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관 청주시 사직1동 행정복지센터 주무관

[동양일보 한종수 기자]‘시왈(時曰), 부혜생아(父兮生我) 모혜국아(母兮鞠我) 애애부모(哀哀父母) 생아구로(生我劬勞) 욕보심은(欲報深恩) 호천망극(昊天罔極): 시경에서 가로되, 아버지로부터 내가 비롯하여 어머니께서 날 품고 낳아 기르시니 애달프다! 애달프다! 우리 부모 나를 낳아 기르신 고생이여! 깊고 깊은 그 은혜 갚고자 할진대 넓고 넓은 하늘처럼 그 은혜가 한이 없구나.’

명심보감 ‘효행’ 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각설하고, ‘생일’은 무엇일까?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자식의 생일을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영아 사망률이 높았을 때 백 일을 넘기거나 돌이 지났을 때 잔치를 해 그 기쁨을 함께 했지만 지금처럼 아이의 생일이 축하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나’를 중심으로 하는 생각이 주를 이루고, ‘자식’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으로 변하다보니 ‘생일’이라는 말이 중요해졌다.

자신의 생일에 남에게 선물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축하 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역국을 먹지 못하면 서러워하고, 누군가가 기억해 주기를 원한다. 과연 이것이 우리나라의 진정한 의미의 ‘생일’일까? 그렇지 않다.

원래 우리는 무엇을 ‘생일(生日)’이라고 불렀을까? 바로 ‘구로일(劬勞日)’이다.

‘구로일(劬勞日)’은 위의 명심보감 ‘효행’ 편의 구절인 ‘생아구로(生我劬勞)’에서 나온 말이다. 부모께서 나를 낳아 고생하시기 시작한 날을 뜻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자식을 낳아서 기르느라고 부모가 애쓰기 시작한 날이라는 뜻으로, 자기의 생일을 이르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우리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동안, 세포 하나하나가 늘어가면서 어느 하나 부모의 정성이 없던 것이 없다. 태어나기 전에도 어머니께서 우리를 열 달 동안 금이야 옥이야 품으셨고, 핏덩이 적 가냘픈 숨에도 생명을 불어 넣으신 것은 우리 부모님이셨다. 자라면서는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고, 기르시며 온갖 고생을 다하셨다. 어찌 그 누가 나의 몸이 내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성인(聖人)이 아니다. 더욱이 우리는 신(神)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난 것이 아니라 부모께서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고 주위의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모두 우리 부모의 공덕인 것이다. 어느 하나 나로 비롯한 것이 없다.

이제부터는 생일에 누군가에게 축하받기 보다는 우리 주위의 좋은 사람들을 만남에 감사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함을 전하며, 미역국을 대접하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본다.

그래서 나에게 내가 이 세상에 비롯한 날은 ‘생일(生日)’이 아니라 ‘구로일(劬勞日)’이다. ‘내가 태어난 날(生日)’이 아니라 ‘우리 부모께서 나를 낳아주신 날(劬勞日)’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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