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진 청주시 흥덕구 주민복지과 주무관

이혜진 청주시 흥덕구 주민복지과 주무관

[동양일보]나는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 나에게 취미를 물으면 서슴없이 등산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상대방도 산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언제 꼭 한 번 산에 가자고 말한다. 단풍으로 물든 산이든, 나뭇잎이 푸르른 초여름의 산이든, 혹은 흰 눈이 쌓인 산이든 상관없다. 그저 산에 오르는 그 순간이 즐겁기 때문이다. 내가 등산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마도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 덕분일 것이다.

초등학교 3~4학년 무렵, 아버지와 집 근처의 우암산을 매일 올랐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칠순이 넘어 오래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시지만, 30여 년 전의 젊었던 아버지는 어린 나를 데리고 아침마다 산에 올라가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나 또한 어린 나이에 힘들 법도 했으나 워낙 아버지를 잘 따랐기에 아버지와 함께 매일 등산하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산을 올랐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산행은 한라산에 올랐을 때가 아닐까 싶다. 10여 년 전 가을, 혼자 한라산에 올랐을 때는 남한에서 가장 높은 백록담의 모습과 절정의 단풍을 볼 수 있었고, 2년 전 봄에는 영실코스로 올라 백록담과 조화를 이룬 철쭉 군락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의 한라산에 올랐던 것이 가장 잊을 수 없는 등산이 아니었다 싶다.

4년 전 겨울, 백록담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기 위해 혼자가 아닌 반려자와 함께 제주도를 찾았다. 등산로 입구에서 인증샷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해가 쨍쨍 내리쬐는 날씨였지만, 정상까지 1/4 지점을 남겨둔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면서 눈앞이 하얗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사실 눈 오는 날의 등산은 처음이었기에 이대로 산에 올라도 되는 것인지 고민이 됐지만 많은 등산객이 백록담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며 나도 뒤처질 수는 없단 생각에 그들의 뒤를 따라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상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눈보라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거세지고 있었다.

백록담에 도착하기 불과 몇 미터를 남겨놓고 갑자기 강풍이 몰아치면서 다리가 휘청이다가 그만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미 시야로는 하늘과 바닥이 구분되지 않았고,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알 수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곁에서 함께 등산을 하던 남편의 모습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혼자 주저앉아 있던 나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눈보라에 휘몰아쳐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면 어떡하지, 누가 나를 구해줄 수는 있을까, 뉴스에서 나오던 사건사고의 주인공이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잠깐의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도 남편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고, 정상 쪽에서 내려오는 한 등산객이 지금 백록담에 가더라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백록담으로 가는 길이 좋지 않으니 굳이 힘들어 올라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아쉽긴 했지만 남편과의 상의 끝에 하산을 결정했고, 눈 덮인 길을 한참을 내려오며 살아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게 해줬던 그 겨울의 산행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 내가 가보지 못한 무수한 산들이 있다. 앞으로 내가 살아 있는 한, 나의 체력이 버텨내는 한 최대한 많은 산들을 가보고 싶은 게 나의 바람이다. 다시 백록담에 올라 맛있는 김밥과 시원한 사이다를 마시고 있을 나를 상상하며, 다음번 제주도 행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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