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시신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독립기념관>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시신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독립기념관>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Ⅱ재일조선인 문제의 전전사(戰前史)

1. 재일조선인 문제의 성립(2)



●관동(關東)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재일조선인 문제가 일본 사회 문제로 널리 자각된 것은 관동 대지진에 의한 조선인 학살 때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사건은 재일조선인 문제의 정치·사상사의 원점에서 규정돼야 할 것이다.

관동 대지진에 의한 조선인 학살은 ‘독일의 나치스가 자행한 아우슈비츠 학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것으로 비유되는 사건이다. 이때 일본의 관헌과 민중의 손에 6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당시 재일조선인은 전 일본에 8만명 정도가 살고 있었는데, 이 중에 도쿄에 1만2000~1만 3000명, 가나가와(神奈川)에 3000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조선인은 모두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는 공포 분위기에 쌓여 있었다. 이후 재일조선인은 이 대량 학살의 공포를 마음속에 아로새긴 채 살아가야 했다. 1923년의 간토 대지진은 천재였지만 지배자에 의해 인재로 바뀌었다. 인재의 중심적 내용은 재일조선인의 학살, 전투적인 일본 사회주의자의 학살(가메이도 사건), 나이가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사건 등 모두 세 가지로 반체제운동을 탄압하려는 것이었다. 이것들을 세 가지 시각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그 하나는 일본 정부의 방침이다. 현재는 조선인 폭설을 유포해 학살을 부추긴 것이 일본 정부였다는 사실은 이미 실증됐다. “식량 폭동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민족적 증오심을 부추겨 정부로 향하는 인민의 반항을 조선인에게로 향하게 하도록”했다고 한다. 그 배경에는 일본의 인민운동과 조선의 민족운동의 혁명화(쌀 소동, 공산당 결성, 3․1운동)에 대한 일본 지배층의 공포심이 있었고, 특히 일본인 노동자와 재일조선인 노동자의 제휴 움직임(1923년 메이데이에 조선인 참가, 조선인노동조합 성립)을 깨뜨리고자 하는 것도 있었다. 요컨대 계엄령을 끌어내어 인민봉기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재일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둘째, 일본 민중의 사상 구조라는 문제가 있다. 군대나 경찰만이 아니라 자경단(自警團)을 중심으로 한 일반 인민도 조선인 학살·상해에 나선 것이다. 많은 인민은 조선에 대한 편견에서 조선인 폭동데모설을 믿고, 조선인에 대한 공포감·증오감에 사로잡혀 지배자와 손을 잡고 조선인 억압에 협력하였다. 이들은 톱으로 시체의 머리를 자르기도 하고(군마켄 후지오카 郡馬縣 藤岡), 임산부의 배를 가르기도 하는(도쿄 東京) 비인간적인 행위까지 저질렀다. 민족적 편견에 사로잡혀 진정한 적(계급 대립)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그 원인은 “식민지를 갖고 있는 민족이란 끊임없이 식민지 민족의 저항 및 독립운동에 맞부딪혀야 하는 공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인민적 차원에서 조선 편견의 내재화는 이 시점에서 달성됐다고 할 것이다.

특히 이 대학살이 재일조선인 및 조선 민족의 생활과 역사에 미친 영향과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도 주의해야 한다. 살아남은 조선인은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40년, 하루라도 빨리 이 무서운 일본에서 도망쳐 나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쫓겨 조국으로 돌아갈 여비조차 모으지 못했다”(김학문)며 공포의 기억을 계속 품게 된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내 몸을 한평생 불구로 만들고 수많은 우리 동포의 목숨을 빼앗아 간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증오는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신창범) 라는 반일제(反日帝) 지향을 정착시켰다. 또한 조선에서는 보도 통제를 뚫고 피해 실정이 전해짐에 따라 ‘사상이 악화’돼 예를 들면 동아일보(1923.11.19.)는 “이 같은 대규모적 참살을 함부로 자행했다는 사실은 그들(일본민족/인용자)이 조선인에 대해 갖고 있던 평소의 선입관이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한가를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고발하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이 사건에 대한 우리의 굳은 기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결의를 보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통치에 대한 잔학성의 표본으로서, 또한 반일제 의식과 사상을 형성하는 하나의 원천으로서 간토 대지진에서의 조선인 학살은 조선인 역사에 계속 살아 숨 쉬게 됐다.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들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들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인 학살이 정책적인 것이었음은 1925년 10월의 오타루 고상 사건(小樽高商事件)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 해에 대학과 전문학교에서 군사교련이 시작됐는데, 오타루 고상의 연습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상 상황이 설정됐다. 오타루에 대지진이 일어나 민심이 불안해지고 있었는데 이때에 “무정부주의자 무리는 불량한 조선인을 선동하고,… 오타루 공원에서 삿포로(札幌”) 및 오타루를 전멸시키려고 획책하고 있음을 알게 된 오타루 재향군인단은 곧바로 분기해 이들과 격투를 벌여 동쪽으로 격퇴 시켰다. 그러나 적은 시오미다이(汐見台) 고지의 천연 요새에 자리를 잡고 완강하게 반항하며 피와 살이 튀고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 산을 벌겋게 적시면서도 맹렬한 기세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으므로 진격은 잠시 그 기세를 잃었다”, “오타루 고상 학생부대의 임무는 재향군인단과 협력하여 적을 전멸시키는 것”이었다. 이 가상 상황이 알려지자 오타루 항에서 하역 인부로 일하고 있던 약 30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분기하고, 이어 평의회계의 일본인 노동자가 이에 호응했다. 그리고 이 내용을 담은 급보가 도쿄의 ‘학생연합회’로 날아들고 여기에 전국적인 군사교육 반대 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학련(學連)은 문부성에 보낸 항의에서 “앞으로 전국의 무산계급 및 조선 동포에 대해 이 같은 불온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이 오타루 고상사건은 정부가 “조선인과 무산계급을 가상적의 적으로 의심하고 있다”(오야마 이쿠오)는 것을 은연중에 폭로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는 여차하면 조선인의 폭동데모를 유포시켜 관헌과 민중을 이용, 조선인 학살을 수행할 태세로 일관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이러한 정치적 환경 아래서 살아가야 했다.



●노동과 생활에서의 차별

이러한 박해 상황을 알면서도 조선인의 도항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오히려 늘어날 뿐이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수탈은 그만큼 가혹했던 것이다.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왔으나 일본에서도 조선인의 노동과 생활에 가해지는 민족차별의 벽은 두텁고도 높았다. 그렇다면 재일조선인의 노동과 생활은 어떠하였을까?

재일조선인은 자기의 노동력에만 의지해서 살아가야 했고 항상 불리한 취직 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첫째, “직공 채용, 단 조선인과 류큐인(琉球人)은 사절”이란 벽보가 붙을 만큼 대기업은 물론 마을의 공장조차도 취직에서 조선인을 차별하였다. 당국에서 조차 “조선인 개개인이 희망하는 직업을 구하기는 정말 힘든 일로서 현재의 사회상황을 감안해 보면 조선인임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제아무리 재능과 식견이 일본인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해도 직업 전선에서 제외되는 애달픈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을 정도이다. 둘째, 이미 근대산업의 주요 부분에는 일본인 노동자가 숙련노동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일조선인 노동자는 그 아웃사이더로서 이를 보충하는 위치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최하층의 노동자가 된 것이다.

셋째, 많은 조선인 도항 자는 일본어에 능숙하지 못했고 다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일본 국내의 근대산업에 종사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만큼 취직문은 좁았다. 이리하여 재일조선인은 항상 실업문제로 고통을 받는 한편, 취업을 한다해도 기술을 요하지 않는 육체노동 부문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최하층의 노동자가 된 것이다.

1934년 취업별 조사기록을 보면, 노동자 48%, 무직 35%, 학생 7%, 상업 5% 등으로 되어 있고, 특히 노동자 직종별 조사에서는 토목노동자 33%, 직공 33%, 일반 사용인 10% 등으로 돼있다. 여기서 말하는 토목 노동자란 일용직 노동자이고, 직공이라 해도 잡업부가 많다. 다시 말해 재일조선인의 직업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는 실업이 많고, 둘째는 토목노동자와 광부, 잡역부 등 최하층의 육체노동에 집중되어 있으며, 셋째는 심부름꾼이나 변소치기, 넝마주의, 고물상 등 도시 영세민적 직업이 많다. 이 같은 상황은 중일전쟁 이후 일본 노동력이 부족해진 시기에 다소 변동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광산 등의 중노동을 요하는 부문으로 집중되고, 제조공업 부문으로는 거의 진출하지 못했다.

이러한 취직 차별에다 민족별 차별임금이 언제나 상존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보통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은 직종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일본인 노동자의 5~7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표 4).

이러한 격차는 오사카 등의 대도시보다 지방으로 내려감에 따라 더욱 커졌다고 한다. 이와 같은 민족별 차별임금은 다음과 같은 근거로 강요됐다.

이는 일본 독점자본이 식민지 노동자를 사용하여 보다 큰 초과 이윤을 얻기 위한 것이고, 동시에 일본인 노동자의 임금 수준을 세계적으로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것으로 일본인의 민족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민족적 대립을 조장하고자 한 것이었다.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것 외에는 살아갈 방법이 없는 재일조선인은 취직 차별과 임금 차별까지 강요당했기 때문에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생활 수준은 “돼지우리 같은 집에 살면서 초라한 식사를 하고 누더기나 걸치는” 일본 극빈층의 수준밖에 될 수 없었던 것이다.

1932년의 구호법에 따른 ‘생활보조 급여액 한도’는 4인 가족을 기준으로 55엔이었으나, 당시 교토 부(京都府)의 조사에 의하면 7422세대 중 30엔 이하의 수입자가 2647세대(35.6%), 45엔 이하가 5234세대(70.5%)였다. 평균 세대수가 3.57명이었기 때문에 7할이나 되는 조선인 세대가 정부가 인정하는 최저생활비를 훨씬 밑도는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수입은 거의 집세와 식비로 충당되었기 때문에(수입의 3/4를 점한다) 옷이나 교육, 문화비를 쓸 여유가 없었다. 식사도 ‘밥과 소금과 푸성귀’뿐이었다.

외국에서 낮은 수입과 민족차별이라는 조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집단을 지어 소위 조선인 부락을 형성해야 했다. 그 부락도 마을에서 떨어져 있거나 저습지 등 생활 조건이 열악한 곳 이외의 곳에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호당 평균 8명이 넘는 밀집 상태였다. 필연적으로 환경은 비위생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조선민족의 독단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한다는 면에서 효과가 있었다.

이상과 같은 재일조선인에게 강요된 민적 차별적인 노동과 생활 형태는 재일조선인, 특히 그 청소년들로부터 살아갈 희망을 빼앗고 난폭한 행동을 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이러한 여러 사실들을 그저 현상적으로만 파악하여 더욱더 조선인 차별관을 조장해 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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