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협화교육’의 전개

●협화교육의 성립

혼합교육이든 분리교육이든 재일조선인 학생들이 학교에서 받는 교육 내용은 천황제 교육체제하에서 전국에 걸쳐 일률적으로 제정된 교육과정과 교과서는 일본인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재일조선인 학생들에게도 공통으로 강요되었다. 1941년 당시, 2천여 소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조선인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러했다.

단 쇼와 원년(1926)에는 어디서나 이들을 일본인으로 취급하고 교육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내지 동화’가 그 기조를 이루었으나, 이들의 문제를 사회문제의 측면에서 다루는 일은 있어도 천황제 사상에 의한 교화의 문제로서 파악하는 일은 드물었다. 예를 들면, 오사카부의 재일조선인 교육방침은 “이 곳에 거주하고 있는 태반의 조선인이 교육을 받지 못하여 여러 분야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음은 유감이다. 적당한 방도를 마련하여 취학 적령아동의 의무교육을 철저하게 보급하도록 도모해야 함은 물론… 교육에서는 국민정신 함양 및 생활 태도의 내지화에 도움이 되도록 특별히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교육을 통해 ‘내지 생활’에 동화시키는데 주안점이 주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특히 중일전쟁(1938)에 의해 군부지도의 일본주의‧황국사상이 사회와 교육의 전 분야를 뒤덮게 되자, 교육의 파시즘화는 재일조선인 교육에 적용되는 자각적인 부분에서, “이 아이들의 가슴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것은 일본인이다! 일본의 어린이다! 라는 소위 일본혼의 싹을 이식”하는 것이 ‘교육보국의 실현’이라는 적극적인 과제 의식을 만들어 냈다. 재일조선인 학생을 ‘내지 동화’의 대상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천황제 사상에 의한 교화의 대상으로도 자리매김한 것이다. 시모노세키 무코야마(向山)소학교의 교육방침을 예로 들어 보자.



(1) 중일전쟁에서 일본의 국위, 일본인의 위대한 진충보국(盡忠報國)의 활동 사실을 알리고, 일본인의 참다운 힘을 가르쳐 경모케 하고, 일본 아동임을 다행으로 여기고 감사라는 생각을 키울 것.

(2) 숭고무비(崇高無比)한 일본제국의 정화(精華)를 알리고, 진충애국의 정신을 함양하고, 거사봉공(去私奉公)의 생각을 배양할 것.

(3) 모든 교재, 훈육 등에서 잘못된 민주주의, 사회주의적 사상을 발생시킬 싹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충분히 고려하고, 건전한 국민적 관념을 부여할 것.

(4) 일본 어린이로서의 기쁨과 긍지를 갖게 하고, 동시에 자진해서 좋은 일본 어린이가 되고자 하는 희망을 품게 할 것.



아동 취급 방침

(1) 일시동인으로 평등하게 취급한다.

(2) 황은(皇恩)에 감사하게 하고 의용봉공(義勇奉公)의 실천 지도를 잊지 말 것

-일본 아동으로서의 기쁨과 황은에 대한 감사의 생각은 마땅히 일치시킬 것, 감사에서 봉공으로 발전시키도록-

(3) 엄정한 태도로 임할 것

-사대주의 속에서 자란 민족과 그 자녀에게는 자칫하면 교만‧방종‧불손 등의 폐단이 있어 억압, 통제, 철저한 교정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다. 엄정한 태도로 임하는 것은 올바른 교육의 일면이다.



이처럼 생활의 동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감과 동시에, 이를 위해서도 ‘엄정한 태도로 임하는’ 자세가 특별히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방침을 전국으로 확장하여 전개한 것이 1940, 41년 이후의 ‘협화교육’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협화교육’은 파시즘 단계에 나타난 동화교육이라고 볼 수 있다.

중앙협화회가 설립되고 본격적인 협화사업이 추진된 것은 1939년 단계이지만, 교육분야에서는 초등학교령의 시행(1941)과 황국의 도에 따르는 연성(練成)교육의 고창과 연결되어 ‘협화교육’이 강력히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중앙협화회는 “일본의 여러 학교에 다니는 다수 학생들의 현 상황에 비추어 보건대, 그 지도유액(指導誘掖)은 본 사업의 수행에서는 물론이고, 현재 시국에서 보더라도 긴급한 요무이다”(「설립 취지서」)라고 하여 교육사업을 중시하는 뜻을 나타내고 있지만, 『협화사업 연감』 등을 보는 한 성인들의 동화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는 아이들의 동화에 비해 성인의 동화가 뒤떨어져 있다는 판단이 있었다. 일본어 상용은 물론이고, 예를 들면 국기 게양도 “게양을 담당하는 자의 대부분은 아동들로서 교육을 받은 형제자매가 이 일을 이어받고, 부모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은 상태”에 있는데, 그 원인으로서 “학교교육의 힘이 크다”고 보는 시각은 당시 일반적이었다. 학교의 효용을 평가하고, 당연히 아동을 통해 부모의 동화를 촉진한다는 발상도 확산되었다. ‘협화사업’의 입장에서 보면, 단서가 되는 동화작용의 거점이었다. 그러므로 아동에 관해서는 학교에 일임하는 자세를 취하고, 오히려 중앙협화회의 직접 사업으로는 미취학 아동에 대한 취학 장려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측면에서 ‘황민연성(皇民練成)’이 지배적인 사조로 되고, 천황에 귀일(歸一)하는 사상과 자질의 양성에 주안점이 두어져(학교를 수련장으로 함), 그 방향에서 교육개혁이 추진되었다.

그러자, 이 시점에서 재일조선인 교육을 다시 자리매김할 필요가 생겼다. 이는 문부성의 일이라기보다는 중앙협화회의 일이 되었다. 중앙협화회는 실천가의 체험을 집약하는 방식으로 1941년에 『국민학교에서의 협화교육』을 편집하여 새로운 동향에 대처하는 하나의 지침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때를 경계로 하여 재일조선인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동화교육을 ‘협화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따라서 위의 책자에 의하면, ‘협화교육’의 목표는 재일조선인 자녀의 내부에 ‘일본 혼[大和魂]을 창조’하고 그것을 통해서 ‘내선일체’를 실현하는 데 있다. 머리말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생각건대, 초등학교는 황민연성의 수련장이다. 국체를 위해 살고 국체를 위해 죽는 황국민의 각오와 실천을 가르치는 곳이다. 여기에서 공부하는 전국의 수만 조선인 동포 2세들을 모두 황국 신민으로 단련시키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협화교육을 철저하게 실시하여, 보다 높이 피아일체(彼我一體)의 일본 혼을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모든 것을 포옹하고 동화하여 남김없이 황국정신을 체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국민학교에서의 철저한 협화교육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이고, 영원한 내선일체의 구현이고, 협화사업의 해결책이다” ‘협화교육’이란 이처럼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도되는 동화교육이었던 것이다.

동경한국학교 1990년 신축하기 전의 건물 현관 앞에서 이원경 대한민국 대사와 관계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동경한국학교 1990년 신축하기 전의 건물 현관 앞에서 이원경 대한민국 대사와 관계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〇 ‘협화교육’의 이데올로기

그렇다면 ‘협화교육’은 재일조선인 자녀를 어떤 존재로 파악하고, 어떤 교육을 실시하고자 했던 것일까?

앞에서 『국민학교에서의 협화교육』에는 10명의 초등학교 교사가 쓴 수기가 실려 있다. 그 기록을 정리해 봄으로써 당시의 재일조선인 교육관을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인 교사 사이에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의한 교화라는 외피를 쓰고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사회적 동화하는 견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하의 인용은 모두 위의 책자에 의한 것이다.



재일조선인 자녀에 대한 일본교육의 지배적 사상은 일본인과 구별하지 않는 것 즉, 동화이다. ‘협화교육’하에서 그것은 ‘적자(赤子)’론으로 가장 강조되었다. “반도인도 모두 폐하의 적자로서 하등의 구별 없이 그 거할 바를 얻게 한다”는 것이 기점이고, 따라서 “동화의 근본이념은 황국민으로서의 자각이다”라고 되어 있다. 바꾸어 말하면, “황국의 신민으로서 부끄러움 없는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협화교육’의 목표는 초등학교령에 의해 “내지 동포가 선진 황국민으로서 후진 황국민인 반도 동포를 포용 동화한 명실 공히 참 황국민으로 되게 하고”, “내선일체의 실현을 위한 기초가 튼실하게 세워졌다”고 보는 파악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교육목표에서 재일조선인 자녀는 황민화=동화되어야 할 존재로 파악되었고, 이는 교사들의 자각으로서 강력하게 널리 보급되었다.

이와 같은 ‘적자로서의 동화’론이 또 하나 현장 교사의 ‘동정’론에 의해서도 지지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요컨대 나는 반도 아동, 아니 반도인이 가엾어 보입니다. 불쌍해요, 어떻게든 하루라도 빨리 우리 일본인처럼 행복해졌으면 합니다. 일본인으로서 누리는 우리의 행복을 그대로 그들에게 누리게 하고 싶습니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순한 개인감정에 지배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아니 적극적으로 따스하고 자애스런 눈을 갖고 마음으로부터 이끄는 것”이 필요한 인정 넘치는 교사의 마음가짐도 나와 있고, 또 “우선 교사는 차별감을 뿌리부터 뽑아 없애고, 같은 반 친구들이 깔보는 듯한 태도를 절대로 갖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지도방침도 제시되고 있다. 불쌍한 자를 끌어 올려준다는 ‘동정’론이 ‘적자’론의 이면에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정치 차원에서도 인정 차원에서도, 재일조선인 자녀는 동화되어 구제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황국정신의 면에서나, 생활과 예의범절의 면에서도 일본인 자녀에 비해 재일조선인 자녀가 열등한 존재라고 보는 데에서 역으로 구별하지 않는 것이 교사의 미덕인 것처럼 의식되었다. “결코 차별하지 않고 일본인과 똑같이 취급하고 있다. 학력‧품행‧출석이 좋으면 우등상도 준다”라고 강조하고, 더욱이 이것을 아이들만이 아니라 부모에게도 적용하여 “운동회, 학부형회, 교육후원회, 임원회 등 학교에서 개최하는 것은 구별하지 않고 함께 행하고 있다. 나는 결코 구별하지 않는 방침을 끝까지 견지할 생각이다”고 굳센 의지를 불태운다. ‘일본인과 똑 같이 취급한다’는 것이 차별하지 않는 것의 증거라는 견해는 이 책자에 수기를 실은 10명의 교사 전원이 공통으로 자랑스레 표명하였다.

이처럼 구별하지 않고 황민화 교육을 추진할 수 있는 기초에는 교사의 조선‧조선인관의 변용이 가로 놓여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낙후된 조선관’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두 가지 인식 계통에 의해 초래되었다.

하나는 황국사관이라는 옷을 걸친 역사인식에 의해서이다. 거기에는 조선민족의 역사적 개성을 용인하는 지향은 소거되고 있다. “내선일체는 다른 민족을 동화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과 조선은 예로부터 동조동근(同祖同根)이기 때문에 그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것은 실로 정복과 피정복의 관계가 아니라 천황의 존귀하신 위엄 아래 자연적으로 합체된 것이다” 이와 같은 황국사관에 입각하면, “우리가 반도 사상을 제거하고 우리 일본 정신으로 대체시켜야 한다. 즉 일본 역사에 동화시키는 것이다”라는 교육방침도 전혀 거리낌 없이 내세워지게 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 낙후된 재일조선인이라는 현실 인식에 의해서이다. 그것은 과학적인 사회 인식을 결여한 결과의 산물로, 이러한 현실 인식은 낙후된 조선인이라는 역사 인식을 보강해 주기도 하였다. “국민학교에서, 일본인 아동의 학부형은 보통교육을 수료하여 상당히 높은 문화 수준을 지니고 있는데 비해 조선인의 경우 학력‧생활 정도가 모두 일본인의 문화 수준과는 크게 격차가 난다”고 보는 것이 교사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재일조선인 학생과의 접촉을 통해 얻은 체험을 기초로 한 것인 만큼 뿌리 깊은 것이었다. 이 점은 뒤에 교사의 학생관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이러한 낙후된 조선인관이 바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교사의 원칙을 형성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음을 지적하는 데 그치기로 한다. 그 예로서 두 문장을 들어 보겠다.



“반도 아동은 일반적으로 지능이 양 극단으로 나눠져 있는 듯한데, 특히 우리 학교에서는 지능이 매우 낮은 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는 언어의 차이와 학부모의 교양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우리는 이들 아동을 지도할 때 절대적으로 차별을 배제하고 있습니다”라고 한 교사가 말치레를 하자, 다른 교사는 “원래 아동의 소질이나, 혹은 가정 사정 때문에 학업성적의 향상 등을 기대하기 어려운 아동도 있지만, 틀림없이 좋은 일본 국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들 한 명 한 명을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메마른 그들의 마음에도 이윽고 인간미 넘치는 싹이 자라나기만을 염원하며 그날의 교육 지도에 힘쓰고 있지요”라며 ‘자애’를 피력하였다. 재일조선인을 열등한 존재로 보고, 거기에 동정을 보내는 태도로 보인다.



〇 교육은 동화의 첨병

‘협화교육’의 이데올로기는 재일조선인도 일본제국의 신민이라는 파악을 기초로 하여 이 ‘제2급 신민’을 ‘일본’과 나란한 수준으로 끝어올리는 것을 과제로 삼고, 그것은 위로부터는 천황제 사상으로 분장하고 아래로부터는 ‘동정’론으로 뒷받침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협화교육’은 스스로 전체 ‘협화사업’ 안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한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재일조선인을 동화시키는 첨병 역할을 기대했다고 할 수 있다. 아동의 피동화 가소성(可塑性)이 높다는 점을 토대로, 아동을 깊이 동화시킴과 동시에 아동을 이용하여 부모의 동화를 촉진하려하였다. 선행한 아동의 동화를 이용하여 부모의 동화를 심화시킨다는 이러한 방식에서, 전쟁 전의 동화정책의 한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아이치 현의 한 교장은 학교 밖에서 재일조선인과의 접촉한 경험을 삽화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먼저 중년의 조선인에 대해서는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배운 건 일본어로 해라. 머리 숙여 인사해라 라고 입이 아프게 얘기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며 뼛뼛함을 지적한다. 반면 등교 도중 매일 아침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조선인 여자 아이를 보고는 “이 때부터 학교에 다니는 형과 언니를 그대로 흉내 내기 때문에 언어 문제라면 학교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라며 안도감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조선 사회에서 조선인으로 성장한 후 일본화를 강요받은 부모세대와 일본 사회에서 태어나 일본인과 비슷하게 성장하는 아이들 세대와의 차이, 그리고 후자가 내면으로부터 보다 깊이 동화되는 상황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아이들로부터 이루어지는 동화를 이중적 의미에서 중시하게 한다.

첫째로, 유년시절부터 이루어지는 동화의 결정성이다. 재일조선인이 일찍부터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학교에서는 그 자녀들을 다음과 같이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일본 아이들과 모두 동일하기 때문에 구별이 안 됩니다. 완전히 일체가 되어 있어서, 직원들과 아동들도 무의식적으로 일상 학교생활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학교에서는 내선일체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생각됩니다.” 1935년대에는 일찍이 아동 세대에서 이러한 현상이 생겨났다. 이 아동의 가소성에 주목하여 의도적으로 추진한 것이 ‘협화교육’이고, 그것의 의의에 대해서는 이렇게 논하고 있다.

이번에 황국신민이 동화될 가능성이 큰 소년시절에 반도 동포가 확실한 연성 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졌다. 철은 뜨거울 때 달련되어야 한다. 반도 동포의 황국신민화도 소년시절의 초등 기초적 연성 교육에 기대고서야 비로소 그 성과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유년기부터 동화시켜 나가는 것이 재일조선인에게 평생의 동화·인격을 좌우하게 된다는 전망이 세워졌던 것이다.

둘째로, 바로 그 때문에 이번에는 이 아이들을 통해 부모를 동화시키는 공작에 착안하고, 그 유효성을 설파하였다. 예를 들면, ‘일본 옷’ 장려의 면에서도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중년 부인과 학교를 졸업한 딸이 함께 일본 옷을 착용하고 일본어를 습득하는 것이 협화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라고 하는 관점에서, 아이들을 통해 가정 내에 일본어와 천황제 사상을 주입시킨 것이다. “아동을 통해 반도인의 일본화를 급속히 꾀한다”는 방법은 가정, 특히 어머니의 조선식 생활을 배제하는 시도와 병행해서 활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적어도 열렬한 ‘협화교육’의 담당자들 사이에서는 “순진무구한 아동을 교육하는 것이야말로 협화사업의 가장 중핵이 되고 효과적이며, 또한 근본적이고 영원성이 있는 해결방법이다. 교사는 여러 문제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우국열애(憂國熱愛)로써 여기에 임할 때 저절로 교육 방도가 생겨난다”는 견해가 성립하였다. 아동으로부터 시작하여 동화시켜 나간다는 의도적·정책적인 관점이 일본인 교사의 공적인 사상으로 정착한 것이다. 이것은 자각의 깊이에서 차이는 있다 해도 조선인 자녀를 담당하고 있는 전국 2천여 초등학교 교사에게 공통된 사상이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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