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大正)시대 중기부터 조선인 도항자 수 증가
일본인 재일조선인 사이 민족차별은 일상생활 수준

Ⅱ재일조선인 문제의 전전사(戰前史)

재일조선인 문제는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지배가 없었더라면, 이 문제 또한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지배가 만든 문제라고 하는 인식을 갖는 것이 우리들에게 기본적으로 중요한 관점이 됐던 것이다. 그것과 동시에 일본에 사는 조선인에 대해서는 조선에 사는 조선인 이상으로 가혹한 억압을 가했던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가 권력에 의한 지배만이 아니고, 사회적 차별의 강제력에 의해서 일상생활에 둘러싸인 것이다. 그들은 이 땅에서 조선인으로서의 피차별과 일본인으로부터 동화 강제란 점에 있어서 훨씬 엄격한 생활 방식으로 살아왔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재일조선인의 어른들의 상황을 돌아보고, 정리해 두고 싶다.



1. 재일조선인 문제의 성립

●조선인의 도일(渡日)

조선이 식민지화되기 이전인 1904년 당시 일본에 재류한 조선인 유학생이나 친일 정치가를 중심으로 해 겨우 229명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외국인으로서 재일(在日)했다. 그런데 조선 병합에 의해서 이 사태는 일변했다. 그 때에는 일본 재주의 조선인은 식민지 인민이라는 형태로 일본제국 신민이 됐고, 그 성격이 바뀜과 동시에 수적으로 급증해 갔다. 기본적으로는 가혹한 식민지 지배의 결과 조선인 대중은 토지와 일자리에서 배척 당항 유랑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됐으므로 부차적으로는 일본 자본주의의 급격한 발전이 값싼 조선인 노동자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에 의해 조선인 대중의 도일이 격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의 쌀과 더불어 조선인 노동자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출한 상품 중에서 특이한 지위를 차지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때 마다 조선인의 일본 재주(在住)가 단계적으로 급증해 1945년에는 조선 총인구의 1할이 넘는 약 240만 명이 도일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는 참으로 엄청난 민족 이동의 강제였다. 참고적으로 재일조선인의 도일 연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일본과 조선의 근현대사 가운데 새로운 역사 현상으로 재일조선인 문제가 등장하게 됐다. 이와 같은 계기를 초래한 것은 통상, 생활고에 기초해 도일(渡日)과 강제연행에 의한 내일(來日)로 들 수 있다. 본 항에서는 전자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대정(大正)시대 중기부터 격증한 조선인 도항 자의 숫자는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 심화, 수탈의 격화로 도일의 증대가 엿보였던 것을 예상할 수 있다. 1932년 오사카부(大阪府)의 조사에 의하면 도항 자의 거의 90%가 농민출신이고, 도항 이유의 80%가 농촌에서 농업과 생활 파탄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강재언 <재일조선인 도항사> 1957, 31쪽, 35쪽). 이것은 오사카 뿐만 아니라, 일본 어느 부현(府縣)에 사는 조선인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제주도에서 17세 때 결혼해 농부로서 일생을 보낼 작정이었지만, 해마다 강화되는 곡물 공출에 견디다 못해 농부로서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공출미의 징수는 너무나 가혹했다. 기한 내에 완납할 수 없었던 50~60세의 연로한 사람이 20세정도의 젊은이에게 집밖으로 끌려가 폭행당하는 장면을 몇 번이나 봤지만, 그 모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어떤 농민이 병상에 있는 부모에게 쌀밥을 드리기 위해 약간의 쌀을 집 뒤에 있는 대나무 밭에 감춰 둔 것이 발각이 돼 경찰에 끌려갔다. 결국에는 말이나 소까지 공출로 강요되고, 그들은 소의 털색이 나쁘다던가 종자가 나쁘던가 하는 이유를 붙여 그저 보는 대로 돈으로 받아들였다. 가장 소중히 여겼던 소를 빼앗긴 그들은 그 만큼 마음이 비통해 진때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이던, 만 주던, 어디든지를 막론하고 지금의 고통스런 환경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만이 그들의 소원이었다.…후략…“(박경식 <조선인 강제련행기록>,1965년, 31-32쪽)

토지조사업(토지 취급), 산미증식계획(쌀 취급) 그 밖의 농업정책은 조선 농민을 자작에서 소작으로, 더 나아가 일을 하면 할수록 빚에 쪼들리는 상태에 빠져들었고, 그래서 이농(離農)하려는 경형이 강했다. 이와 같이 유민 문제가 생기고, 어떤 자는 중국 동북지방으로, 어떤 자는 화전민으로 그 이외의 사람들은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더구나 이들 조선인 도항 자는 대부분 무일푼으로 일본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자기 노동력을 팔아 생활해만 했다. 재일조선인은 식민지 하의 도항이란 이상한 형태를 거쳐서 농민으로부터 푸로레타리아로 전화(轉化)한다는 역사적 과정을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일본에 온 재일조선인은 일본 사회에 섞여서 살게 됐다. 그 만큼 민족차별의 문제는 사회의 일상생활 수준의 문제로 돼 생겨났고,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의 사이에 빼놓을 수 없는 차별 - 피차별의 관계를 만들어 갔다. 이것은 동화와 차별이라는 두 줄거리의 계통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첫째로 일본의 사회와 민중은 재일조선인의 눈으로 봐서 “처음부터 조선인은 일만하는데 능하고, 개나 고양이와 같이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 말” (장두식 <어떤 재일조선인의 기록>1966년, 198쪽)을 해 생활과 인간성에서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고, 그와 같이 처우했다. 동시에 조선인이 일본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본어나 일본의 생활 습관을 배워야하며, 그 동화작용이 사회적 강제로 추진됐기 때문에 재일조선인이 일본화 되는 것은 당연시하는 감각이 일본인 사이에서 자라 왔다. 그것은 재일조선인으로서 이중적인 차별임에 틀림없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재일조선인 문제는 항상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의 무제와 일본사회에서 존재 방법의 문제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국가적 지배는 계속 이러한 사회적 차별의 현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인 차별을 참아가면서 재일조선인은 전쟁 전 30년의 역사를 보내고, 그 가운데서 조선독립과 조일(朝日)노동자의 연대를 노리는 운동초차 전개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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