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이충호 박사

 

[동양일보]Ⅳ. 인간 해체의 진행



1. 동화교육의 반교육적 영향



●볼 수 없는 세계

천황제 국가와 사회는 재일조선인에게는 동화체제 바로 그 자체였다. 조선인으로서 살아갈 방도를 억누르고, “일본화”하도록 처음에는 사회적 압력을 통해, 후에는 국가의 정책으로서 강제하였다. 그 토대 하에서 재일조선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동화교육을 추진하고, 이것이 공인된 재일조선인 학생을 일본의 교육체제 안으로 끌어넣어 ‘구별하지 않고’ 일본인으로 교육시킨다는 것이었다.

다른 한 편, 일본 국민 사이에서 재일조선인 동화 문제에 대한 비판적 관심은 전쟁 전의 경우 거의 생겨나지 않았다. 그것은 천황제 사상의 침투 정도와 반비례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 문제에 비판의 눈을 집중시킨 자도 그 시선을 재일조선 문제에까지 돌리는 경우는 적었다. 식민지 통치에 대한 비판사상의 계보는 그 모양은 갖추었다 해도 그 일환으로서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축적하는 것은 극히 부족했다. 그 때문에 당연히 천황제 혹은 제국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 안에서도, 재일조선인의 삶과 관련되는 여러 모순을 통찰할 필요성이나 시점, 역량이 형성되지 않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국가 측이 치안상의 필요 때문에 많은 정보를 집적하고 있었다.

교육분야에서도 그 사태는 똑같았다. 반체제적인 교육 사상이나 운동에서도 재일조선인 교육문제는 관심 밖이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일본인 교사는 천황제 아래서 의문 제기를 금지 당한 채 동화교육의 제도와 사상을 수용하고 실천하여 이윽고는 이를 체질화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재일조선인 학생의 내면을 통찰할 수 있는 시점이나 시력은 마비되어 버렸다. 더 나아가 재일조선인 학생에게 민족의식을 제거하고, 민족적 형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최악의 마이너스 교육을 수행하면서 이를 최선의 바른 교육이라고 평가하는 그릇된 교육관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아시아와 교육에 관한 천황제 교육 이데올로기의 정착임에 틀림없다. 이리하여 동화교육이 재일조선인 학생의 내면에 무엇을 초래 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일본인 교사는 그 진실을 답할 역량을 상실해 버렸다. 결국 일본인 교사는 동화교육에 대한 비판정신을 갖지 못한 채 전쟁 전의 교육상황을 끝낸 것이다.

사회와 교육의 동화체제에 휩쓸린 일본인과 일본인 교사가 재일조선인 교육의 진상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볼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었던 자, 즉 재일조선인 학생의 피교육 체험을 자기의 형성사(形成史)와 관련시켜 언급한 재일조선인의 책자와 증언이 최근에 몇 점 공개되었다. 여기에서는 동화교육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세계가 조선인의 시점에서 고발되고 있다. 교육은 인간 해체의 역기능도 발휘하는데,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측에서 제기되고 있다. 지금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세계를 여기에서 뽑아내어 그 비판의 소리 속에서 다시 배우는 것이다.



●일본식 이름과 인간 형성

본 장의 제목으로 ‘인간 해체’라는 말을 썼는데, 동화교육이 재일조선인 학생에게 부여한 반교육적 영향을 총괄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로서 사용하였다. 이는 김달수가 채택한 표현인데, 전쟁 전에서 전쟁 후로 이어지는 동화교육에 대해 재일조선인 측이 내린 평가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인간 해체’라는 혹독한 평가를 어떤 의미에서 사용해야하는지 김달수의 의견을 들어보자.

재일조선인의 동화에 대해 일본 지배자는 이중의 과오를 범하고 있으며, 또한 그러면서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요컨대, “우리는 당연히 황국신민화에 매우 반대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해체하고, 우리 인간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배자 측에서 보면, …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조선인을 이 세상에 더할 나위없는 황국의 신민으로 만들어 주겠다는데, 거기에 무슨 반역 따위를 하겠다니 대체 무슨 말이냐!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대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 이것을 그들은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며 ‘인간 해체’를 추진하고 더욱이 그것이 가진 위험성을 깨닫지 못하는 동화체제의 뿌리 깊음을 김달수는 지적한다.

이 동화체제가 만들어 낸 의식 구조는 지배자만이 아니라 일본 민중에까지 침투하여 이들을 얽어맸다. 교육 현장에서 보이는 태도는 그 예증이다. 재일조선인 동화의 의식은 권력에 의한 정책 차원을 넘어서서 일본의 사회의식에 까지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동화체제하에서 조선인으로서 민족적 토대가 형성되어 있던 세대와 그렇지 못한 채 일본에서 태어났거나 유년기부터 일본에서 자라난 세대는 거기에서 받는 영향의 정도가 결정적으로 다르다. ‘인간 해체’는 후자 세대에서 행해진다. 이를 식별하는 것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교육의 의미 특히 그 범죄성을 고려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관점이다. 이 식별을 필요로 하는 상황은 전쟁 전에 나타나 전쟁 후에 보다 확대되었다. 김달수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에 건너온 조선인은 일본 방방곡곡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고, 도시에도 농촌에도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일본 사회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사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피부색이나 얼굴형이 같기 때문에 성이 김(金)씨라면 가나야마(金山 )라든가 기바라(金原)라는 식으로 애기하는 편이 의사소통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조선인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저항감도 주지 않습니다. 혹 상대방이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후에 조금씩 저놈, 조선인이었구나 하는 식으로 알게 되는 정도이지요. …그러나 성인이 일본에 건너와 일단 조선인으로서의 바탕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것을 갖고 있는 인간이 통칭(通稱)을 만들어 방편상, 생활의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요. 이는 일본의 연기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이 적부터 그러한 일본 이름을 갖고 그런 식으로 인간이 성장하면 당연히 문제가 달라집니다”



‘아이 적부터 일본 이름을 갖고 그런 식으로 인간이 성장한다’는 상황은 1940년 창씨개명이 강제로 실시된 이래 ‘협화회’의 장려도 있고 하여, 이는 재일조선인 자녀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그 일단은 앞에서 소개한 교사의 보고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 이전부터 부모가 일본 이름을 사용하여 유년시절부터 일본 이름을 가진 아이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이 아이들은 가정생활에서는 조선식이 남아 있었다하더라도 그 밖의 놀이터나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며 그 안에서 성장했다. 천황제 하의 동화체제 사회에서는 그 밖의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다. 재일조선인 아동은 조선의 민족적 풍토에서 격리되어 일본 사회에서 일본인으로 길러진 결과, 자기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는 있어도 그 민족의 실질은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조선을 비하하는 마음까지 품게 되었다. 이러한 아동들에게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연기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조선인 육체와 일본인 의식 사이의 모순을 끊임없이 심화시키고, 또한 상기하도록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재일조선인 자녀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인간 해체’의 진행에 대해, 김달수는 ‘민족의식의 알맹이가 빠지고’, ‘조국이라고 하는 알맹이가 없다’는 점을 기본적인 이유로 들면서 ‘거짓 인간’을 만들어 냈다고 설명하였다.



“소위 성인이 민족적 주체성, 즉 뿌리를 가진 인간이 일반인에게 통용되는 이름을 써서 사회생활의 방편으로 삼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일본 이름을 사용하고, 더군다나 친구나 누군가 자기 집 근처에라도 오려고 하면 자기 집이 조선식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일부러 멀리 돌아서 오기도 하고, 친구들이 놀러오고 싶다고 해도 “오지 말라”고 거절하고 자신이 또한 친구들의 집에 가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한 생활 속에서 바로 거짓 인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결국 허구의 인간이라고 해도 좋을 그러한 인간이 생기는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이것으로써 그들이 일본 사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겠지요”



이와 같은 ‘거짓 인간’이 될 것인지 아니면, 조선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지의 아슬아슬한 선을 김달수 자신이 체험하였다. 그는 이 분기점을 회상하며 그 일의 의미가 갖는 중대성을 되씹어 보았다. 1931년경, 사촌의 손에 이끌려 소학교 입학 수속을 했을 때, 사촌이 지금부터 가나야마 주타로(金山忠太郞)라는 이름을 쓰라고 해서 그럴 작정으로 일본인 담임교사를 만났다. 그는 그 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선생님의 책상 앞에 서서, 사촌이 내 이름을 가나야마 주타로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꽤 단호한 어조로 “난 가나야마 주타로가 아니야”, “김달수라는 본명으로 부르는 게 좋아”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해 버리니 사촌이 곧 자기 말을 취소했어요. 그래서는 나는 본명인 김달수로 불리며 소학교 생활을 보내게 되었는데, 후에 생각해 보면 그 때 가나야마 주타로가 되었더라면 아마 나는 상당히 큰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 됩니다. 가나야마 주타로라는 한 거짓 인간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생각 되는데…”



김달수의 경우는 남아 있는 최후의 선을 지켜준 그 일본인 담임선생님에게 지금도 여전히 감사히 생각하였지만, 10세 때까지 조선에서 자란 이 소년에게도 그 후의 일본 생활은 그를 끊임없이 ‘거짓 인간’으로 만들 기회로 가득 차 있었다. 김달수는 스스로의 형성사에 입각하면서 일본에서 태어났거나 일본에서 자란 자신보다 더 젊은 세대의 실상을 보고, 동화체제‧동화교육의 본질을 ‘인간 해체’‧‘거짓 인간’의 생각이라고 총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재일조선인 아이들에게 있어서 반교육 체제가 전쟁 전에 완성되고, 전쟁 이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재일조선인에 의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재일조선인 아이들이 ‘거짓 인간’으로 되어 가는 과정은 다소 순화시켜 말하면 의식면에서는 일본인화 되어 가는 동화의 과정이고, 사회생활의 면에서는 조선인으로서 배제되어 가는 멸시의 과정이다. 말하자면 이중의 차별이 축적되고, 그 인간 형성을 밑바닥에서부터 좀먹어 들어간 것임에 틀림없다. 이와 같은 ‘인간 해체’의 구조는 전쟁 이전이건 이후건 모두 변함이 없었다. 단 전쟁 전의 경우, 재일조선인이 조선인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생활을 계속한 반면 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 해체가 노골적이고 난폭한 형태로 실행되었으며, 전쟁 이후의 사회적 기반을 형태 지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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