다.

재일동포 교육의 기원을 되돌아보면, 이와 같은 현상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만들어 낸 것으로서 일본이 책임져야할 교육문제임이 명확하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없었다면, 재일동포 교육문제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황민화’ 교육의 강제

그렇다면 이 시기에 재일동포 자녀는 어떠한 교육을 받았던 것일까?

재일동포도 ‘일본제국의 신민’이고, 일본국적을 갖는 자이므로 그 자녀도 일본국적을 갖는 자로서 의무적으로 일본의 교육법령에 따르고, 일본학교에 취학해야 한다. 조선학생은 조선에 살동안에는 조선교육령에 따라 교육을 받고, 일본에 오면 일본의 소학교령에 따라 교육을 받는 다. 이것이 당시 일본정부의 교육방침이었다. 소학교령은 교육칙어에 입각하여 천황에게 충의(忠義)를 다하는 교육을 규정한 소학교교육에 관한 근본 법규이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은 중일전쟁을 시작하고, 재일동포들을 ‘협화회(協和會)’(회장 關屋貞三郞, 전 조선총독부 학무국장)를 조직해 침략전쟁에 동원함과 동시에 그 자녀들에게 협화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협조해화(協助諧和)’ 하여 ‘천황을 위해 죽는’ 아이를 교육하는 것을 가리킨다. 재일동포 자녀들은 기미가요를 부르고 신사에 참배하고,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고, 일본 병사가 되도록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천황제 교육 즉, 황민화 교육의 강제가 제1기의 특징을 이룬다. 그 반면 취학한 재일동포 자녀들은 민족차별의식이 몸에 밴 일본인 학생들로부터 ‘조센진’이라든가 “김치 줘”라는 식의 놀림을 받으며 괴롭힘을 당했다. 다수 가운데 소수로서 분함을 맛보았다. 그런 점에서 존선 본토에서 같은 동포와 함께 공부하던 자녀들에 비해 보다 가혹한 민족차별 교육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야간 소학교나 야간 중학교가 있는 곳에서는 재일동포 자녀가 집중적으로 취학했다. 따라서 야간학교는 재일동포 자녀의 취학이 그 특징이다. 다른 한편, 일본정부는 조선어와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는 학교와 사설학원을 설립하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필자는 당시의 자료를 조사해 보았지만, 민족학교의 설립이라든가 활동을 기록한 문서를 본 예가 거의 없었다. 그만큼 이를 위한 일제의 감시가 심했다고 본다.



●광복과 재일동포에 대한 교육정책

식민지 교육의 구조는 한반도에서 강행된 대로 민족학교를 탄압하고 강제로 일본학교에 취학시켜 천황제교육을 이데올로기의 축으로 동화교육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제1기(광복전)에 조선인의 교육구조를 이루었다는 것은 이상에서 기록한 대로이다.

그런데 재일동포의 교육이 본국에서의 그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광복 후에도 동화교육의 일본정부 정책의 원형으로서 계속 유지되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본국의 교육은 식민지교육에서 독립하였지만, 재일동포 교육 독립은 일본 정부에 의해 계속 방해 당했던 것이다.

물론 동화를 주도하는 이데올로기는 변경되었다. 패전국으로 일본교육의 이념은 교육칙어에서 교육기본법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여기에 맞추어 재일동포에 대한 동화교육의 중심 이데올로기도 천황에게 충의를 다하는 ‘’일본제국 신민제의 육성에서 일본사회에 적응하는 ‘일본국민’의 육성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동화교육의 형태(일본학교 취학과 그 아래서의 교육)는 전혀 변화지 않았다.

 

 

이충호 선생은…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 △성신여대 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전 충북옥천상고 교장 △전 교육과학기술부 심의관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주일대한민국대사관 교육관 △주후쿠오카 대한민국총영사관 영사 △충북청명학생교육원장 △저서 ‘일제 암흑기 의사교육사’, ‘재일조선인 교육역사’, ‘신의 나라는 가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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