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일본인 교사의 영상

재일조선인 학생에게 있어서, 일본 아동이 사회의 대행자 역할을 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교사는 일본국가의 대행자이고, 그 권위를 대표하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교사는 ‘구별 없이’ 일본인으로서의 교양을 재일조선인 학생에게 전수해 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구체적으로 수업 시간이나 생활지도의 측면 등에서는 조선인이라고 깔보면서 ‘구별하는’ 태도를 들어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사는 객관적으로 이중의 민족 차별을 행한 것이다. 재일조선인 학생들의 인상에 남아 있는 것은 주로 이 부분과 관련된 교사의 태도이다.

일본인 교사는 무엇보다도 재일조선인 학생의 생활이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또한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재일조선인 학생의 눈에는 멀리 동떨어진 비정한 존재였을 뿐이다. 송동술(宋東述)은 당시의 고학 체험을 서술한 단문 속에서, 교사가 저만치 떨어져 있는 이질적 존재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14세 때, 당시 일본에서 고학 중이던 작은 형을 연줄로 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도착한 후 바로 형이 살고 있던 우유 가계에서 일을 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우유를 배달하고 나서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유병을 모두 씻어 놓고나 서야 공부하는 생활이었다. …겨울이 되면 손발이 심한 동상으로 부어올라 교실에서 연필을 잡을 수 없을 때조차 종종 있었다. 눈비가 내리는 날은 배달 중에 발을 삐는 바람에 우유병을 깨뜨려 주인으로부터 “이 바보 같은 놈!”이라는 욕설과 함께 주먹세례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학교에서는 당시 모든 재일조선인들이 그러했듯이,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바보 취급을 받았다. 나는 14살 때 체중 52kg, 키는 160cm나 되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조선인은 나 하나뿐이었다. 내 몸은 크다는 이유로 일본인 학생들은 ‘멍청한 조선 뚱보’ ‘조선 키다리’라는 식으로 바보 취급을 하며 괴롭혔다.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때란 수업 시간뿐이었다. 그것이 유일하게 내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수업 중에 제일 뒷자리에 앉아 고향의 부모님을 생각하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곧잘 울곤 하였다. 어느 날 이 장면을 발견한 선생님이 ‘울보놈!’이라며 잡고 흔든 적도 있었다“



재일조선인 학생의 생활을 이해할 턱이 없는 교사는 교실에서 도난사건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조선인 학생에게 의심의 눈길을 돌리기도 하고, 싸움이 벌어질 때는 일의 시비를 묻기보다 먼저 조선인 학생을 꾸짖는 등 차별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특히 성적의 우열로 학생의 인격 전체까지 판단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환경이 나쁘고 성적이 나쁜 경우가 많은 재일조선인 학생은 그만큼 더 불리하였다. 이렇게 해서 다수의 재일조선인은 학생시절에 받은 교사의 차별대우를 체험했고, 그것을 선명하게 기억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몇 가지 기록은 교사가 차별의 눈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조선인 학생을 격리시키려고 조차하였음을 전해 주고 있다. 이는 앞에서 지적한 분리학교 사상과 통하는 것으로, 단 조선인 학생이 소수인 학교에서 보였다. 쇼와(昭和) 초년에 기요미즈 시의 소학생이었던 김양순(金良順)은 격리교육의 체험을 증언하고 있다. 그 중 다음 3가지 체험을 보기로 하자.



먼저 스포츠 만능 소년이었던 김양순은 학교 대표선수로 몇 번이나 대회에 출전했지만, 그 때마다 “선생님으로부터 조선인 이름을 써서는 안 되므로 일본인 보결생의 이름을 대라”는 지시를 받았다. 고시엔(甲子園) 야구 구장에서 홈런을 쳐 표창 받을 때도 “보결생 이름이 불리는 바람에 나는 올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몹시 맞은 일”도 있다. 또, 자리 문제에서도 “일본학생과는 함께 앉지 못했다. 같이 앉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 친구와 앉든가 혹은 혼자만 다른 책상에 앉든가 하였다. 게다가 운동회에서는 “이인삼각 경기를 할 때 일본인 학생과 한 편이 되면, 그는 ‘싫어!’ 하며 도망쳐 버렸다. …기마전 때도 조선인 학생이 4명을 채우면 한 조를 이룰 수 있지만, 한 명이나 두 명이 동급생 가운데서 부족하면 기마전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이러한 격리된 학교생활에서의 취급은 적어도 ‘협화교육’이 일상화되어 갈 즈음에는 표면상으로는 그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구별 없이’ 교육한다는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상황 즉, 학교의 장에서만이 아니라 생활의 장에서도 함께 생활하는 상황이 생기면, 다시 나타났다. 1943, 44년의 학동집단소개(學童集團疏開) 때 그러한 일이 보였다.

소학교 3학년인 고갑성이 신귀산(信貴山) 절로 집단 소개되었을 때, “조선인이나 부모 없는 아이, 오줌싸개 아이들”은 한데 모아 가장 어두운 방에 집어넣고, “목욕도 언제나 가장 나중에 했다.” “선생들도 조선인은 엄격히 다루어 여러 학생들 앞에서 따귀를 때리거나, 밥그릇을 앞에 두고 따로 명령이 내릴 때까지 먹지 못하게 했다.

숙소에 돌아오면 친구들이 ‘너랑 한 방에 있어서 싫다’며 괴롭혀”, 소개소(疏開所)에서 다시 도망쳐 나온 조선인 아이들도 생겼다. 집단 소개라는 공동생활의 장에서 일본인 학생과 똑같이 굶주림의 고통을 견디어 내야했을 뿐 아니라 그기에다가 재일조선인 학생은 민족 차별의 심리적‧육체적 고통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재일조선인의 교육 체험 속에 각인된 일본인 교사의 영상은 일반적으로는 역시 차별교육 체제의 일환으로서 그것과 관련되어 상기되었다. 그것도 ‘일본화’ 교육 그 자체에 대해서라기보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하는 학생지도의 면에서였다.

어린 시절에는 어떠한 방향에서 교육을 받는가 보다도 어떠한 취급을 받았는가 하는 쪽이 매일매일 당면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역으로 동화교육을 시행하면서도 차별을 하지 않는 교사는 성인이 된 지금도 재일조선인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교사도 소수이기는 하나 있었던 것이다.

후에 회고하는 것을 보면, 조선인으로서 취급해 준 경우와 인간으로서 공평하게 대해준 경우가 마음에 남는 교사상으로 남아 있었다. 예를 들면, 다이쇼(大正) 말에 교토 시의 한 소학교에 들어간 정귀문(鄭貴文)은 교장이 “드디어 우리 학교에도 조선인이 입학하게 되었다. 자네는 우리 학교의 조선인 1호야”라고 말해 준 것을 “대단히 기뻤다”고 추억하고 있다.

김달수는 앞서 언급했듯이 그를 본명으로 불러 주기로 한 교사의 추억을 이따금 말하고 있다. 조선인으로 봐 준 것이 그 아이의 삶의 방향, 인격 형성에 하나의 의욕을 심어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은 쇼와(昭和) 10년대에 걸쳐 줄어든 것이 아닐까.

당시에 이것과는 별도로 인간적으로 공정한 태도를 취하고 배려해 주어, 예컨대 동급생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특별 빈곤아동’으로서 보호‧배려하고 격려해 준 교사라든가, 싸움이 나면 우선 조선인 학생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가려서 부당한 일본인 학생을 질책한 교사 등도 인상에 계속 남아 있었다.

어느 경우든 그러한 교사를 만날 기회는 매우 적었기 때문에 역으로 계속 선명하게 인상 지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사들도 동화교육에 의문을 품거나 혹은 재일조선인 문제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점에서는 그들도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저 교사 개개인의 인간적인 심정에 따르는 데 그쳤을 것이다.



●수업의 구조

일본 사회의 일상적인 생활 감각 속에는 아무리 일본어를 잘 구사하더라도 조선인은 어디까지나 조선인이고 일본인과는 엄격히 구별하는 심리가 거의 본능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준별 기능은 외국인으로 구별한다는 대등한 감각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병합’민족과 동일시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경계심이 앞서는 차별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준별 기능은 아이들 세계에서도 관철되었다. 이 외적인 힘을 통해 재일조선인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이 조선인임을 끊임없이 반복 확인하였다.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자신을 어떠한 성격의 조선인으로 인식하게 되었는가하는 문제이다. 천황제 사회에서 조선과 관련된 정보나 지식은 조선 병합을 긍정하는 종류가 지배적이고, 그러한 것이 공인‧보급되었으며, 그것이 일본 사회에서 조선관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대학생 세대와는 달리, 특히 소학생 시절에는 ‘이단’적인 지식과 접할 기회도 없고, 시대의 주류를 이루는 지식에 사로잡혀 이것을 섭취하며 성장해 간다.

교과서의 세계, 이것을 축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아동문화의 세계, 나아가 대중문화의 세계에서 양분을 취하여 지적 형성의 토대가 다져지는 것이다. 거기에는 지배자의 조선관이 관통하고 있고, 일본인 아동만이 아니라 재일조선인 아동도 삼켜버린다.

아이들로서는 그것과 질을 달리하는 지식을 입수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오임준이 회고하듯이, “내가 당시까지 습득한 교양의 어디에도 조선이 빛나고 있었던가? 나의 어린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전집이나 단행본, 신문이나 귀를 통해 체내로 스며들어온 것은 조선은 일본 영토이고, 일본 국적으로 되어 있는 일본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조선이 예속된 모습 안에서 재일조선인 아이들은 자신의 나라 조선을 알았던 것이다.

더욱이 또 하나 문제가 된 것은 일본의 사회와 학교에 섞여서 성장하기 때문에 민족 차별의 인간관계 속에서 그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시키는 분위기를 동반하여 조선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같은 역사나 지리 수업이라 해도 일본의 일부로서 조선을 위치시키고, 그렇게 가르치는 한, 일본인 아동들에게는 조선인에 대한 우월의식을 부추기고, 재일조선인 아이들에게는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비하의식을 심어주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는 아동들 간의 인간관계를 더욱 차별적인 것으로 왜곡시킨다. 이를 체험해 본 김달수는 그 예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예를 들면, 5학년 때에 <국사>라는 과목이 있었다. 제1과가 아마테라스오미카미, 제2과 제3과에는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 신화’가 나온다. 쉬는 시간이 되면 악동들이 ‘야잇! 삼한정벌이다!’하며 내게 덤벼들었다”



김달수는 조선 이름을 버팀대로 삼고 완력으로 상대방에 대항해 나가면서 자신을 방어했지만, 일반적으로 민족차별의 인간관계와 그 지식이 순환적으로 축적되는 틀 속에서만 조선 관련 지식을 배우기 때문에 당사자인 재일조선인 학생들에게 그 지식은 강렬한 감정을 수반하며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의 수업, 특히 조선에 관련된 수업 시간은 재일조선인 학생에게는 조선인으로서의 자기혐오를 지적‧정서적으로 만들어내는 시간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구별 없이’ 일본인으로서 교육하는 동화교육은 조선 예속이라는 교육내용을 담고 있어, 반드시 조선을 멸시하는 가치관을 심어 주고 재일조선인 학생에게 자기 부정을 강요하는 작용이 내포되어 있었다. 오임준의 수업 체험은 이를 고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도요토미히데요시의 노래>는 비교적 오래된 소학 창가로, 지금도 40대 이상의 사람들은 그 멜로디를 기억하고 있다. 일본인 학생들은 이 노래를 소리 높여 합창했으나 재일조선인 학생들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오임준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남은 힘으로/조선을 공격하면/팔도는 순식간에/우리 손에 떨어지고…/ 아아! 다이코 토요토미 히테요시(太閤 豐臣秀吉)/어이, 왜 노래하지 않는거야, 너/왜 입 모아 노래하려 하지 않는 거야/창가 시간에/조선을 공격하면…/조선을 공격하면…/너 학예회에 나갈 수 없을 거야/묵직한 녹록(轆轆)보다 더 무겁게 짓누르는 교실/백묵에서 흘러나오는 우수(憂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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