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3. 전후체제에 의한 식민지 통치 책임의 망각
조선에 대한 전후 책임의 축적은 전후 일본의 국가와 사회가 식민지 통치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계속해서 얼버무린 데서 시작되었다. 일본 국민 측에서 겨우 그 문제에 대해 눈을 뜨고 추적을 하게 된 것은 패전 후 25년 이상이나 지난 1970년대가 지나서 였다. 이는 침략적인 자세의 ‘전전(戰前)’이 계속 살아 있다는 지탄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일어났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식민 통치의 책임을 망각하고 있는 전후의 존재 방식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본다.
●식민지 통치에 대한 국가 책임의 방기
전후 일본 정부는 조선인이 외국인으로 되었다는 법적인 이유를 들어 전전의 만행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보상이나 구제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는 예컨대 피폭 조선인을 계속 묵살한 것을 보더라도 분명하다. 피폭 조선인은 일본의 침략 책임과 전쟁 책임이 집약된 위치에 서 있지만, 전후 정부는 이를 묵살함으로써 두 가지 책임을 모두 무시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의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 조선인 ‘전범’이다. 이들은 전전‧전후의 일본 정부에 의해 인간성의 밑바닥까지 짓밟히고, 일본국가의 계속되는 범죄성의 증인으로 되어 있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의 국가 권력에 의해 징용‧징병된 조선인은 무려 600여 만 명에 달하였다. 그 내역은 박경식의 조사에 따르면, 조선 내에서 징용된 자 415만, 일본 내에서 강제 연행된 자 72만5천, 군인‧군속으로 동원된 자 35만4천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조선인 청장년 남자는 거의 모두 태평양전쟁에 강제 동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조선인 징용‧징병자 중 군인‧군속 관계 사망자는 3만 명 이상, 일본에서 강제 연행되어 사망한 자는 6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국가와 국민은 조선 민족에 대해서 식민지 통치의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책임도 있다.
36만4000명이라는 조선인 병사‧군속의 수는 미국이 아니라 바로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인으로 하여금 아시아인과 싸우게 한 군사전략의 인도자임을 나타낸다.
조선인 병사‧군속을 아시아 제 민족과 적대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들로부터 민족의식을 뿌리째 뽑아내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다. 1944년 육군 교육총감부가 내놓은 극비자료 ‘조선 출신 병사의 교육 참고자료’의 전면은 조선인 병사‧군속의 ‘일본인화’ 방책으로 채워져 있다. 그 제1절 ‘군대에서 조선 출신의 특별 지원병 상황’의 일부를 발췌해 본다.
‘국체 관념 같은 것도 일단 이해는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지식수준에 불과하고 일본인으로서의 신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무릇 일본인적 감정, 정조의 뒷받침이 없어서는 안 된다.
국체 관념은 이미 상당하다. 황군의 본의, 사명에 대한 인식 같은 것은 여전히 천박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반도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자는 없다. 그러나 시합을 하거나 술을 마실 때 등은 일본인 병사에 대해 대항하는 느낌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 기록이 제출된 1944년에는 이와 똑같은 내용을 일본인 ‘교육자’도 연달아 발설하였다. 앞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한 법학전문학교 교장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고 있다.
“우리 학교에서는 학교교련, 혹은 무도, 혹은 일본학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졸업한 후 군대에 가지 않고서는 이 교육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인을 비조선인화시키기 위한 일본 군부와 교육자 간의 그야말로 기막힌 협력이었다. 이 방법은 조선 청년을 일본 군국주의화를 위해 동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그 제1진으로 36만의 청년들을 보냈으나 일본은 패전하였다.
30여만 명의 조선 청년은 비조선인화의 상흔을 남기고 길바닥에 내버려 두었다.
전후 정부는 일본의 구 군인에 대해서는 군인 보상금 등을 지급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조선인 구 군인에 대해서는 외국인이니까 상관없다며 그대로 방치해 버리는 방침을 취하였다. 조선인 병사는 내내 사지에 있었다. 살아남은 자 중에서도, 특히 전범으로 취급된 조선인 병사는 조선인의 입장에서 ‘대일 협력자’로 비난 받았으며, 일본 국가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정치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스스로 존재 이유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교수형 선고를 받은 한 조선인 병사는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다.
‘…조선인으로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일본인이라면, 주위에서 아무리 비난을 당하고 매도당하더라도 결국에는 자신들은 몸 바쳐 조국을 위해 그랬다라고 하는 위로라고나 할까 혹은 자랑스러움이라고나 할까…그런 것을 가질 수 있는 반면, 우리 조선인은 그러한 위안조차 가질 길이 없었던 것이다. 위로 받을 처지가 못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하는 것이 그야말로 가슴 속 깊이 각인된 회환 바로 그것이었다’
조선인 병사‧군속들에게는 태평양전쟁에 참가한 대의가 아무 것도 없었다. 대의명분을 만들려 해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일본군국주의의 총알받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 수기를 쓴 저자는 포로 학대 죄로 전범 처리되었는데, 그 진짜 원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부산 노구치(野口)부대(포로 단속을 위한 특별부대로, 조선인과 대만인으로 편성/인용자주)에서 2개월 동안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 교육방침은 조선인을 당당한 한 일본 군인으로 만들어내는 소위 군인정신의 주입으로…가혹한 비인간적인 제재나 두들겨 패는 것이 일색인 교육…이러한 야만적인 교육이 내게 심어준 것은 무엇이었을가? 제재의 방법으로 부하를 때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버렸고, 그것이 포로를 대하는 행위에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인 전범을 둘러싸고 두세 가지 문제를 지적해 본다. 남방관계에서 전범으로 몰려 교수형을 받은 자 23명, 1개년에서부터 종신형의 유형을 받은 자는 148명에 이른다. 이유는 모두 포로 확대인데, 진짜 원인은 조선인 군속에게 수용소 포로를 감시하게 하는 정책을 취한 일본 군부에 있다.
전범의 사유는 많겠지만, 일본 군부의 교활한 수법이나 식민지인으로서의 미묘한 심리적 움직임이 뒤섞여 포로(후에 전승 국민)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게 되었다.
남방과 관련된 곳이었으므로 포로는 인도, 인도네시안 인과 함께 영국, 네덜란드인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 일을 명해도 실제로 일하는 자는 아시아인이고, 일본인은 게으름을 피우기 일쑤였다.
그렇게 되면 “지금 생각해보면, 식민지인으로서의 감정도 있었을 것이지만, 우리는 차별하지 않는데, 당신네가 차별하고, 당신네만 노는 것은 뭐냐?”라는 식으로 따지게 된다. 이와 같은 일본인에게 따졌던 태도가 유형(有刑)으로 연결되었다. 석방된 전범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자는 60여 명인데 그들에 대한 일본 정부는 냉혹한 태도를 보였다. 그 중에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1955년 12월 석방 명령을 받았다. 생각해 보면, 손에 쥔 밑천도 없고 집도 없었다. 일본 정부가 직장을 찾아 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하나무라(花村) 법무대신을 직접 만났지만, “뭐야? 나가 달라”라고 했다. “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스무 살에 군대에 가서 전쟁이 끝나고도 10년씩이나 이 고생을 했단 말인가? 살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대로 나가다간 굶어죽는 길 밖에 없다”라고 했더니, “어쨌든 나가 달라. 나중에 뭔가 방법을 강구하지 않겠는가?” “그럼 법무대신이 책임지고 간단히 몇 자 적어 달라”, “그것은 안 된다. 하지만, 뭔가 해 보겠다”라고 해서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때뿐이고 지금까지 그 일에 대해서는 엽서 한 장 받아보지 못했다’
태평양전쟁과 조선인 징용‧징병 문제에서도 또한 패전 후의 조치에서도 일본 정부는 철저하게 이용만 해 먹고 내버리는 방침을 견지하였다.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조선인 전범에 대한 처리이고, 또 하나가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의 인양에 대한 태도였다. 그것은 소위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사건으로 상징되는데, 다음에 정부의 설명(후생성 인양원호국)을 소개해 보겠다.
‘오미나토(大溱) 부근에 주둔해 있던 해군 시설국의 다수의 조선인 공원은 연합군의 진주를 두려워했기 때문인지 배를 타고 조선으로 귀국하겠다는 요망을 호소하여 불온한 조짐을 보였다. 당시 일본 해군으로서는 이미 공원 해체[解員] 수속을 완료한 전(前)공원에 대해서 반드시 수송을 해 주어야할 의무는 없었지만, 사태를 평온하게 해결하고자 하여 특설 운송함 우카시마마루(4,730톤)에 편승시켜 조선인 공원 2,838명, 동 민간인 897명을 태워 1945년 8월21일 아침 오니나토를 출항했다.
그런데 마닐라에서 일본 대표에게 전달된 연합군 요구서 제3에 의해, 일본의 전 선박은 8월24일 이후 항해를 금지 당하여 인근 항구에 정박하라는 지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키시마마루는 무학항(舞鶴港)에 입항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입항하느라 충분히 연락을 취하지 못하여 연합군이 부설한 기뢰(機雷)에 닿아 24일 오후 5시15분경, 무학항 내 사도(蛇島) 북방에서 침몰하였다’
이렇게 해서 541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사망하고, 9월 2일까지 175구의 유해가 인양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계속 방치되다가 겨우 1950년 3월에 103구, 1963년에 245구의 유해가 인양되었다. 유골은 신원을 알 수 없는 채 서로 뒤섞여 일본에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 중에 징용‧징병된 조선인 청장년 10만 명 이상의 유골이 지금도 일본 각지에 방치된 채 썩어가고 있다. 이러한 처사 하나만 보더라도 전후 일본 정부는 식민지 통치의 책임을 돌아보고 완수하려는 자세를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다. 거기에서 전후 일본 정부의 조선에 대한 침략적 자세의 지속을 탐지해 낼 수 있는데, 20년 후의 한일조약에서 공적으로 식민지 통치를 새롭게 합법화함으로써 변함없는 체질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전후 일본 사회의 전전(戰前)적인 체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인명의 희생에 대해서조차 책임을 방기하는 일본 정부이고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조선인의 민족정신 및 자질의 변용에 관해서는 더더군다나 책임을 느끼지 않으며 심지어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을 정도이다. 재일조선인에 관해서 말하자면, 전후에 ‘협화’사업에 대한 반성은 물론 시도하지도 않았으며, 실질적인 면에서는 한편으로는 ‘외국인 등록령’에 의한 단속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동화정책의 전개로서 이를 여전히 추진하고 있었다.
특히 동화 즉, 민족적 존재의 변용 문제는 정부정책에 의한 측면과 사회의 동화 강제력에 의한 측면의 상승적인 작용을 받고 있다. 이것과 관련해서 전후 사회가 과연 변하였는지 어떤지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전전의 재일조선인은 대다수가 조선에서 나고 자랐다.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특성을 갖추고 나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들 대다수는 일본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후가 되면, 재일조선인의 일본 동결(凍結) 정책이 있었고, 그 결과 일본 태생과 일본에서 자란 조선인이 과반수를 점하고 이들 조선인은 처음부터 일본인과 비슷하게 자랐다.
조선 태생의 부모세대는 조선어가 몸에 밴 상태에서 조선식 일본어를 사용한데 비해, 일본 태생의 아동 세대는 일본어 가운데서 성장하여 조선어를 모른다. 단적으로 말하면 전전에는 재일조선인을 동화시키는 것, 전후에는 그 ‘성과’ 위에서 동화의 가면을 쓰면서 안으로 민족적 특성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과제인 것에 비해, 전후의 과제는 오히려 완전 동화된 세대를 이화(理化)시켜 조선인의 자각과 자질을 주입시키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동화작용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전전보다도 전후 쪽의 동화 문제가 더 심각하다. 그리고 일본 사회측도 동화를 당연시하여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서 깊이 협력하였다.
전전의 일본 사회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동화 작용과 동시에 재일조선인을 배제하는 작용, 말하자면 이중적 차별을 축적해 왔다. 그 체질은 온전히 전후 사회로 계승되었다. 일본 태생의 조선인으로서 전전‧전후를 살아온 김희로(1928.11.20.~2010.3.26. 개명 권희로)의 성장사는 이와 같은 일본 사회의 체질을 응집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하나의 검증 축으로 삼아 일본 사회의 성격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김희로가 두 명의 일본인을 살해하고, 스마타 산(寸又山)의 한 여관에 틀어박힌 것은 1968년 2월 20일의 일이었다. 그 때부터 3월까지 언론은 ‘김희로 사건’을 떠들썩하게 보도하고 논평을 가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1973년) 언론은 이것에 대해 잠잠했고, 사회의 관심도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김희로 사건에 담긴 사상적 의미, 즉 ‘일본인에게 재일조선인은 무엇인가?’는 앞으로도 더욱 심각하게 따져보지 않으면 안 되는 사건이다.
‘김희로 사건’의 특이성은 사건기자의 눈으로 본다면 살인을 범한 후 일본인 수 십 명을 인질로 삼아 스미타 산의 한 여관에 틀어박힌 점에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김희로의 내면에서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과 억압의 체계가 그를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넣었고, 마침내 국가 권력에 맞서는 지경까지 이르게 한 것으로 파악된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사건은 일부의 일본 국민에게 사상적 충격을 주었다.
‘김희로 사건’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따라, 실은 일본인 개개인의 조선관을 시험해 보는 성격을 띠고 있다. 만약 사건기자나 검사처럼 이를 단순히 ‘흉악범’으로만 취급하면, 재일조선인은 범죄율이 높다고 하는 유포된 편견에 빠져도 더욱더 조선인 차별관을 강화시켜 갈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 동기나 그의 성장과정에 까지 관심을 집중한다면 재일조선인의 억압에 대한 일본 국가의 책임, 일본 사회의 공범 책임이라는 문제가 부상하고, 일본인의 조선 차별 극복이라는 과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 기자명 동양일보
- 입력 2020.02.02 20:14
- 수정 2020.02.03 14:53
- 댓글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