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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해방 후에도 반복되는 가혹한 민족교육 억압정책
33. 해방 후에도 반복되는 가혹한 민족교육 억압정책
  • 동양일보
  • 승인 2020.05.17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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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호 박사

[동양일보]●재일조선인 교육사의 시기 구분2

억압정책의 변천을 염두에 두면, 그간의 역사가 재일조선인에게는 민족교육의 권리를 수호하는 투쟁의 축적이었음이 분명해진다. 그 자취를 재일조선인의 주체적 발전에 따라서 살펴보면 크게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제1단계는 해방민족으로서의 자부심에 불타 조련을 중심으로 민족교육의 기초를 창설한 4년간의 시기이다.

△제2단계는 북한의 성립(1948년 9월)으로 재일조선인이 독립국의 국민이라는 자각을 갖고 민족교육의 노선이 명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내에서는 한국전쟁을 이유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탄압이 추진되어 조련이 해산되고 조선인학교가 폐쇄되는 등 민족교육의 수난을 당한 6년간의 시기다.

△제3단계는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결성(1955년 5월)으로 재일조선인의 단결을 회복하고, 민족교육의 발전기에 들어가고 있는 1970년까지의 시기로 나누어 본다.

이에 대해 일본은 문부차관 통달로 ‘외국인학교제도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새로운 탄압을 가했다. 이렇게 볼 때 민족교육의 역사는 지배자의 조선 침략정책으로 시작된 민족교육에 대한 억압들을 하나하나 단호히 떨쳐내면서, 독립국의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민족교육의 발전을 쟁취해 온 역사라고 총괄할 수 있다.그런데 이러한 민족교육, 집약적으로는 조선인학교를 둘러싼 반동과 진보의 항쟁사 속에서 일본인학교에 취학하는 재일조선인 학생 수가 점차로 증가해 온 점, 요컨대 동화교육의 사회적 현실이 확산되었다는 점을 소홀히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재일조선인의 일본 동결, 민족교육에 대한 계속되는 억압정책, 사회적으로 온존된 조선인 차별 등, 주로 일본 측의 책임에 의해 초래된 교육 현상으로서 재일조선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전전의 경우와는 다른 의미에서 동화교육의 사회체제가 정착했다는 점, 이는 재일조선인의 전후 교육사를 볼 때 정치적 관점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점도 유의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따로 다루고자 한다.



2. 일본점령과 재일조선인 교육문제 : 미점령군의 재일조선인 교육정책

●민족교육을 억압하는 방법

재일조선인 자녀의 교육이 민족교육 제도로서의 형태를 갖추고 나서 막 새로운 나래를 펴기 시작한 바로 그때, 1948년 신학기를 앞두고, 민족교육은 미·일의 지배자로부터 최초의 탄압을 받았다.

이어 1949년 가을 조선인학교 강제폐쇄, 한국전쟁 하의 가혹한 탄압이라는 타격이 재차 가해졌다. 1948년의 탄압에서 1955년의 조총련의 결성에 이르는 기간은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있어서 수난기였다.

이 시기의 문제를 음미해 보고자 할 때, 미국 점령군의 방침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점령군 정책이 변경에 따라 일본 문부성의 방침이 바뀌고, 그에 의해서 조선인학교의 처우도 변경되고, 그 처우의 변경에 대해 재일조선인이 저항하는 일련의 경과를 거쳤기 때문이다. 점령기에는 미점령군의 정책이 조선인학교를 억압하는 근간이 되었고, 일본 정부는 특히 재일조선인 문제에 관한 한 자진해서 여기에 협력하고 구체화를 도모하는 관계에 있었다.

또 조선인학교를 억압할 때 오직 일본의 교육법령에 따를 것을 요구하며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를 부정하고자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방법에 대항하여 저항을 일으키면 폭력을 써서 이를 강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점은 특히 미점령군의 주도하에 일본의 패전 후 겨우 2년 반 만에 부활한 것이었다. 이 당시에는 일본교육은 ‘민주화’ 선언의 물결을 타고, 그 사태가 갖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카이로선언(1943.11)은 ‘조선을 자유롭게 독립시킨다’는 방침을 정했지만, 당초 연합국은 조선의 지위가 정해지지 않은 나라로 취급하였고, 1947년 8월에 연합국·중립국·적국의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은 특수 지위 국으로 간주하였다.

이처럼 국제법상 불안정한 조선의 지위는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의 불투명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독립 국민의 권리를 당장 인정받지 못하였다. 즉, 1945년 11월, 미국은 일본의 점령 및 관리에 관한 기본적 지령을 맥아더가 발했는데, 제1항에서 ”대만 출신의 중국인과 조선인은 군사상의 안전이 허락하는 한 해방 인민으로 처우하지만, 필요한 경우 적국민으로 취급할 수 있다“고 했다.

사실상 이것은 현지 미점령군에게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처우법에 대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되었다. 미점령군은 형사판결 재심사 요구권을 예외로 하고, 재일조선인을 ‘적국민’으로 계속 취급하였고, 1946년 11월에 이르러 귀국하지 않은 조선인을 ‘일본 국적을 그대로 보유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일본 법령에 따르는 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도 이러한 사실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경시청은 ‘조선인은 어떠한 경우라도 일본의 주권에 따라 그 법권의 지배를 받은 결과 그들에 대한 취급 또한 일본인과 동일했고’, ‘이는 종전 이후 연합국 총사령부가 일관해서 인정한 바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는 일본 국적을 갖는 자로 정함으로써 행정적으로는 일본에서 외국인으로서의 조선인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미점령군은 재일조선인의 저항을 억누르고, 그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러한 규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이 규정에 따라 재일조선인의 교육에 일본교육령을 전면적으로 적용한다는 교육정책이 생겨났다.

1947년 10월, 점령군의 민간정보 교육국은 민족교육에 대한 기본방침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조선인의 제 학교는 정규 교과에 추가 과목으로서 조선어를 가르치는 예외를 인정받은 것 외에는 일본(문부성)의 모든 지령에 따르게 할 것을 일본 정부에 지령했다”

요컨대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은 일본의 교육법령에 따라야 하고, 단 조선인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소위 민족교과목의 교수를 부가적으로 허용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지방 군정부도 이 지령에 따른 지시를 각 현의 교육 당국에 내렸다. 예를 들면 효고현에서는 같은 해 12월 10일 군정부 엥겔 교육과장이 효고현의 교육행정 책임자를 불러 헌법 89조에 따라 고베(神戶)의 조선인 학동을 분산시켜 일본인학교로 입학시키도록 권장했다.

재일조선인 교육에 관한 유일한 점령군의 지령이라고 보아도 될 이 방침은 이후 6년간 재일조선인에게서 민족교육의 권리를 빼앗는 근본적 규범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는 재일조선인 교육은 일본교육의 일부분으로 보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 내용이 되었다.

당시 교육행정에 종사한 점령군의 와그너가 그의 저서 제목을 ‘일본의 조선 소수민족’으로 붙인 것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논리적으로는 재일조선인을 일본의 소수민족으로 파악한 방식도 여기에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재일조선인에게는 조선어로 조선인을 위한 교육하면서 여기에 약간의 ‘조선어 시간’을 과외로 설정한 것으로 민족교육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일본에의 동화에 이르게 하는 길임은 명약관화하다. 전후의 새로운 단계에 조응한 새로운 방식으로 재일조선인 청소년의 민족적 주체성을 부정하고, 그들을 일본화시키고자 한 노선의 설정이었다. 따라서 이는 분명히 전전의 동화주의 교육과 본질을 같이하는 것이고, 단지 그 실현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민족교육을 억압한 이유

미점령군의 재일조선인 교육정책은 1947년 10월을 전기로 하여 방치에서 억압으로 변경되었다. 이때부터 점령 기간 내내 미점령군은 한편으로는 일본 정부에 명령을 내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 자신이 나서서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간섭하고 억압했다.

여기에 3가지 의문이 생긴다. 하나는 재일조선인을 억압한 이유가 왜 발생했는가? 둘째, 당시 가장 유효한 단속방법으로서 일본 국적의 강제= 일본법령 전면 적용을 취한 이유가 무엇인가? 셋째, 교육 면에서의 구체화가 1947년 가을 이래 적극화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 3가지는 재일조선인 억압이라는 하나의 과제에 대한 방침 확정과 그 실행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미점령군은 외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탄압할 필요를 느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조선 민중의 민족독립과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의 고양이 미국의 한반도 침략정책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고, 부차적으로 일본점령에도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내용에 대해서 3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첫 번째 요소는, 미국이 동아시아로부터 패퇴하고 있다는 상황이었다. 1946년 3월 처칠의 ‘철의 장막’론, 1947년 2월 트루먼의 냉전선언(전체주의의 침략과 투쟁한다)이라고 하여 사회주의 국가들을 적대시하고, 아시아를 침략하는 미국의 세계정책 형성은 한반도에서는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주의적인 국가를 용납해서는 안 되고’ 이를 위해 ‘남한을 군사적으로 계속 점령하고 나아가 남북한 모두를 군사적으로 점령한다’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민주주의적 개혁들이 착착 진행되었고, 민주혁명의 기지로서의 실력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남한에서 300만 명이 참가한 1946년 10월의 인민봉기와 1947년 4월의 제주도 무장봉기를 두 개의 정점으로 하여 독립투쟁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남북한 인민의 통일운동이 합쳐져 1948년 4월에는 남북의 모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평양에서 열렸고, 통일에 대한 전망이 크게 밝아졌다. 이에 미국의 한반도 점령정책은 파국 지경으로 내몰렸다.

게다가 1947년 9월부터 총반격을 개시한 중국인민군은 장제스의 군대를 조금씩 밀어냄으로써 중국을 지배하고자 한 미국의 꿈은 좌절되고 있었다. 이러한 동아시아로부터 패퇴를 만회할 것을 노리며 미국은 남한의 단독 선거, 대한민국 수립, 한국전쟁의 전개 등 일련의 침략정책을 강행하기에 이른다.

미국의 동아시아로부터의 패퇴는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위치와 역할을 변화시켰다. 이것이 두 번째 요소이다. 1948년 1월 미국 육군장관 로열의 연설이 그 표증이 될 것이다,

로열은 “대일 점령정책의 방향은 강력한 일본 정부를 육성하는 데 있다. 앞으로 극동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새로운 전체주의의 위협에 대해 방어벽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충분하고 안정된 민주주의를 강력히 구축하는 데 있다”며 “일본은 극동의 공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이 아시아의 기지가 되고, 따라서 후방을 교란시키는 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감시의 눈길을 보냈다.

미국과 일본이 이처럼 아시아를 적대하자, 당연히 이는 광복 민족으로서 살고자 하는 재일조선인의 노력과 전면적으로 적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이 세 번째 요소이다. 미점령 군은 재일조선인, 특히 조련을 점령정책의 방해자, 후방기지의 교란자로 파악하였다. 1945년 12월의 월례보고에서 이미 점령군은 조련을 일본의 3대 극좌 정당의 하나로 들었는데, 조련을 본국 공산주의자의 앞잡이임과 동시에 일본 공산당의 강력한 동맹자로 간주하는 견해는 점령군의 지배적인 시각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밀려나고 일본의 아시아 침략 기지화가 강행됨에 따라 내부의 적으로서 더욱 증오감을 더해 갔다. 점령 중 민정국의 지도 간부였던 네피아 중좌는 조련에 대해 ‘일본 공산당의 도구이고’, ‘그 가입자는 모든 조선인을 위해 특수한 권리를 요구하는 난폭하고 무법 한 자들에 의해 지배당하며’, ‘조직은 공산주의자의 독재에 완전히 따른다’고 몰아붙였다.

게다가 그 이상으로 점령군이 두려웠던 것은 재일조선인의 단결력이었다.

예를 들면, 점령군의 월로비 소장은 “오사카 지구의 조선인은 수가 많고, 언제든지 일본인 경찰대를 막아 낼 숫자를 모을 수 있으므로 참으로 위험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점령군은 조련에 결집한 재일조선인을 이처럼 내부의 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1948년 4월 고베 교육투쟁 때는 계엄령을 내려 무력으로 탄압했고, 1949년 9월에는 ‘단체 등 규정령’을 발동하여 조련을 해산시켰다.

이처럼 미국의 한반도 침략정책의 파탄과 반격, 일본의 아시아 침략 기지화, 재일조선인의 민족적 권리에 대한 수호투쟁이라는 여러 요소가 미점령군이 재일조선인 억압정책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한반도 침략과 남북한 인민의 투쟁이라는 모순이 격화된 1947년 가을부터 1948년 여름에 걸쳐 억압정책이 본격화된 것이다.

그 모순이 정점에 달했을 때, 즉 한국전쟁 시기에 재일조선인에 대한 탄압도 가장 철저히 행해졌다.

이와 같은 재일조선인 억압의 정치적 기초와 함께,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측면으로서 점령군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태도가 있다.

태평양전쟁 때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군 장병은 모두 아시아인을 “얼간이들!”이라고 부르며 업신여겼고, 국방성이 정치적 배려의 측면에서 그것을 금지하도록 명할 정도였다.

또 조선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인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럽고 천한 족속이다”라고 내뱉기도 했다. 미군은 전 아시아인에 대해 인종 차별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내보였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정치적 충성도에 따라 다소의 가감을 덧붙였다.

점령 사무에 종사했던 한 미국인의 관찰에 따르면, “미국인의 일본 지배에 대해 일본인은 표면적으로 부드럽게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고, 이는 미국인의 지배를 경시한 조선인의 태도와 분명히 대조적이었다. 이는 미 점령군 사이에 이미 고양되고 있던 일본인에 대한 존중감을 더욱 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에 대한 점령군의 전형적인 태도인 격심한 혐오감을 더욱 조장했다”는 것이었다.

미군은 재일조선인이 민족적 자각을 갖고자 했기 때문에 더욱 인종주의적 증오감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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