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주 영동 심천초등학교 교사

최영주 영동 심천초등학교 교사

[동양일보]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아카시아 향이 실려 와 코끝을 간질일 때면, 나는 어느새 너를 처음 만났던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4층 교실의 내 책상에 앉아있곤 해.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꼭대기 교실은 오르내리기가 힘들어서인지 수업이 끝나면 오가는 사람이 없어 조용히 사색하기에 완벽한 곳이었지.

그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너는 수업 시간에도 나를 보고 빙그레 웃어 주고, 수업이 끝난 후에도 혼자 남아 나를 보고 빙그레 웃어 주었어.

햇빛이 잘 들어오는 창가 자리에 앉아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을 지으며, 5㎝가 넘어 보이는 두꺼운 책을 들고 말이야.

또래보다 유난히 생각이 깊었던 너는 아마 어른들과의 대화가 더 즐거웠던 모양이야. 어린 시절의 나와 닮은 너를 보면서 난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참 많았단다. 말수는 적었지만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할 때 너의 눈은 반짝였어.

그때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조용히 다가와 미소 짓던 너의 얼굴은 또렷이 기억이 나. 바로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너의 얼굴 그대로거든.

시간이 지났어도 너는 그때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구나! 점점 멋진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걸 축하한다.

어느새 스물여섯이 된 너와 마주 앉아있으니 참 좋구나. ‘싱그럽다’는 형용사를 사람으로 빚어놓으면 바로 너의 모습일 거란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너에게 들려 온 반가운 소식! 드디어 취준생을 벗어나 네가 그토록 원하던 여행가이드가 되어 곧 이탈리아로 떠난다고 말이야.

그 전에 나를 꼭 만나고 싶다는 너의 그 말이 얼마나 고맙고 설레었던지, 너의 시작이 곧 나의 시작인 것처럼 그렇게 마냥 좋았어. 그동안 네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방황으로 힘든 순간들을 보냈는지 잘 알기에 오늘의 네가 더 대견하구나.

그런데 나는 네가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네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동서양의 역사와 미술사, 여러 나라의 언어에 대한 호기심과 재능들. 이런 것들이 너를 한곳에 머무르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걸 느꼈거든.

전 세계가 바로 너의 일터가 되고, 놀이터가 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단다.

그동안 네가 메일이나 sns를 통해서 오랜만에 소식을 전할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곤 했어.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여행을 떠난 너는 나에게 20대가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보여줬지. 일본 유후인에서는 하루에 두 번씩 온천에 가고, 산 중턱에 있던 호스텔까지 무작정 비를 맞으며 걷기도 하고, 처음 만난 독일인과 두 시간 동안 수다를 떨다가 친구가 되고, 또 일본 사람들이랑 풋살을 해서 멋지게 한 골 넣기도 했다고.

그다음 해에 너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지. 걸어서 500㎞, 기차와 버스로 300㎞를 가야 하는 긴 여정을 13㎏가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진통제를 먹어가며 걷고 또 걸으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다음 해에는 파리, 에펠탑 근처 민박집에서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유럽을 돌아보고 왔지. 에펠탑이 지겨울 정도였다는 너의 투정이 참 정겹게 느껴졌었어. 네가 그 여행에서 찍은 사진으로 엽서를 제작해서 학교로 보내준 덕분에 나는 우리 반 2학년 아이들과 그 사진으로 세계 여러 나라 수업을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었단다. 그 엽서를 서로 갖겠다고 아우성을 치기는 했지만 말이야.^^

s야. 네가 힘든 순간에도, 기쁜 순간에도 여전히 나를 떠올려 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오늘 곧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제자를 마음껏 축복해 줄 수 있게 해 줘서 더 고맙다. 네가 어디에 있든 너를 응원할게. 항상 건강 잘 챙기렴.

-언제나 너를 사랑하는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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