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동양일보]●혼합교육과 분리교육

일본에서 취학하는 재일조선인 자녀는 일본인 소학교에서 일본인 자녀와 함께 공부하며, 천황제 교육을 받았다. ‘일본제국 신민’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혼합교육이 광복 이전에는 기본적인 교육 형태였다. 따라서 재일조선인이 민족학교를 만드는 것은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

민족학교는 말하자면 분리교육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민족교육의 권리 실현이라는 자각적인 수준까지 가지 않았더라도 민족의 주체성을 아이들에게 전수한다는 점에서도 그 설립은 바람직한 일이다. 많은 재일조선인 학부모들이 그와 같은 희망을 품고 있어도 이러한 일은 아래로부터의 분리학교 사상은 당시에는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부분적으로라도 가능한 것은 위로부터의 분리교육이었다. 이는 일본의 사회·지방자치제·학교 측에서 차별의식에 기초하여 주진되었다. 광복 이전의 재일조선인 교육에서 다소라도 검토 대상에 오른 것은 일본의 국가·사회 측면에서 본 혼합교육인가 분리교육인가 하는 것이고, 재일조선인의 입장은 무엇 하나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공연한 민족학교 설립이라는 형태는 불가능했다 하더라도, 사숙(私塾)과 같은 형태로 조선인으로서의 교육을 실시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1935년 전후의 체험으로서, 가나자와 현의 가이 시(金澤 嘉市)에서는 당시 자신의 제자였던 조선인 학생이 방과 후 조선어와 조선 역사를 가르치는 글방에 다닌 사례를 보고하고 있다. 요코하마 시 쓰루미(橫浜市 鶴見)에도 그와 같은 사숙이 있었던 듯하다. 가나자와에서는 조선 글방에 다니는 제자의 부모가 “일본은 우리 조선인에게서 조선의 역사도 빼앗고, 일본에 편리한 말만하는 거짓말로 똘똘 뭉쳐 있어요. 조선도 장점이 있는데 말이지요. 이러고서야, 아이들도 끝장이에요.”라고 일본어로 중얼거린 것을 전하고 있다. 가나자와가 이 말에 포함된 교육적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패전 후 일본인이 자신들의 민족교육을 상실한 후의 일이다. 어쨌든 이러한 민족의 역사에 뿌리박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교육적 관심이, 이와 같은 조선인 지식인을 교사로 하는 사숙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이 민족교육의 흐름은 일본인 눈에는 은폐되어 있고, 거의 발굴되지 않고 있다.

앞의 이야기를 이어서 좀 더 서술해 본다면, 일본학교는 오히려 이러한 부모의 뜻을 배반하고 민족에게 등을 돌리게 하고 ‘이이들을 끝장내는’ 교육에 주력하였다. 오임준(吳林俊)은 그것을 통절하게 체험하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함께 일본에 건너온 오임준은 일본의 학교교육을 받고, 19세에 징병검사에 합격, 입대 준비를 한다. 그 때 모친이 흐느껴 울면서 그를, 아니 그보다는 그를 그렇게 만든 일본의 교육을 비난했다.

아이고, 이 바보자식, 이 불효자식, 뭐, 응, 도대체 뭣 때문에 군대 따위에 가려는 거냐, … 너는 완전히 속았단 말이다. 아아, 너를 일본학교에 넣은 것이 잘못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조선어를 가르치는 야학에 보낼 것을, 하필이면 왜놈 군대에 들어갈 게 뭐냐? 군대, 징용에 끌려가기 전에 도망친 조선인도 있는데…, 이놈의 자식, 이놈의 자식…

밖으로부터의 교육이 조선에서 자란 부모와 일본에서 자란 아이들 사이를 갈라놓는 깊은 골을 만들었고, 부모가 희망하는 교육의 형태 또한 여기에서 표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분리교육 시도

일본의 학교교육은 재일조선인 자녀로 하여금 조선인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외적으로 묵살하고 내면적으로 박탈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 기본적인 형태가 혼합교육이었다. 그와 동시에 조선인 자녀들을 집단적으로 떠맡은 지역과 학교에서는 끊임없이 분리교육에 대한 제안이 나왔고, 때로는 실제로 실행에 옮겨지기도 했다. 여기에서 분리교육에 대한 제안이 나왔고, 때로는 실제로 실행에 옮겨지기도 했다. 여기에서 분리교육의 시도란, 조선인 학생만으로 채워진 학급이나 학교를 설치하여 거기에서 일본인화 교육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권리를 존중하려 한 것은 아니라, 그저 ‘민도(民度)’에 맞추어 동화시키고자 하는 발상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는 재일조선인 자녀의 동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과도기’적인 교육 형태로, 전쟁(태평양전쟁) 전의 하나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의 분리교육은 오사카, 효고, 후쿠오카, 야마구치, 홋카이도 등 재일조선인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학교에서 시도 되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으나, 그 밑바닥은 ‘조선인은 귀찮은 존재’라는 의식으로 일관되어 있었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싶다.

분리교육의 첫 시도는 ‘선인(鮮人) 야학교’로서, 다이쇼(大正)말에 오사카(濟美4소학교, 1923.4)와 고베(八雲소학교, 1922.11 ; 御藏소학교, 1923.4)의 공립소학교 특별야학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 야학의 특징은 소학교의 수강과목에 조선어 시간을 첨가하고 있는 것 때문에 조선인 교사를 채용하고 있었다(단, 濟美 4소학교는 조선인 대학생이 무보수로 봉사하였다).

특별히 조선어 시간을 둔 이유는 “조선인이 조선어를 배워서 조선을 아는 것은 필연적인 내지(일본)동화에 이르는 지름길을 걷게 된다는 것도 의미한다”는 당국 측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원래 이 조선인 야학교 자체는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과 조선인을 융합동화시키는 기운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거의 조선어 습득을 목적으로 하거나 혹은 특수 과목을 공부하기 위해’ 취학하였다. 설치자와 취학자의 의도에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조선어를 조선인 교사가 가르치는 공립야학교가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야학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었는가는 지금은 불분명하지만, 3·1운동과 ‘문화정치’로의 전환이라는 조선의 변화를 배경으로 성립하였음을 고려한다면, 늦어도 조선인학교에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한 제3차 교육령(1938)이 발표된 시기에 폐쇄되었을 것이다.

이 조선어 교수는 비록 동화의 지름길로서 시도되었다고 하더라도, 일부야학에서만 행해졌고, 특히 주간의 공립학교로는 전혀 확산되지 않았다.

1925년에 후쿠오카 현 樂市소학교에 조선인 분교[分敎場]가 설치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일본에 이주하는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자, 가정이 가난하거나 또는 학령 연령이 초과되었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학교에서 교육받을 기회를 상실한 상황에 처해 있는 조선인 자녀를 사설 학원[塾]에서 교육하였고,…일본의 언어·습관·풍속 등에 익숙해지면, 본인의 실력을 측정한 후 본교의 해당 학년에 편입시켜 졸업하도록 은전을 베풀고 있다”고 하였듯이, 이는 동화교육의 준비단계로서 자리매김 되었다. 일본인 교사 한 명이 전임으로 이를 담당하였고, 이는 1941년까지 계속되었다.

동화교육의 한 수단으로서 조선인을 분리교육 한다는 발상은 조선인이 밀접해서 사는 지역에서는 격리교육으로 적극화되었다. 시모노세키 시 向山소학교는 1938년에 “아동 수 격증, 연령초과 아동(누증에 의한 학급 질서의 혼란/인용자), 불량아동(학과, 품행 등)이 많고, 소수의 학교로 머물러 있다”고 하는 등의 “현실의 고민”을 들고, 그 대책으로서 다음과 같은 여러 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1) 분리교육 : 조선인 학생만으로 이루어진 학교 설치, (2) 분리 학급 : 조선인 학생만으로 학급 특설, (3) 분산교육 : 소수의 학교에 집중시키지 않고 시내 각 학교로 ‘분산 수용’, (4) 분산 주거안 : 집단부락을 없애고 보호자의 가정을 시내로 분산, (5) 어느 학년까지 분리교육을 실시하고, 그 후 일본학생과 함께 공부하게 한다는 등의 안이 그것으로, 이 중 제(5) 안에서 실시 가능성을 찾아내고 있다. 이 안들은 모두 “과도기의 편법이고, 완전히 일본화 되었을 때에는 처음부터 공학으로 함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격리교육의 요청임에 틀림없었다. 재일조선인은 생활과 교육의 환경 및 수준이 ‘아동과 가정 모두 불량’하기 때문에, 학교의 질서나 일본인 학생의 교육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배제될 때까지는 분리교육을 실시하고 싶다는 노골적인 차별의식이 분리교육안의 현실적인 동기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분리교육의 전형으로서 효고현 무코촌[武庫村: 현 尼崎시]의 간사이(關西) 보통학당을 들 수 있다. 다이쇼 중엽의 무코천 개수공사에 한 조선인이 이 마을의 미 해방 부락에 거주한 이래 무코촌에는 재일조선인이 급증하여 1935년에는 부락 인구 5,816명의 35%, 1938년에는 7,259명 중 46%를 점하였다. 당연히 학령아동도 급증하였으므로 부락 당국은 부락 총 인구의 절반에 이를 것이라는 조선인에 대한 공포감에서 분교를 세워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을 분리하는, 즉 본교에서 배제시키는 체제를 만들었다. 동시에 이를 통해 부락이 부담하는 교육비의 경감(1인당 경비는 일본인 학생의 반 이하)을 도모하였다. 이 분교는 1938년에 형식적으로는 ‘사립 관서보통학당’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39년에는 실질에 맞추어 공립화 되었지만, 교실 4칸의 가건물에 2부제 수업, 깨어진 유리창에 낡은 칠판과 책상, 백묵 하나에 의지하는 교육으로 때웠다. 본교에 비해 너무 초라한 이와 같은 시설 가운데 이루어진 교육이란, 오로지 일본인 교사에 의한 천황제적 동화의 이데올로기 주입이었다. 매일 아침 “황국신민서사”의 낭독과 감실[神棚]예배를 통해 ‘국체관념의 명징’을 권장하고, 조선어 사용의 금지와 ‘일본어 교수에 노력’하고, 조선 병합이 침략이 아닌 그 이유를 설명하는 ‘일본사 교수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분교는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존속되었는데, 이와 같이 일본인 학생과 분리시키고, 값싼 시설로 철저히 동화교육을 실시하는 이른바 이중적 차별에 이르는 것이 바로 분리교육의 귀결점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리교육의 계보는 철저한 동화를 도모했던 지배자에게는 두 가지 의미에서 곤란한 것이었다.

첫째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나누어 차별하는 것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에서 일탈하는 것이었다. 1942년에 현의 교육 간부는 간사이(關西) 보통학당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일본인 학생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또한 자기 학급이 정상적인 발달과정을 거쳐 소기의 목적 당성을 위해서”라는 부차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국민학교 본지에 입각, 개조하여/인용자) 조선인 아동이 같은 폐하의 적자로서 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본래의 생활력을 배양시키고 국민으로서의 힘을 키워주어야만 한다.



둘째로, 실질적인 문제로 일본인과의 차별·격리를 시도함으로써 오히려 재일조선인의 민족적 특성이 유지·보존되고, 이로 인해 철저한 동화가 오히려 차단되기 때문이다. 분리교육 하에서는 재일조선인 학생이 지역과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집단생활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옛 습관에 매달리게 되어 신속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담당 일본인 교사의 실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분리교육의 형태는 개별적·방계적인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리교육이 정책적으로 동화에의 요구와 지역적으로 조선인 배척의 차별의식 사이에서 이루어진 타협적 형태였고, 그러한 의미에서 분리교육의 보급은 국가적 근거가 아니라 사회적 지반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는 결코 경시되어서는 안 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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