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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협화사업 이데올로기적 핵심은 ‘외지동포 내지동화’
13. 협화사업 이데올로기적 핵심은 ‘외지동포 내지동화’
  • 박장미
  • 승인 2019.08.25 1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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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호
이충호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협화사업’의 방법

‘황민의식’의 주입과 ‘일본식 예의범절’의 강요는 ‘협화사업’의 주요한 요점으로 자리 잡았다. 원래 협화사업의 실시 요강은 ‘황민정신의 함양’, ‘교풍교화(矯風敎化)’, ‘복지증진’, ‘보호구제’의 네 가지로 나눠 있었지만, 각 부현 협회회의 사업보고를 보면, 실제로는 앞의 두 가지로 한정되고 경제생활의 향상과 관련된 측면은 거의 방기 됐다. 이러한 의미에서 협화 사업은 재일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협화회는 통제기관이라는 강점을 활용해 교하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움직인 것이다. 이러한 ‘내지동화’를 추진할 때 주의할 점으로 든 것은 △전국이 동일 방침아래 동일화가 보조를 맞추고 △여러 기관, 여러 부문에 의해 ‘연락적·종합적으로 실시’하고 △동화는 ‘신속하게, 느긋하게, 성의를 갖고’ 실행한다는 세 가지였다. 특히 세 번째는 ‘협화 3훈’으로 표어화 됐다. ‘협화사업연감’에는 1940년 4월부터 다음 1941년 3월까지 부현(府縣)·지부의 사업이 기록돼 있는데, 이를 통해 ‘교화=동화’의 구체적인 시도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협화’의 중심적 지주인 ‘황민정신의 함양’을 추진하기 위해 실제로 어떤 활동이 이뤄졌는가를 보자. 활동은 크게 세 종류로 조직됐다. △신사참배와 감실(神棚) 봉제(奉齊)의 장려 △근로봉사 활동 △헌금·헌납운동 이것들은 모두 그 결과를 수량화시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외면적인 실적을 보고 ‘황민화’ 정도를 쟀다.

그 중에서도 ‘감실 봉제’는 내지 동화의 3대 조건 중 하나로서 중시됐다. 다른 활동은 자신이 밖으로 나가서 행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조선인의 가정 안으로 끊임없이 ‘천황’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1940년의 창씨개명을 계기로 감실 봉제 운동을 개시하고, 창씨를 신청하면서 동시에 봉제를 장려 실행’하도록 한(지바현) 부현이 대부분이고, 강습회나 호별 방문을 통해 이를 보급, 아니 오히려 강요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때로는 현신직회(縣神職會)와 손을 잡고 추진 하는 경우도 있었다(효고현). 그러나 보도원(補導員)이나 간사 및 지식 계급 사이에서는 대부분 봉제가 실시됐지만, 아직 노동자 계급은 철저하지 못하다(아이치현)는 것이 1941년 일본 각지의 재일조선인에게 공통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더 한층 적극적인 지도가 필요해지고, 감실의 구입경비를 보조해 주는 현(도야마현)도 나타났다. 동화 즉, 경신관념(敬神觀念)의 보급이라는 단순한 발상은 재일조선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조선이나 대만에서도 이전부터 시도된 것이었다.

이 밖에 신사참배를 통해 ‘황군의 무운장구’를 기원케 하고, 근로봉사(군인 유가족, 공공사업, 군부 작업 등 노력 봉사)에 강제로 동원했으며, 헌금·헌납운동으로 군비보강의 일단을 담당하게 했듯이, ‘황민정신의 함양’이라는 미명 하에 재일조선인을 전쟁에 직접 협력하도록 조직해 나갔다. 이때 소위 ‘일본식 창씨개명’이 이상과 같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동화 강요와 연결되어 전국적으로 강행되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또 하나의 지주인 ‘교풍 교화’, 즉 ‘일본식 예의범절’의 전파 사업에서는 △일본어 강습 △일본 옷 착용 △단체훈련(교련) △이입(移入) 노동자 훈련 △위생사상보급 △납세 촉진에 열중했다. 특히 강제 연행된 노동자와 가정주부에게 역점을 뒀다. 당시 남자 취업자는 어느 정도 동화가 추진돼 있었고, 아이들의 동화는 학교 교육에 위임하는 것으로 충분했으므로 동화가 가장 뒤떨어진 부분에 힘을 쏟았던 것이다. 강제 연행된 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된 ‘협화사업’의 실상은 박경식의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것은 기업의 감독자에게 위임됐고, 실체는 동화보다는 노동력 착취에 집중됐다. 여기에서는 이렇게 동떨어진 부분이 아니라 일반 사회에 혼재되어 있었던 조선인의 경우에 대해서 기술하겠다

그런데 이 ‘교풍교화’의 측면에서 곧바로 눈에 띄는 것은 지부 단위의 강습회가 연쇄적인 집회처럼 계속 개최되고 있는 점이다. ‘일반 교화 훈련 강습회’, ‘일본어 강습회’, ‘일본 옷·평상복 재봉 강습회’로 나누어진 여러 집회가 각지에서 열리고, 훈화 내용은 시국 인식에서부터 저축, 쌀 절약, 심지어는 막걸리 밀조 방지에까지 미쳤다. 일본어나 예법 강습, 한복 착용을 막기 위한 일본 옷 재봉 강습, 혹은 대용식 요리 강습 등 조선의 부인 층을 대상으로 특별히 마련된 모임이 특히 두드러진다. 딱 잘라 말한다면 남자 청·장년층에게는 교련을, 부인층에게는 학습을 통해 동화를 이룩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교련이나 강습회의 강사는 학교 교사, 특고계나 내선계 경찰관, 재향군인이 주로 담당했다.

협화사업에서는 왜 이처럼 부인층의 ‘동화’에 힘을 쏟은 것일까. 부인 층이야말로 조선의 민족적 특성을 완강하게 고수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선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한복을 착용한다. 따라서 가정생활에서는 조선식이 보존되고 있었고, 이는 일본 정부의 눈으로 보면, ‘내지 융화’의 암적인 존재로 비쳤다. 이를 고쳐 동화시키는 방법으로서 일본어 강습 외에 ‘일본 옷’을 강제로 착용케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어 강요 문제부터 살펴보자. 어느 지방에서나 공통적인 것은 언어의 차이는 황국 신민들 간의 의사소통을 막고, 일본정신을 파악하는 데도 지장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는 점이었다. 청장년 남자의 경우는 직장 등을 다니면서 비교적 빨리 언어를 익히고, 그중에는 일본인과 거의 다름없이 일본어를 구사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노인과 부인 층은 가정에 있으면서 일본어를 몰라도 불편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 익히지 못한 자가 많으며, 이는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없는 상황(아이치 현)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 부현이 취한 가정 전형적인 대책은 ‘중앙협화회’가 편집한 ‘협화 국어독본’을 주교재로 삼아 강습회나 야학을 개설하는 것이었다. 이것만으로 불충분하다고 해 반상회나 기타 회원의 회합 등에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고(야마구치, 가나가와, 에히메 현), 가정의 소학생을 통해 일본어 보급에 노력하기도 했다(후쿠오카, 사이타마 현). 특히 부인부에서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물품들을 예로 들어 그 명사와 취급에 필요한 동사, 응용할 경우 등의 언어 사용법, 예의범절 등을 실습하면서 그때 그때에 적절한 언어 사용법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발성을 반복하게 하며, 적어도 하루에 한 단어는 익히도록 한 현(가나가와 현)도 있었고, 보강책을 찾는 부현도 많았다.

이러한 일본어 학습이 얼마나 효과를 거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내지동화의 3대 조건 중 하나’로 책정돼 재일조선인 부인층이 일본어를 습득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이는 1945년 이후의 생활로 이어지는 동화의 측면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형식주의와 상응하는 것인데, ‘내선일체는 복장에서부터!’라는 표어를 만들어 일본 옷 착용을 강요한 것도 협화사업의 한 특징이었다. 극서도 남자의 경우는 거의 일본 옷을 입고 있지만, 여자들은 아직 조선의 관습을 고집해 일본 옷을 입는 경우가 극히 드문 실정(미애 현)이었기 때문에 이는 당연히 부인 층을 겨냥한 것이었다. 부인들의 한복 착용은 관습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 하나 “경제적 이유로 일본 옷을 만들어 입기 곤란한 경우가 많았기”(히로시마 현)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강요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그래도 강요가 선행됐다.

이처럼 강습회를 통한 계몽과 초보적인 일본식 양재법의 교수는 각 부현에서 일제히 실시된 것이고, 협화회지부의 간부 부인들이 솔선수범해 일본 옷을 착용하거나, 회합에 일본 옷을 착용하고 출석하도록 하는 것도 많은 현에서 시도됐다. 이 외에 독특한 방법을 병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한복을 만들어 파는 자에게 전·폐업을 지도하기도 하고(와카야마, 아이치 현), 역으로 계를 조직하여 각 가정이 일본 옷 구입 자금을 마련하도록 하기도 하였는데(기후 현), 요컨대 경제적 측면을 무시하고서는 이 일을 추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협화사업은 일본어 사용과 일본 옷 착용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으면서 재일조선인 부인을 동화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그 슬로건으로 내건 것이 바로 ‘생활쇄신’이었다.

그 한 예로서 오카야마 현에서 이루어진 생활쇄신 강습회 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1. 훈화 : 협화정신에 대하여

2. 실습

1) 국가(國歌) 연습

2) 일상 예의범절

(1) 신사참배 예법 (2) 국기에 대한 예법 (3)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예의범절 (4) 방문객에 대한 예의범절 (5) 식사 예법 (6) 장례 예법 (7) 공중도덕 (8) 기타



부인을 대상으로 한 ‘일본식 예의범절’의 주입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재일조선인 부인 동화작업이 이때만큼 조직적으로 추진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화작업을 추진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조선인 부락이었다. 즉, 부락이 너무 밀집되어 있어서 인조(隣組)를 만들 건 방호단을 만들 건 자기들끼리 인조를 만들고 방호단을 만들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도 자기들끼리만 일을 하게 된다. 따라서 협화의 진행이 늦어져 일이 진척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뿔뿔이 흩어져 살게 하는 방안이 제출됐으나, 이는 일본인 측의 조선에 대한 편견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탄식하고 있다. 그것이야 어찌 됐든 간에 이 조선 부락의 존재가 특히 조선 부인이 민족적 특수성을 유지하는 기반이 된 것은 분명하다.

이것을 단번에 없애려고 하면 하는 그만큼 협화회 측은 동화를 강제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도야마(富山)현의 보고는 그 일단을 보여 준다.

우리 관할하의 다카오카(高岡) 지회에서는 회원의 교풍·교화를 도모하기 위해 성적을 알려주는 카드를 교부했다. 양식은 축제일의 국기 게양, 일본어 학습 정도나 혹은 납세에 대한 성적란을 만들고, 때때로 지회 임원이나 보도원을 통해 각 호를 방문해 이를 점검한 후 그 성적을 지회장이 심사카드에 기입한 후 교부했다. 이는 사업을 수행하는데 도움을 주고 아울러 조선에 일시 귀국하는 증명서를 교부하는 데 참고로 삼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런데 협화사업의 이데올로기적 핵심은 ‘외지 동포의 내지동화’이고, 이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전쟁에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이 순리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므로 이입 노동자, 장정, 부인, 아동과 같은 계층의 차이에 따라 교화의 방법이나 내용에 차이를 두었다고는 해도 ‘내지동화’에 필수적인 여러 요소를 철저히 주입시키려 한 점에서는 공통됐다.

‘내지동화’에 필수적인 여러 요소는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황국신민으로서의 자질을 키우는 일’로, 천황제 사상을 뼛속 깊이까지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둘째, 일본어 숙련과 상용이다. 조선어 회화를 금하고, 일본어를 깨우치지 못하면 벙어리 생활을 해야 하는 고통을 깨닫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을 달성시키는 요점이었다. 중앙협화회에서는 이를 위해 ,협화 국어독본>을 발행했다(1940.11.). 셋째, 생활양식을 철저히 ‘내지화’시키는 것이다. 식사예법, 일상의 예의범절로부터 시작해 일본 옷의 착용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의 전 분야에 걸쳐 조선 풍을 추방하는 시도이다. 넷째, ‘철저한 체력단련’으로서 ‘강인한 체력을 기르는’ 훈련을 통해 규율 정신, 철저한 복종, ‘헌신봉공의 실천력 배양’을 아울러 시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적인 것으로의 전면적 동화’를 토대로 해, 노동자의 경우에는 ‘취로 예비훈련’이나 ‘작업훈련’이 결합 되고 일정한 작업 능력, 나아가 기능이 육성돼 ‘산업 전사’로 되어 간다. ‘장정 연마’의 경우에는 17세로부터 21세까지의 재일조선인 남자를 대상으로 장래 군대에 복무할 경우 필요한 자질을 연마시키고자 일본어 숙련과 군사교련에 노력을 경주했다. 중앙협화회의 ‘장정연성요강(壯丁鍊成要綱)’(1943)에 의하면 기간은 1년, 연마예정 시간은 240시간, 그 내역은 ‘국어(일본어)’ 160시간, ‘체력단련’ 40시간, ‘도덕’ 25시간, ‘산수’ 15시간으로 돼 있다.

다시 말해서 협화회는 교화기관의 가능에다가 훈련기관적 기능을 겸했고, 전쟁의 심화와 함께 이러한 방식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회를 발족하자마자 일찍이 강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의 훈련을 담당하고 이를 위한 지시·입문서 작성·강습 등을 추진해 온 협화회는 징병제 실시와 함께 여기에 대비해 ‘장정 연마’를 비롯해 재일조선인 청장년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여러 능력을 키우는 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이다. 후쿠오카현의 협화회 주사의 이야기에 의하면, 태평양전쟁 중에 협화회 사업은 첫째, 징병 준비교육과 둘째, 노무자 지도에 중점을 두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반도 동포로 하여금 황국의 방패로서 유감없이 그 본분을 온전히 수행하는 자세를 완성시키고, △전쟁 완수를 위한 산업 전사로서 생산 증강에 일로 매진할 소질을 완성시킨다. 이는 황국신민, 즉 진정한 일본인 의식에 투철하도록 하는 것이고, 또한 현 대동아전쟁의 의의와 전국(戰局)을 분명히 파악, 인식케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중일전쟁으로부터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본 정부의 재일조선인 정책은 협화사업이라는 방식을 취하며 성립했고, 협화회 조직은 통제‧교화기관으로서 재일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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