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록 우송대 교수
[동양일보]몇 년 전 박찬욱 감독의 문제작 ‘아가씨’라는 영화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주로 여성 동성애와 더불어 여배우들의 노출 수준, 사디즘 등이 화제가 되었고 필자는 여성들의 여성 동성애에 대한 반향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필자의 기대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여성들이 여성 동성애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에 주목하고 여성들이 성정체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는 개인적인 판단을 내린 기억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배우 조진웅이 맡았던 변태, 사디스트인 코우즈키라는 배역에 관심이 있었다. 일본에 아부하고 협작하여 얻은 권력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고문하고 살해하기까지 하는 변태적 폭력성에 세평은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필자는 그런 왜곡된 정신과 폭력성의 이유에 관심이 있었다. 영화 속 코우즈키의 왜곡된 정신은 강박증과 도착증으로 축약할 수 있고 이 정신의 왜곡과 폭력성은 조선의 역관이 시대 흐름에 영합해 일본이 코우즈키 백작이 되는 과정 속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강박증의 원인은 무능한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모든 의미, 상징화의 기원인 아버지의 존재가 흐릿한 데서 불안이 시작되고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강박증자는 강박적 질서와 의심에 기대게 된다. 코우즈키가 되기 이전에 조선 역관에게 무기력한 아버지보다도 더 무기력한 아버지의 상징은 망국이 되어가는 조선이었을 것이다. 조선을 철저히 부정하고 일인(日人)이 되고자 하는, 전형적인 매국노 코우즈키의 인생 역정에서 강박증자가 탄생하는 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코우즈키는 조선을 배제하고 일본을 동경하는 이유를 ‘조선은 추하나 일본은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은 그저 잔인한 법인데 조선은 무르고 흐리고 둔해서 글렀’(박찬욱, ‘아가씨’, 2016: 1:20'43'')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은 그가 무르고, 흐리고 둔한 조선이라는 몰락한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면 할수록 자신의 욕망의 진실에 이르는 길은 지연되고 멀어진다는 점이다. 신분 세탁에 문화적 배경, 취향과 억양까지 바꾼다고 할지라도 그가 기대하는 ‘완전한 일본인’이 되는 것은 일본인조차 불가능한 일이며 이런 불가능한 목표를 지향하는 것, 또는 그 과정에만 머무는 것이야 말로 욕망충족을 지연하는 강박증자의 전형적 증상이다.
무르고 흐린 조선풍속, 조선어, 조선인과 같은 모든 것들, 즉 조선에 대한 존재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선택하고 일체화하려는 대상이 일본이다. 그냥 일본이 아니고 전체주의 일본이다. 전체주의는 국민을 도착적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국민은 국가라는 질서와 명령에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 명령이 부당한 죽음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목숨을 기꺼이 제공해야 하는 비인격적이고 폭력적인 구조이다. 국가가 모든 의미의 기원이 되는 구조이다.
코우즈키라는 괴물이 탄생하는 과정은 조선의 몰락의 불안으로부터 탈출해 전체주의 일본을 도착적으로 일체화하려는 한 인간의 실존적 변이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의 이슈는 이보다 덜 극적인 것이다. 더 지엽적이고 가치판단의 문제로 순화해서 볼 수도 있다. 다만 한국에 대한 존재론적 불안과 그럼으로써 선택하게 된 차선의 정신, 문화적 선택이 일본이라는 형식적 유사성을 몇 년 전의 영화와 매우 인상적인 인물에서 떠올리는 것이 단지 필자만의 상념일 뿐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