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천황제와 재일조선인 소년

동화체제의 국가‧사회‧교육은 재일조선인 어른들의 내면적인 민족성의 핵까지는 파괴할 수 없다 해도, 조선에서 떨어져 나와 성장한 아이들에게는 근본적인 영향을 미쳐 그 내면을 일본의 가치체계로 채워넣게 되었다.

“조선인인 내가 일본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金時鍾)고 후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일본인이 되었다고 느끼게’ 만든 이데올로기적 상징이, 천황제로의 귀의라는 심상(心象)의 형성이었다.

조선을 멸망시킨 책임자를 조선인 소년들에게 숭배케 하는, 객관적으로는 그들로 하여금 민족을 배신하는 길을 걷게 한 것이다.

천황에게로의 귀일은 물론 동화교육을 통해 주입된 것이지만, 조선인 부정이라는 현실적인 처사가 이 동화에 대해 스프링 역할을 하였다는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간의 심리적 움직임에 대해서, 오임준은 군대를 지원하게 된 일과 관련하여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미 나는 일본의 5대 정책인 ‘국체명징(國體明澄)’ ‘선만일여(鮮滿一如)’ ‘농공병진(農工竝進)’ ‘교학진작(敎學振作)’ ‘서민쇄신(庶民刷新)’에 의해 완전히 일본인이 되는 것만이 행복해지는 길이 아닌가, 이를 위해서는 폐쇄된 조선인으로서 감수해야만 하는 차별의 세계에서 벗어나 혼연히 여기에 응해 동화하는 것이 많은 동포에게 이익이 되고, 나아가 이 개운찮은 열등감의 응어리를 과감히 제거하게 되리라 생각하고” 천황의 군대에 지원했다고 한다.

조선인을 차별하는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일본화한다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천황제 사상은 이러한 계기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용의 깊이는 패전의 체험 속에 투영되어 나올 것이다.

조선인 소년만 수용한 상애학원(相愛學院)에서 김희로는 천황의 패전 방송을 듣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전쟁에 졌다는 사실이 분했고, 또 울먹이며 방송하고 있는 천황이 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원생들 중에는 나 말고도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패전 후에도 “여기저기서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설쳐댄다거나 야쿠자와 싸움을 벌인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나빴다. 나는 일본인이라는 생각이 그때도 여전히 강했다”고 할 만큼 동화의 정도는 매우 깊었다.

재일조선인 소년은 일본 패전=조선 광복이라고 파악하는 사상과는 전혀 무관한 장소에서 성장하였다. 이로 인한 억울함은 패전 후에 조선인 운동에 접한 소년일 경우 특히 심했다.

이와 관련하여 고사명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도 동원에 의해 공장에 나갔는데, 공장장이 폭력을 휘두르자 전 학생이 도망쳐 돌아왔다. 그 때, 학교 선생님이 “천황폐하께 죄송스럽지 않은가 하는 식으로 말씀하시자, 결국 눈물이 흘러나왔다”고 하며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천황폐하께 죄송스럽다는 이유로 선생님께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던 그런 조선인이, 이제부터 조선인의 성품을 되찾아야한다는 사실은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억울하였다.” 다른 출구가 없는 곳에서 성장한 재일조선인 소년은 천황을 사상적 정점으로 하는 일본의 가치의식이 온 몸에 베어 있었다. 그 결과 김시종의 증언을 인용하면, “나는 전쟁이 끝난 그 순간 모든 것이 텅 빈 듯하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조선인이 내가 전쟁이 끝난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며칠이나 멍하니 보냈다”고 하는 의식의 혼란에 빠졌던 것이다.

동화체제는 재일조선인 소년에게 천황을 향한 충성의 눈물과 조선의 어머니에 대한 배신을 초래한 채, 패전으로 그 제도가 붕괴됨과 동시에 무책임하게도 혼란에 빠진 재일조선인 소년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국가제도로서의 동화체제는 붕괴했다고 해도,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는 재일조선인 소년의 내면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었다. 오히려 그 결과에 어떻게 자신이 대적해 나갈 것인가, 이것을 최대의 과제로서 물려받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광복 후 재일조선인 측에게는 동화체제의 뒷마무리야말로 피할 수 없는 숙제가 된다.

이때 재일조선인 소년에게는 두 가지 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김시종은 스스로 김희로와 비교하면서 그 두 길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일본인답게 만드는 것이 자신을 소생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지만,” “나는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나 자신이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에 의해 조선인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대단히 고통스운 체험이었기 때문에, 내 온몸으로 스며져 있는 일본을 어떻게 밀쳐낼 것인가에 모든 힘을 집중하였다.”

일본인으로서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조선인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택할 것인가?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어느 쪽을 택하는가는 아이들의 선택에 의한다기보다는 부모의 삶의 방식에 의해 결정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일어난 재일조선인 운동과의 관계 정도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다. 어느 쪽이든 일본 국가는 재일조선인 소년들을 유린하고는 내버려둔 채로 도주해 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본질이 이미 일본에 동화된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진정한 조선인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것일까? 국가에 의해 주입된 이데올로기란 그 잘못을 깨달음으로써, 시간을 들이면 극복해 내고 다른 사상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경우는 억울하다는 집념을 지속시키면서도 추방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언어적 동화를 시발점으로 하는 문화적‧사회적 동화에 의해, 성장과 생활 속에 스며든 일본적인 감성‧인식‧가치관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동화체제는 이데올로기의 주입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민족적 존재로서의 어떤 인간을 돌이킬 수 없는 비민족적인 존재로 변형시켜버렸다. 돌이킬 수 없다고 하는 의미에 대해,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증인을 들어보자.

김시종이 자신의 성장사를 총괄한 것을 통해 이를 기록해 두고자 한다. 앞서 기록한 바와 같이, 광복 후 김시종의 삶의 방식은 일본인화된 자신을 조선인으로 되돌리는 데 집중되었지만, 그 본질적인 한계를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후 피눈물 나는 각오로 우리말을 대강 익혔다. 그런데도 지금 여전히 일본어로 시를 쓰고 있는 것은 나의 경우 아무래도 내 자신의 의식 밑바닥을 형성해 버린 일본이라는 존재를 빼고는 지금의 자신을 도저히 성립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라는 것에서 빠져나오지 않고서는 내 자신의 조선을 만날 수 없으며, 나 같은 사람은 이미 나면서부터 그렇게 만들어져 버린 인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을 아무리 잘 할 수 있게 된다 해도 내가 완전히 조선인으로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본에서는 매일 매일 조선인이 되는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확실히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은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만들었고, 재일조선인 운동의 성립과 발전은 이를 추진하는 주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심각한 과제를 창출하고 그것을 재일조선인에게 덮어씌워 버린 일본의 국가와 사회는 패전이 되었다고 해도 그 문제의 중대성과 책임에 대한 감각은 마비되어 있으며, 아니 오히려 상실된 채 그대로 남아 있다.



◇도움 준 이들

●김희로(金禧老 1928.11.20.~2010.3.26.)

본 아버지의 성으로 권희로(權禧老) 개칭, 재일 한국인 2세, 기업가, 범죄자로의 일본 최장기수였으며 일본인 조직폭력배를 살해한 죄로 체포되어 24년간 복역하였다.

●김달수(金達寿 1919~1997.5.24.)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군(현재 마산시) 출신의 소설가, 재일 한국인 문학자의 효시라고 한다. 김달수는 10살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

●오임준(吳林俊 1926~1974)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나 4세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0년 부모와 함께 일본 고베(神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8세에 함경북도 나남(羅南)에서 일본군으로 징병되었고, 만주 동녕현(東寧縣) 노흑산(老黑山)에서 육군 이등병으로 복무하었다. 1945년 광복 후 일본에서 재일조선미술회,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민족 학교 교사로 재직하였고, 미술과 시 창작에 전념하였다. 심근경색으로 1974년 사망하였다.

●김시종(金時鐘 1929.1.17~ )

원산 출생, 재일한국인 시인, 재일한국인의 정치 문화활동, 조선 문학자, 1948년 제주 43사건 관련, 1949 도일, 효고현 공립학교 교사(재일한국인으로 최초)



2부 동화교육체제의 전후 상황





Ⅰ. 전후 책임 문제

-전후에도 변하지 않은 것들



1. 전후 교육에서의 침략책임 문제

일반적으로 책임 의식이란 정의롭지 못하고 부당한 행위에 대한 반성을 자각하는 데서 생긴다. 그리고 그 의의는 잘못된 행위를 속죄하고 보상하는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와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변혁시켜 나가는데 중점이 두어져야 한다.

일본과 조선과의 관계에서 일본의 책임의식은 일본이 계속해 온 침략행위에 대한 반성으로 집약된다. 전후, 그 점에 대한 자성은 어떠했고, 그 자성에 의한 사상과 행동의 변혁이 보였는가 어떤가, 보이지 않았다면 어떠한 침략적인 행위가 반복되고, 따라서 어떠한 책임이 새롭게 생겼는가? 다시 한 번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전후 책임의 문제가 부상될 것이다.



●전후 책임은 완수 되었는가?

주제인 ‘재일조선인 교육문제’만 해도, 전후의 경우에는 전전의 식민지 교육체제의 책임 문제와 함께 아니, 오히려 그 이상으로 전후의 동화체제가 계속해서 초래하고 있는 상황의 의미를 중시해야 한다. 즉 전후 책임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거기에는 세 가지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경과적인 상황으로 전후 교육의 형성기에 교육 침략자를 반성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새로운 교육 과제가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상 상의 문제가 있다. 전전의 동화교육은 조선의 아이들로부터 민족혼을 빼앗는 반 교육적 행위를 거듭하여, 교육받은 아이들의 정신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는 조선에 사는 조선인 아이들이 받은 이상으로 심하여 민족적 존재를 변질시켜 버릴 정도였다.

다른 한편, 일본의 아동들은 식민지주의자의 사고를 이식받아 민족문제에 대한 민주주의의 관점을 상실하였다. 이 같은 교육침략의 역사가 만들어 낸 사실에 대해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전후 교육의 출발 당시의 특징으로 되었다.

그것이 그 후 교육사상의 성격으로서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이 침략에 대한 책임의식의 결여로 인해 일본 측은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전후 교육에서의 한일관계의 시정이라는 과제를 상실해 버렸다.

식민지 교육지배에 대한 자성이 없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전후 책임과 관련되는 중요한 내용임과 동시에 전후 동화교육과 대국주의 교육체제로 지속시킨 사상 상의 계기가 되었다.

둘째로,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한 전후 책임을 직접 물어야할 중심적인 사실로서 조선인 학교 억압과 동화교육의 추진이라는 전후사를 들었던 것이다.

이는 바로 전후에도 교육침략의 계속임에 틀림없다. 패전에 의해 동화의 국가체제는 부정되었지만, 동화의 사회체제는 계속 온존되었다. 그리고 그 기초 위에 바로 동화의 국가체제도 부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아래서, 재일조선인이 자주적 민족교육에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일조선인 청소년이 일본인화로 성장해 간 것은 즉, 민족적 존재의 변질이 넓고 깊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 청소년들이 조선인으로 살아갈 길은 철저히 저지당하고 있다.

이 같은 동화체제의 지속은 분명 일본의 전후 책임의 문제로서 파악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셋째로, 동화체제를 허용하고 여기에 가담해 온 일본 국민의 사상적인 허약성, 왜곡이 전후에도 극복되지 못했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들어야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 국민이 민족 차별사상에 사려 잡혀 있는 한, 재일조선인에 대한 동화와 차별 행위는 계속 재생산되고, 그에 대한 책임 또한 계속 묻게 될 것이다. 일본 국민은 다음에 소개할 그런 국민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재일조선인과 결혼하여 그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게 된 한 일본인 여성 작가의 지적을 빌려보면 다음과 같다.



봉건사상의 잔재에 대해서는 요란스레 떠들어 대고 제각기 반성도 하고 개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찍이 다른 나라를 점령 지배하고, 압박해 온 국민으로서, 식민지에서 힘 하나들이지 않고 모든 이익을 짜낸 35년간의 역사에 의해 형성된 국민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후 15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어떤 진보적인 사상가에 의해서도 직접적으로 논의된 전례가 없다. 전쟁 책임 논의가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는 있었어도, 거기에서 전쟁 중에 징용으로 끌려와 그대로 주저앉아 고통 받으며, 생활하는 60만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되돌아본 일도 없었다. … 우리 일본인은 타국과 타민족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시정할 수 있는 힘과 도덕을 가진 국민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순리에 따르는 국민이 됨으로써 비로소 순리에 따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재일조선인 교육과 관련하여 일본의 전후 책임을 물을 때, 저자는 이상에서든 침략 책임에 대한 반성의 미약, 동화교육 체제의 지속, 민족 차별사상에 사로잡힌 국민의 세 가지 점이 전후 책임을 창출해 내는 소재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중심 고리는 동화교육 체제의 지속=재일조선인 청소년의 민족성을 파괴하는 도구로서의 교육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를 폐지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 속에서 침략 책임을 깊이 자각할 때에 민족 차별사상도 바꿔나가는 일도 추진될 수 있다.



●침략책임의 중층성

이와 같은 상황의 본질은 ‘일본인이 본 재일조선인’이라는 시점을 ‘재일조선인이 본 일본인’이라는 시점으로 역전시켜 볼 경우 한층 더 분명하게 부각된다. 재일조선인은 조국과 관계에서 독립국의 재외공민으로서 광복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가와 사회와의 관계에서는 차별과 동화를 계속 강용 당하면서 진정한 ‘광복’을 맞이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눈에 비친 일본의 국가‧사회의 체질은 ‘식민지’ 의식과 행위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재일조선인 교육문제에 그치지 않고, 넓게 한일관계에서의 여러 문제는 모두 일본의 침략적사고의 자세에서 발생하고 있다. 광복 후의 경우에는 전전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책임을 해결하지도 않은 채, 그 위에 전후의 침략적 자세를 중첩시켜 온 데서부터 모든 문제가 생겨났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후 한일관계에서 발생한 제반 문제는 식민지 통치의 책임과 전후 책임과의 중층적인 침략 책임을 묻는 사상적인 과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후를 이렇게 출발하도록 한 원인은 당연히 미국의 일본 점령과 조선 침략정책, 그 아래서 행해진 일본정부의 조선 적대정책이라는 정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정치는 식민지 통치의 책임문제를 방기하고, 전후의 조선 적대정책이라는 행위를 권장했다.

여기에서는 새로운 한일관계를 다시 만들어 간다는 시점과 출발점은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그 모든 책임을 여기에다만 미룰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국민 측의 일로서 침략책임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책임을 어떻게 속죄하고 새로운 한일관계를 수립해 나갈 것인지를, 일본의 진로와 관련되는 일로 토론하고 사상‧운동‧정치적 과제로 삼아 여기에서 전후 일본이 하나의 출발점을 규정하여 나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오랜 침략으로 축적된 역사와 의식에 물들어 그러한 과제가 있다는 것조차 패전 직후는 물론이고, 전후 얼마동안 전혀 깨닫지 못했다. 예를 들면 전후 일본의 사상동향의 기조는 전쟁책임 문제를 둘러싼 것이었고, 아시아에 대한 침략책임의 문제를 언급하는 일은 적었다. 군국주의에 의한 피해라는 국내적 시점이 선행했고, 군국주의의 가해에 가담한 일본이라는 아시아적 시야는 미숙했다.

이러한 사상의 왜곡과 후진성으로 인하여 새로운 한일관계를 만들어 가는 정부와는 별도의 행위를 전개시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일정하게 대중적인 확산을 보이며 국민적 문제로 떠오르게 된 것은 1960년대 중반 한일조약이 정치과제로 부상한 때부터였을 것이다.

한일관계의 영역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 통치의 책임을 느끼는 일 없이 침략적 자세를 지속하며 ‘전후’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 ‘전후’를 새로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마땅히 전후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또한 침략책임에 대한 자각이 더디고, 여전히 민족적 차별사상에 사로 잡혀 정부의 ‘전전’적인 소행을 허용하면서 거기에 가담해 왔다는 점에서, 일본 국민도 또한 전후책임 문제와 관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본 장에서는 제2부의 서론으로서 전후 재일조선인 교육문제의 근저에 ‘전전’=동화체제의 사상과 정책이 계속 살아 있음을 명확히 함으로써 전후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는 비단 재일조선인 교육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한일관계의 제 문제를 일본 국민의 사상변혁의 문제로 끌어당겨 생각해 보고자 할 때, 어떻게든 식민지 통치 책임 및 전후 침략의 책임이라는 이중의 자각‧시점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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