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정안길 소설가

 

[동양일보]더러 먼 길을 떠나려고 버스정류장에 나가 초입에 발을 들여놓으면, 변함없이 눈에 띄는 두서넛 노파의 화덕을 끌어안고 옹동그린 채 밤이나 고구마를 굽는 모습을 본다. 정녕 끈질기고 치열한 풍속도 마냥 눈에 밟힌다. 어쩌다 묵은 일기장을 뒤적여보면, 지금은 중년인 딸애가 중학생 무렵 버스를 함께 타고, C시를 곧잘 갔던 일이 씌어있다. 무슨 볼일이 그리 많았는지, 깨알 박듯 써놓은 펜글씨를 재봉하듯 누벼보지 않고선 꼼꼼히 알 수가 없다.

얼추 짐작컨대, 잔병치레하던 아빠의 보호자로 병원을 동행했으리란 기억이 새롭다. 그때 이따금 작은 봉지의 군밤을 사들고 차에 올라 밤알을 하나씩 집게손가락으로 쥐어다 입에 넣어주었는데, 맛보기로 두어 번인가 입으로 받아먹은 기억도 끼어든다. 그때마다 엉뚱한 생각이 났었는데, 그 별난 노파들이 앞으로 얼마나 사실 건가, 또 먼 훗날에도 저처럼 옹동그리고 화덕의 온기를 쬐며, 변함없이 그 숫한 사람들이 들고나는 좁다란 길목에 그림자처럼 그 자리에 있을까.

사람들은 태양을 영원불멸한 빛이라지만, 그렇더라도, 그 그림자만은 진정 그때의 것과 지금의 것이 같은 것일까. 빛이야 광대무궁하기에 변함이 없겠으나, 수시변하는 그림자의 본체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기에 빛과 그림자의 만남은 분별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버스정류장 초입, 택시 타는 곳, 인도 가장자리로 처마도 없는 약국건물, 그 그늘진 쪽으로 기생하듯 군밤을 굽던 오랜 적의 노파는 이미 세상을 뜨고, 그 건물의 그림자처럼 화덕을 끌안은 노파는 그 예전 노파의 화신(化身)일까. 그런 상념의 군더더기에서 냉랭한 찬바람을 이고, 밤, 고구마를 굽는 화덕이 난로가 돼주지만, 허술한 옷차림에 등줄기로 파고드는 찬바람은 어떻게 막는담.

지난겨울 매운 공기가 배회하던 날, 화덕을 끌안고 웅숭그리고 앉은 노파의 손이라도 잡고 묻고 싶었다. 등허리로 한기가 들어 고뿔들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그 외길목에 몸을 한껏 움츠린 노파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상념은 떠나지 않아도, 딸애는 용기(?)를 내어 한 봉지 군밤을 사들고, 차에 올라 입에 넣어주던 멀어져간 그날이 머릿속을 스멀거릴 뿐인데, 군밤을 선뜻 사먹어 본적이 언제든가.

하지만, 그 풍경은 현실과 잠재의식 사이에 각인되어 선뜩선뜩한 봄 같지 않은 이맘때 계절의 시곗바늘은 울타리에 엉클어진 회초리같이 앙상한 개나리가 잎도 피우기 전에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세상에 예사로운 것들은 모두 눈의 밖에서도, 변함없이 생리적인 몸짓을 멈추지 않는다. 가마득히 멀어져간 어느 해 이맘때도 앙상한 가지에 꽃을 피웠으니, 올봄 개나리가 만개하기 전 개봉박두라도, 그 황금빛 화려한 모습은 상념처럼 지레 알 수 있다. 네 개의 샛노란 꽃잎은 초록빛 클로버보다 타원형의 앙증맞은 갸름갸름 어여쁜 꽃송이가 비록 지난해 봄 화사하게 채색되어 온 누리를 눈부시던 꽃은 이미 열매로 돌아갔더라도, 그보다 더 찬란한 꽃으로 피어나려고, 햇살 바로 지열과 습기를 머금고, 천지창조의 태동으로 좁다란 울밑 틈바귀에서 묵연하다.

그러하듯 숨어서 변치 않는 것들이 있기에 또 내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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