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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교육 75년사
재일조선인교육 75년사
  • 박장미
  • 승인 2019.05.19 1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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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시신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독립기념관>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을 모함하는 유언비어를 게재한 일본 신문. KBS 역사저널 그날 캡쳐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지켜본 일본인 목격자의 증언 KBS 역사저널 그날 캡쳐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동화교육체제의 형성

●동화교육의 내용

이와 같이 ‘조선인의 관념’을 말살하는 교육은 일본어와 일본 역사의 교수가 그 주축이었다. 언어와 역사가 민족적인 존재로 결속 되는 것이므로 그 분야에 집중적인 공격을 한 것이다.

일본어 교육은 ‘국어는 국민정신을 불어넣는 것으로 단, 지식 기능을 얻는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것’(보통학교 규칙. 1911년)으로서 어떤 분야보다도 우선적으로 중점을 두어 왔던 것이다(표 참조: 표에서 매주 수업시간 수의 위의 숫자는 매주의 수업 총 시수를 표시함. ( )안의 숫자는 매주의 일본어 시수.) 그것은 중일전쟁 이후 특히 강해져서 ‘국어(일본어) 교육을 받은 자가 모어라고 말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은 거의 없고, (일본어는 여분이 없다.)’고 하는 방침을 언어 정책의 기조가 됐다.

당시 ‘국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자야말로 황국신민으로써의 자질을 강화하는 것이며, 공영권내의 지도자로서의 영광을 갖는 것이다.’라고 하며 조선 사회에서 조선어를 추방하려고 고심함과 동시에 일본어에 대한 정책의식도 일반화됐다.(총독부 편집과장 島田牛雄 <국어보급운동의 전개>, ‘문교의 조선’, 1942년 8월호)

초등학교에서는 일본어의 강요가 드디어는 조선어 사용에 대한 죄의식을 갖도록 했다는 사정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학교나 교실에서 조선어를 사용하면 체벌이나 벌금이 가해지는 것은 보통의 일이었지만, 그보다 일보 전진하여 조선어에 대한 부정의식을 심어주는 것조차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한 일본인 교사는 그 교육 실천의 표현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2학기 중순쯤의 1학년 교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성적이 나쁜 아이가 조선어를 사용하자, 성적이 좋은 아이가 주의하라고 하면서 말다툼이 시작됐다.

“나쁘다. 나쁘다, 조선어 사용은 나쁘다.” 성갑이 미친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에 이어서 몇 명의 외치는 소리가 교실 안을 소란하게 하였다. “삼길, 나빠, 나빠, 조선어 사용은 나빠”하고 외쳤다. 조선어가 나쁘다는 말! 지금까지 일본어 생활을 역설해 왔고 강제해 왔다. 그러나 결코 조선어 사용에 대한 하나의 죄악감을 가졌던 기억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는 이 가지는 옳은 말이고, 또한 같은 것을 의미하는 말로 받아들여졌음에 틀림없다. 무심결에 입에서 나온 조선어 한마디가 아이들 사이에서 용서받지 못하였다. 그것은 사실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입학 한지 반년이 지나지도 않은 아이들이 강력한 국어 의식이 조선어 사용에 대한 강한 죄악감마저 갖도록 하고 있다. 그것으로 좋은 것인가? 이렇게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잘 알 수 없는 무엇인가 소용돌이 치고 있다. 이윽고 선생님은 각오를 단단히 하면서 “응, 그것으로 좋다. 앙들의 윤리는 바른 거다.”…하고 작지만 강력하게 기침하였다(반전임,반 <반도의 아동들>, 1942년, 54-55쪽).

이 아동들은 이윽고, 국어 표찰을 만들어 조선어를 사용할 때마다 한 장씩 주어 10장이 되면 1전의 벌금을 내고, 그 돈이 모이면 위문대를 만들어 일본 병사에게 보내도록 결정하여 실행하기도 하고, 혹은 성씨를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부모에게 권장하기도 하며, 결국은 서로 다투어 군에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와같이 일본어 교육과 병행하여 일본의 역사를 갈치도록 권장되었다. 일본역사는 국체의 존엄이라는 이름하에 한일병합과 내선일체의 역사적 필연성을 설명하고, 조선의 아동들에게 영구적으로 노예의식을 심는 것을 그 목적으로 했다.

예를 들면, <초등국사>(1940년 발행)의 5학년용 교과서 머리말에 역사교육의 학습 목적을 다음과 같이 표시하고 있다(제1과 ‘국어에서’).

‘(전략) 우리들이 지금부터 배우는 것은, 먼저 우리 대일본제국이 훌륭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우리나라도 천성이 우수하다는 점을 분명히 알도록 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이 우수한 천성을 느끼고 나라가 번영하게 된 모습을 알며, 우리가 목표로 하는 점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들의 의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아 진정한 국민으로서의 마음의 전도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황국사관으로 조선 아동의 역사의식을 충만해 가도록 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독립사상을 차단시켜 조국에 대해서 등을 돌리는 노예 의식을 형성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천황제 중심의 역사 속에서. 조선이라는 존재는 일본의 침략대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거기에 나타난 조선 민족의 모습은 항상 종속된 모양으로 묘사되었고, 조선의 아동들에게 수시로 조선 독립의 권리와 능력이 없는 나라로서의 인상을 심어주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좀 장황하기는 하지만, 초등국사 근대조선 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일본제국주의자의 전형적인 조선관이 드러나 있다(제 50과 ‘명치천황’에서).



●한국병합

“일본은 메이지 초기부터 오로지 조선의 행복을 꾀하고, 우선 수호조약(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어 이를 세계에 내놓았다. 그러나 한국은 독립의 열매를 거둘 수 없게 되었고, 드디어 타국에 압박받는 상태로 동양의 평화가 깨어질 위기에 있게 되었다. 이에 우리나라는 포츠머드조약(1906년)에 의해 새롭게 한국과 협화를 맺어 우리 보호국으로써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리하여 경성에 통감부를 두고, 이토히루부미(伊藤博文)를 통감에 임명하여, 한국의 내정을 개정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한국의 정치는 점점 개정되었는데, 다년간에 걸친 폐정은 쉽게 제거되지 못하고, 민심은 또한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거기에다 구미제국의 세력이 번성하여 동양으로 잠입하여 들어온 때이므로 함께 국리민복을 완전히 하기 위해서는 한일 양국이 힘을 합하여 하나로 되는 이외에는 다른 좋은 방법은 없었다. 원래 일본과 조선은 신대이래 어느 나라보다도 가깝게 왕래한 사이였고, 기후, 풍토, 인정, 풍속이 매우 흡사하며 또 같은 문화를 갖고 있으므로 서로 융합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리고 한국인 중에도 병합을 열렬히 희망하여 양국정부에 부탁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한국 황제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어 백성들의 뜻을 받들어 명치 43년 8월(기원 2570년), 통치권을 천황에게 양도하고, 제국의 신정이 백성들은 더욱더 행복하게 해 줄 것을 희망하게 되었다. 천황도 역시 병합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셔서 한국 황제가 신청한 것을 받아들이시고, 영구히 한국을 병합시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전의 한국 황제를 왕이라 하고, 황족의 예로써 왕가를 대우하게 되었으며, 한국을 고쳐 조선이 칭하고, 새롭게 총독을 두어 모든 정무를 통치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주어진 조서중에서 ‘민중은 직접 짐이 평온한 아래 두고, 그 건강과 행복을 증진하도록 산업 및 무역은 치평 아래 현저한 발전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동양의 평화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하여 그 기초를 견고하게 쌓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을 짐이 의심해 맞이하지 않는 바이다.’라는 말이 있다. 실로 명치천황은 아버지가 아들을 사려 깊은 애정으로 대하듯이 조선 사람들의 행복을 생각하고 계셨다. 이때부터 한반도의 백성들은 모두 제국의 신민으로서 황실의 성덕을 받들게 되고, 동양평화의 기저는 드디어 굳혀지게 되었다. 이후에 교육을 보급하고, 교통 통신을 열고, 산업을 발달시켜 신민의 건강과 행복은 끊임없이 증진되어 갔다.”(<보통학교 국사>, 1932년)

황국사관은 조선의 독립을 빼앗은 것이지만, 조선인의 번영의 기초이다. 라고 하는 망국예찬의 견해를 조선인 아동들에게 계속 설교한 것이다. 역사교육은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수단이 아니고, 일본제국주의의 이익에 전면적으로 봉사하는 도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태평양전쟁과 동화교육

태평양전쟁의 확대는 동화교육을 통하여 전면적으로 군사 목적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집약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동화교육의 목적을 이렇게 공언하였다.

“(징병제라던가 지원병제라던가) 이러한 방법에 관한 것은 군대식으로 생각됨으로 우리들이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가 없다. 후에 훌륭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청년을 양성해서 가능한 한 많은(군대로) 채용되도록 하면 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학무국장 鹽原時三郞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에 대해서>1939년 6월)

1944년 조선인 청년에 대한 징병제도의 실시가 결정되었을 때 한 일본인 전문학교 교장은 조속히 소신을 표명하여 이를 지시하였다. ‘- 나의 학교(법학전문학교)에서는 학교 교련, 혹은 武道, 혹은 일본학에 힘을 기울이고 있지만, 졸업 후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은 교육시킨 것이 아까운 듯한 느낌이 듭니다.’(‘징병제도의 실시를 돌아보고’, <문교의 조선>, 1944년 7월)

이렇게 하여 전쟁의 확대는 동화교육을 매개로 조선인 청소년의 민족적 성격을 빼앗은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하여 청소년들을 전쟁에 동원하였으며, 결국은 그 육체와 지식과 기술을 이용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조선인 청년의 민족혼을 빼앗은 위에 목숨까지도 빼앗아 갔다.

태평양전쟁 중에 조선에서 징용된 자의 수는 무여 415만명,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자는 72만 5000명에다 군인, 군속으로 동원된 자의 수가 36만4000명에 미치고 있다. 이들 군인 군속 관계의 사망자는 10만명 이상이 되었다. 동화교육의 ‘열매’를 마지막으로 거둬들인 것은 분명 일본제국주의였다. 보호시대(1905~1910)의 조선은 일본식 교육의 도입에 반대하였다. 당시 학부차관 다와라 마고이치(學部次官 表孫一)는 이 반대를 일소에 붙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위에다 생각 없는 무식한 하층 백성에 이르기까지 어떤 자는 말하기를 일본어를 배워서 일본으로 보내어 일본의 군대로 만들려는 것인가?, 또 말하기를 ‘일본 노동자로 만들려는 것이다’라는 유언비어가 그치지 않았다.”(‘한국교육의 현상’ 1910년)

역사에 대해 올바른 전망을 갖고 있었던 것은 과연 ‘무식한 백성’이었을까? 아니면 ‘문명적 교육의 지도’에 나선 일본인 지배자였을까? 역사는 이미 그 증명을 마쳤다.

조선인이 조선인인 것을 부정하는 고뇌의 시기는 조선 아동들의 역사 중에서 민족적 굴욕의 시대로 각인되어 있다. 이 혐오스러운 노예의 체험은 지금의 조선 아동들에게 이야기로 전해져 공동의 인식으로 자리 잡았고, 모든 노예의식을 배제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귀중한 지침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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