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문학평론가·문학박사

[동양일보]포석 바로 보기는 한국문학을 바로 세우는 일

 

강찬모   문학평론가/문학박사
강찬모 문학평론가/문학박사

 

과소평가된 사람을 재평가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설명하지 못하는 기본적 이미지의 한계이다. 즉 그 사람에 대한 배경 지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를 전제로 그 사람을 설명해야 하는 난감함에 봉착한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동원되는 것이 그와 더불어 당대를 살았던 뛰어난 사람과의 연관성을 단초로 삼는 일이다. 설명에 동원되는 그 사람은 이미 교육을 통해 상식화된 보편적 인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익히 아는 사람이다.

포석을 설명할 때도 이와 같이 연동되어 설명하기 위해 소환되는 인물이 필요하다. 그 첫째가 극작가 김우진과의 우정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에게 끝없이 인구에 회자되는 그의 정인(情人)인 조선의 아리아 윤심덕(사의 찬미)이다.

이들은 식민지 종주국인 적국의 땅 동경 유학시절부터 나라 잃은 청년의 울분과 고뇌를 함께 논했던 막역한 사이였다. ‘봉선화’의 홍난파도 이들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또한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는 소월의 시집 <진달래꽃>과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이 출간된 연도가 각각 1925년과 1926년이란 사실을 상기한다면 위에서 언급했지만 24년에 발간된 포석의 시집 <봄 잔디밭 위에>가 한국근현대문학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지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된다.

포석 문학의 상징처럼 된 소설 <낙동강>에서 그의 진면목이 또 한 번 드러나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위에 열거한 파편화(破片化)된 역사적 사실이 현실적 맥락 속에서 구체적으로 담보되는 실례이기 때문에 더 핍진(逼眞)하다.

일화의 대상과 작품은 우리에게 <광장>의 작가로 알려진 최인훈과 그가 1994년에 쓴 소설 < 두>다.

그는 이 소설에서 학창 시설에 배운 <낙동강>을 작품 전개에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으며 소설의 도입과 결말 부분을 원문 그대로 인용한다. 최인훈은 지난해(2019) 타계를 했는데 그의 며느리의 증언에 의하면 투병 중에도 손에서 놓지 않고 읽은 책이 ‘낙동강’이라고 한다. 이처럼 그가 낙동강을 특별히 아꼈던 이유는 “<낙동강> 같은 남북 공통의 읽을거리가 필요하며 남북통일을 하려면 정신적 통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한겨레신문」, 2019. 6.4)라고 한 말에서 확인된다.

최인훈 개인적으로도 <낙동강>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을 결정짓는 운명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학창시절 선생님께 들은 <낙동강> 독후감에 대한 칭찬이 결국 그의 삶의 행로를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여러 이유로 포석과 최인훈, 최인훈과 포석의 인연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최인훈은 한국 지성사를 대표하는 독보적 작가인데 이러한 작가의 육성과 글에 의해 포석이 직접 호명되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사에서 최인훈이 써내려간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의 이름을 빌려 쓴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비망록(備忘錄)’이다. 한국인에게 이미 친숙한 최인훈 문학을 이야기 할 때마다 포석의 삶과 문학도 더불어 조명될 것이며 왜 당대의 거장이 포석을 자신의 문학적 기원과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는가를 묻는 시간인 까닭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필자도 보통사람들이 포석에 대하여 갖고 있던 일반적 평가와 다르지 않은 편견을 갖고 있었다. 한국근현대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포석은 대학과 대학원에서조차 소월과 만해처럼 단독으로 수업의 주인공이 되어 그의 삶과 문학을 이야기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따로 관심이 있어 연구 대상으로 천착하지 않은 이상, 공식적인 커리큘럼에서 포석의 문학은 그의 삶처럼 영원한 ‘디아스포라(Diaspora)’였다. 이러한 상황은 소수 대학만의 특정한 풍경이 아니라 우리나라 국문학의 일반적 면학 지형이었다.

이렇게 포석이 저평가된 원인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빼놓지 못하는 게 소련으로의 망명이다. 망명은 한 인간의 삶이 실존적으로 뒤흔들린 끝에 선택한 정체성의 결과물이다. 그것도 사회주의 모국인 소련으로의 망명은 이후 그의 삶과 문학의 주홍글씨로 작용한다. 여기에 분단의 현실은 포석의 삶과 문학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했다.

그가 참담하게 토로했던 ‘뼈품을 팔아도 먹을 수 없는 사회’(짓밟힌 고려)에서 문학은 강력한 항일의 차선책이며 더 나아가 프로문학은 이를 견인하거나 극복하는 수단으로 고려한 망명이었다.

게다가 그가 선택한 길이 해방이후 분단이 농후한 상황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감행한 사실을 상기한다면 지금의 단순한 분단논리 잣대 자체가 유아적 퇴행의 증거일 뿐이다. 동시대가 시냇물을 상상할 때 그는 이미 거친 망망대해에서 등대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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