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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교육 75년사
재일조선인 교육 75년사
  • 박장미
  • 승인 2019.04.28 2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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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동화교육체제의 형성

●일본제국주의의 인간 형성 - 식민지 지배의 교육적 의미와 책임에 대해 -

19세기 말 이래, 소위 제국주의 시대는 제국주의 세계의 아이들을 크게 둘로 분열시키고, 억압 민족의 아이들과 피억압 민족의 아이들에게 각각 그러한 감성과 사상을 심어왔다. 특히 지배민족의 아이들에게는 대국주의(大國主義)와 배외주의(排外主義) 사상과 감성을, 피지배 민족의 아이들에게는 사대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의 독소가 갖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측면이다.

일반적으로 제국주의가 다른 민족에 대해 침략정책을 추진하고 유지해 나갈 때, 보통 자국민에게 침략정책을 지지하고 긍정하게 하는 사상교육·사상통제를 실시해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것은 상대민족을 멸시하고 자민족의 우수성을 맹신하도록 권력을 휘두르면서 침략을 합리화하고 합법화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상대민족에 대해서는 그 종속의 필연성과 민족적 열등감을 심으려고 하였다. 결국 여기에서 교육침략의 문제가 성립하고, 교육이 타민족을 지배하는 도구로 전화(轉化)하는 현상이 전개되었다.

일본제국주의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 아이들에게는 조선 멸시 관을 심고, 조선 아동에게는 일본과의 일체감을 강요하여 아이들의 세계 속에서도 민족적인 차별과 피차별, 지배자와 노예의 관계를 수립하였다. ‘분열시켜 지배하라’는 정치통치의 철칙은 아이들에게도 예외 없이 관철된 것이다. 그 결과 아이들의 성장 방법, 사물을 보는 견해는 크게 뒤틀리게 되었다.

원래 재일조선인의 문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한 결과 역사적으로 야기된 문제였다. 또한 교육문제는 조선에 대한 교육침략(동화교육) 정책의 전개를 하나의 축으로 하고, 일본에서의 대국주의적 풍토를 다른 하나의 축으로 삼아 상호 갈등하는 속에서 운영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이중적인 교육지배가 집약되어 한 몸에 받아들인 존재였다고 해도 좋다. 재일조선인 교육문제의 기저를 이루는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조선인에 대한 동화교육과 일본인에게 대국주의 교육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본장의 목적은 일본제국주의와 교육이라는 시각에서 광복 이전의 한일의 교육사적 환경을 개관해 보는데 있다.



●동화교육의 역사 - 민족 혼 빼앗기 -



-동화교육 정책과 문맹화 정책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식민지로 함과 동시에 일본의 천황을 조선 민족의 도덕과 교육의 지배자의 위치로 규정하여 20세기 전반기에 조선 아이들의 생활사 전반을 지배하였다. 조선 아이들은 ‘나라 잃은 국민’의 자녀로서 차별과 빈곤과 굴욕을 감수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동화교육을 강요당하고, ‘일본제국신민’의 의식을 주입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조선 민족의 일원으로서 성장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인 교육정책 구조는 크게 세 개의 측면으로 구성되었다. 즉, 첫째는 조선인의 굽힐 줄 모르는 민족교육운동을 계속 탄압하는 것을 기조로 하고, 둘째는 선택된 소수에 대해서 동화교육을 실시하고, 셋째는 많은 대중으로부터 학습의 기회를 빼앗아 버리고, 그들의 문맹화·우매화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조선인은 애국문화 계몽운동, 3.1독립 운동, 계속되는 학교 맹휴운동(이것의 정점은 광주학생 운동), 1930년대의 김일성을 선두로 하는 민족해방의 투쟁과 교육운동 등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고 민족 독립의 교육을 요구하며 계속 투쟁하였다. 또한 사립학교나 서당에서는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조선어나 조선사를 계속 가르쳤다. 그로 인해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의 자주교육을 치안문제로 파악하고 탄압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교육을 강요하는 방법으로 한 손에는 무기, 다른 한 손에는 교육칙어라는 식으로 극히 폭력적인 수단으로 강행하였다. 일반적으로 타민족의 아이들로부터 민족혼을 빼앗는 동화교육은 결국 폭력과 위혁(威嚇)을 동반하는 법이다.

탄압과 동화라는 구조는 정책 차원에서 실행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적인 수업 현장에서도 매일 매일 관철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식민지 시대의 교육체험을 체험한 재일조선인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어느 날, 반 친구가 조선어로 말하고 있는 것을 담임선생님(일본인 교사)에게 일러바쳤다. 담임은 그를 심하게 야단쳤다. 그러자 구군(具君)은 아주 정색을 하면서 오히려 큰 소리로 “조선인이 조선어로 말하지 않고 무슨 말로 말합니까?”하고 정면으로 대들었다. 곰[熊](담임의 별명)은 몹시 화가 나서 具군은 유도로 업어치기를 세 번이나 내던져 버렸다. 게다가 움직이지 못하는 구군의 얼굴을 시간표의 사각진 판으로 후려갈겨서 피가 흘러나왔다.’(배영한 ‘구능의 잔디’ <신세대> 1964년 1월호).

이와 같이 민족적인 것에 폭력적 박해가 가해졌으며, 그 위에 40년에 걸친 조선민족에 대한 교육침략의 핵심으로 동화교육이 전개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동화교육의 본질은 조선인의 아이들로부터 말을 빼앗고, 대신 일본어를 강요하여 조선의 역사나 문화를 빼앗아 일본의 천황제의 역사나 문화를 주입시키고, 조선의 아이들에게 ‘제국신민 다운 요소’(데라우치 총독)를 심었으며, 드디어는 조선인의 아이들을 ‘천황의 노예’로 바꾸어버리는 데 있었다. 천황제 사상이 동화교육 성립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된 것을 여기에서 확인해 두고 싶다.

이 동화교육의 실현을 목표로 해서 여러 기구나 제도가 만들어 졌다. 먼저 학무국을 정점으로 하는 교육행정 기관이 설치되고, 일본인 관리가 그 직위를 독점하였다. 둘째, 근대학교가 설립되어 동화교육을 실시하는 장소를 확보하였다. 이곳을 거점으로 동화교육을 실시하다가 연차적으로 확대해 가려고 생각하였다.

셋째, 일본인 교사가 학교의 관리 층에 배치되어 동화교육의 첨병 역할을 맡았다. 넷째, 일본인의 손으로 교과서가 편찬, 배포되어서 교육내용이 독점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지배자가 조선인 교육의 주인공이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석을 첨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조선 내에 민족차별 학교제도가 견지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지배자는 조선 아이들의 ‘일본인’화를 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서는 조선에 살고 있는 일본인 자제의 교육은 제도상이나 내용 상에서도 엄격한 차별로 만들어갔다. 일본인 자제는 조선인 자제와는 별개의 학교에서 교육시키고, 그 1인당의 교육비도 일본인은 40원 10전, 조선인은 50전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조선총독부 <조선사정>1943년 판). 결국 한편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을 엄격하게 구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조선인의 ‘일본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 생긴 조선인의 ‘일본화’란 것은 어디까지나 ‘아류 일본인(亞日本人)’ 형성임에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동화교육을 기초로 하면서도 일본제국주의는 많은 조선인에 대해서는 문맹화 정책을 강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제국주의 정책의 자기모순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즉, 조선인에게 토지를 빼앗고(토지조사 사업 등), 쌀을 빼앗고(고소작료 등), 노동력을 빼앗은(저임금 노동) 결과 많은 조선인은 빈곤과 유랑의 신세로 전락하였다. 가혹한 수탈로 부모들은 학비를 마련할 수 없어 아이들을 취학시킬 수가 없었고, 아이들 또한 일을 하거나 유랑하는 나그네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예외 없이 생활고 때문에 할 수 없이 학습의 기회를 박탈당하였다. 그간의 사정에 대해 김수복(金壽福)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는 50년의 긴 세월을 소작인으로 살아왔다. 지속적인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해온 우리 집은 언제나 어두웠다. 3형제는 학교에서 쫓겨나 일터로 나갔다. … 학교생활은 날이 갈수록 내 마음은 괴롭혔다. 이는 모두가 가난 때문이었다. 수업료 때문에 몇 번이나 교실에서 쫓겨났는지 모른다. 어떤 때는 일본인 교사에게 복장이 더럽다고 회초리로 몇 번이나 맞았는지 모른다.

마음 놓고 하루라도 마음껏 공부해 본적이 있었던가? 불안과 공포, 슬픔 이것이 일제 통치 밑에서 지낸 나의 유년시절이었어요.’ (김수복 <어떤 여교사의 기록>, 1962년)

게다가 동화교육을 하는 공립학교는 시, 군의 주요 구역에만 설치되어 있었다. 그 당시 조선인 아동의 취학률을 보면, 다음과 같다(‘조선에 있어서 교육문화의 현 단계’, <조선>, 1942년 10월).





1944년에는 6할의 아동이 취학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많은 아동들은 배울 권리, 알 권리를 빼앗기고, 문맹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일본인’화 된 아이들의 저변에는 문맹의 아이들이 폭넓게 분포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인 교육정책의 하나의 귀결이었다.



-동화교육 정책의 심화

일본제국주의는 조선민족의 경제적 기반의 파괴만이 아니고, 그 문화적·정신적 전통·생활·태도의 파괴까지 시도하였다. 후자의 중심 수단이 동화교육이었다. 그 동화교육은 세 단계를 거치면서 강화 되었다.

첫 단계는 소위 ‘보호’시대(1905-1910) 이고, 일본제국주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지휘 하에 ‘문화적 교육’의 부식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침략반대의 슬로건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있던 민간 교육운동을 ‘미개의 교육’이라고 중상모략하고 이를 탄압하는 데 힘을 집중하였다. 그것은 ‘천황제 교육’을 이식하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결국 조선인의 자주적인 민족교육을 무엇보다 치안 문제의 대상으로 보고, 탄압을 가하였던 것이다. 데라우치 초대 조선총독이 정복자의 자세로 한 다음의 말에서 그것이 증명되고 있다.

‘또 사립학교 중에서 창가나 그 밖의 것으로 독립을 고무하고, 또는 제국에 반항하도록 부추기는 자도 있다. 이런 자들은 강한 사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는 까닭으로 단속 상에 보다 주의를 요한다. 만약 조선의 소년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상을 양성한다면, 어떠한 결과를 발생시킬 것인가는 조선인 스스로도 깊이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독립을 부르짖고, 그것이 일본에 반항한다고 가정해보자. 결과적으로 조선인은 과연 보다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일본은 실력으로 이를 진압할 것이고, 지금까지 아무런 고통도 없었던 조선인들은 이로 인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게 될 뿐이다.’(‘각도 장관에 대한 훈시’1910년 11월)

노예가 되던가, 죽을 것인가, 어느 쪽이던 선택하라는 위협의 언사이다.

이와 같이 조선인의 민족교육을 탄압하면서, ‘병합(倂合)’으로 시작하여 다음 단계(1910-1938)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이름하에 ‘일본제국신민화(日本帝國臣民化)’의 슬로건이 공공연화 되는 가운데 학교 교육의 방향이 설정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의 ‘교육은 교육에 관한 칙어(勅語)의 취지하에 충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한다.(조선교육령 제2조)로 규정하고, 조선 사회와 그 청소년들에게 인간관계를 맺도록 해준 고마움을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이라는 것을 정점을 향해 개조시켜 나가도록 결정하였다. 이어서, ‘그 교육은 특히 덕성의 함양과 국어의 보급에 이르게 하는 힘으로 제국신민이 되는 자질과 품성을 갖출 것을 요함.’(朝鮮總督 諭告) 이라고 하였다. 일본제국 신민화를 위해서는 천황제 사상의 주입과 일본어 교육이 기본인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조선인 청년으로부터 민족의식 말살 정책은 3·1운동 이후에 한층 더 철저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 과장이었던 유케고우타로(弓削幸太郞)는 그의 저서 <조선의 교육>(1923년)에서 조선민족 말살 설을 전개하고 있다. 유케고우타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3․1독립운동의 최대의 원인은 조선인의 ‘독립 욕구’에 있다.

그러므로 ‘조선인의 관념을 희박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자신은 단순히 일본인이라고 하는 관념으로 차게 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 방법은 ‘교육을 보급하고, 이성을 발달하게 한다.’ 것이다. 그러면 이성의 발달이란 무엇인가?

(1) 조선 통치가 고맙다는 취지를 알림. (2) ‘일본의 국정(國情)과 세계의 대세와 일본의 세계적 지위를 알게 해서 일본 통치를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관념을 갖는다.’ (3) 학생이 자신을 자각해서 망령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할 것 등을 배워 체득하는 것이다(242-45쪽).

이것이 제국주의 자에 의한 ‘이성(理性)’의 내실이었다.

마지막 단계(1938-45년)는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의 확대와 동시에 동화교육도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일본제국주의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 칭하여, 학교 교육만이 아니고, 조선인의 일상생활에 까지 모두 일본화 시키려하였다. 예를 들면, 매일 아침 궁성요배와 정오묵도라는 천황숭배를 강요하고, 신사참배와 가미다나(神棚: 카미다나는 집안이나 신사 등에서 발행한 코우타이징구우(皇大神宮)나 씨족의 수호신 등의 부적을 모시기 위한 선반)를 집집마다 설치하라는 신도(神道)의 강행에서 비롯하여, 조선복의 추방과 국민복의 제정, 일본식 작법(作法)의 보급이라는 ‘민속의 황민화(皇民化)’를 강행하고, 드디어는 일본식 성씨를 바꾸도록 하여 조선 명을 일본 이름으로 바꾸게 하였다. 물론 일본어 상용은 계속 추진되어, ‘도청의 전화 통화는 상대가 국어(일본어를 말함- 이하 같음)를 해석하던 그렇지 안 던에 관계없이 국어를 상용하지 않으면 일체 접수하지 않고, 또 순수한 국어에 의하지 않으면 일체 접수 받지 않는다’는 양상이었다(‘국어 보급의 새로운 단계’, <朝鮮>, 1942년 10월). 학교 교육에서는 일본어 시간은 물론, 모든 교과가 일보어로 가르쳤고, ‘황국신민으로 단련’으로 나아갔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재일조선인 교사에 의한 태평양전쟁 식대에 소학교를 다닌 한 재일조선인 교사의 다음 회상에서 잘 엿볼 수 있다.

‘모국어인 조선어는 내가 4학년 때까지 주 1시간 밖에 없었다. 이 시간 이외에는 일체 일본어로만 배웠다. 그뿐인가, 자기 나라에 살면서도 모국어를 쓰면 반드시 1전씩 벌금을 냈다.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가 있으면,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일일이 허가를 받고서야 비로소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일본어 상용은 가정에서까지 강요되어 일본인 선생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정 방문을 하여 일본어 사용이 잘되고 있는 아이들을 표창하는 등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철저한 일본인화에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난다.’ (‘조선교조 뉴-스’ 1954 )



이와 같이 철저하게 하여온 ‘황국신민화’의 교육 의도는 모든 조선인이 제창하도록 강요한 ‘황국신민의 서사(誓詞)’(1939년 제정) 가운데 잘 표명되어 있다(성인용과 아동용의 두 종류가 만들어 졌다.).



一.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二.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 충성을 다 한다.

三.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해서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교육은 부분적으로 하고 있으나, 소학생에게는 ‘우리들이 공부하는 것도 이 서사(誓詞)대로 실행하기 위한 것이다.’(‘문교의 조선’ 1940년 5월호에 수록된 글)라고 말하고, 어른에게는 ‘조선인은 원래부터 일본인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총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이광수 ‘내선일체 수상록’ 1941년)고 맹세하고 있었다. ‘일본제국신민’이라는 틀에 맞추어, 민족의식을 상실한 현상이 일부에 나타났다. 민족의 자부심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열등한 존재임을 인정하며, ‘지배국’의 문화를 숭배하고 ‘지배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은 식민지적 노예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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