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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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호 박사

 

[동양일보]●점령군의 조선인 학교관

그렇다면 재일조선인을 억압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왜 민족교육을 공격한 것일까? 와그너의 이야기는 점령군이 가장 먼저 일본교육의 비 군국주의화에 대략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다음으로 학교제도 개혁에 착수하였는데, 바로 그때 이 조선인 교육문제가 불거졌다고 한다.

즉, “이 학교들(조선인학교)은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총사령부가 처음 시작한 교육개혁의 주류는 이들 학교에 손을 대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교수 요목과 교과서 개정, 교수 방법, 훈련의 보완 시정이 정해진 후, 비로소 처음으로 점령군 총사령부의 민간정보 교육국은 학교 시설과 편익이라는 문제에 온 힘을 집중할 수 있었다”, “일본학교 제도와 기구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계획하고 있었고, 이 기회에 조선인학교도 일본 법률의 범주에 넣고자” 했다,

분명 전후 교육은 교육내용과 제도의 비 군국주의화라는 방침을 세우고, 1947년 신학기부터 시작하여 1947~48년에는 학교시설의 마련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므로 점령군으로서는 한편으로는 일본 국내의 교육 전반을 통할 여유를 가짐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한 교사(校舍)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맞부딪혔다.

당연히 일본인 교사를 사용하고 있는 조선인학교가 눈에 들어왔고, 이에 재일조선인 교육문제에 착수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할 것이다. 그 결과가 1947년 10월의 민간정보국 지령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후 계속된 조선인학교 폐쇄사건을 염두에 둔다면, 일본교육의 재건이라는 목표는 달성했으니 다음 순서는 조선인학교라는 말은 억압의 기회를 찾는 구실은 되어도, 억압의 동기에 대한 설명은 아닐 것이다. 진짜 동기는 투쟁 속에서 나타났다.

1948년 봄, 학교 폐쇄를 반대하는 재일조선인의 투쟁으로 인하여 도쿄 군정부의 조선인학교 폐쇄 동기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조선인 사회의 대표자라고 자임하는 일부 이기적인 인사들은 편벽된 정치적 야심을 채우고자 하고 있었다. 소위 이들 지도자는 그들의 국민이나 가치 있는 교육을 받을 권리와 자격을 가진 조선인 자녀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교육표준을 무시하고, 과격한 논리를 주입시키기 위해 설립한 ‘정치학교’, ‘사회 사상학교’ 같은 것은 사회적으로 지지할 가치가 없다”

조선인학교는 ‘정치학교’이기 때문에 억압한다는 것이 그 참된 동기였다. ‘정치학교’라는 평가는 재일조선인 청소년이 독립국의 공민으로서 성장하고 있었고, 미국의 하수인이 되지 않는다는 데서부터 나온 발상이다. 한 조선인 교사의 체험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1949년 가을 도쿄 군정부 교육담당 장교인 듀펠 대위가 조선인 고등학교를 시찰했다. 대위는 흙이 묻은 군화를 신은 채 교실에 들어왔다.



한 학생이 일어나서 매우 화를 내며, “당신이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흙이 묻은 구두를 벗고 들어오시오”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듀펠은 시뻘게진 얼굴로 “나는 도쿄의 최고 교육담당자이니 구두를 신어도 된다”고 대답했다. 이 말에 학생들이 시끌시끌해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 학교 학생들은 내가 구두를 신은 채 교실에 들어왔다고 비난하였다. 일찍이 많은 일본학교를 시찰해 보았지만, 이런 일은 전혀 없었다. 이 학교는 반미 교육하고 있다”며 그는 잡아먹을 것처럼 화를 냈다.



조선인학교에서 행해진 교육의 민족적·민주적 성질이 미점령군의 눈에는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정치학교’로 비쳤을 것이다. 게다가 민족교육은 재일조선인의 내부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는 재일조선인 단결의 중요한 기반이며, 이 교육사업이 아니고서는 특히 재일조선인 청소년이 일본 국내에서 조선인으로 살아나갈 수 없었다.

민족교육은 재일조선인의 소위 생명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교육에 타격을 가하는 것은 재일조선인의 심장을 타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이 재일조선인을 억압하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민족교육을 선택한 이유였다.



3. 한신 교육사건 : 1948년 조선인학교 폐쇄



●‘제3국인’관의 발생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어떻게 처우하는가는 재일조선인을 어떠한 사회적 존재로 규정짓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이 근본적인 문제는 근본이라는 의미에서 역으로 일본 측의 사상과 의식의 질을 가늠하는 역할이기도 한다.

이 점에 관해서 점령기 일본 국민의 대응은 어떠하였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선진적인 사람들은 재일조선인의 사회적 성격을 파악하지 못했고, 다수의 사람은 ‘제3국인’이라는 전후적 편견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배자로 하여금 조선인학교 폐쇄정책을 쉽게 수행할 수 있게 한 유력한 원인이 되었다.

전쟁 전 일본의 민주주의 운동은 식민지 문제로서의 조선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고, 이론적으로도 일정한 축을 이루었지만, 그 일환으로서의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한 이론적 해명에까지는 눈을 돌리지 못했다. 행정상의 필요에서 관계 부현(府縣)의 민생부가 실태조사를 추진하고, 이것을 재일조선인 문제의 기초자료로 사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또 혁명운동 안에서도 같은 조직 아래서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이 활동하였다. 이를 당연시하는 풍토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이론적 빈약함과 실천 상의 풍토는 패전 후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점령기에 재일조선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달려든 혁신당은 공산당뿐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당초에도 재일조선인을 소수 민족으로 간주하고 일본 혁명의 한편에 위치시키려는 이론적·운동상의 오류를 범했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혁명운동에 참여하였고, 그로 인하여 정부로부터 더욱 적대시 당하고 억압을 받기도 했다. 이와 같은 오류가 시정된 것은 1954년의 난니치(南日)외상의 성명에 이어 1955년 조선총련 연합회가 결성된 이후부터였다. 이 일 이후로 재일조선인 독립국의 재외공민이라는 인식이 서서히 확산되었다.



쇼와 20년대(1945년 이후)의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재일조선인 문제를 비난해야 할 사회문제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고, 이것을 일본의 민주주의의 사상문제(침략을 반성하고 다시는 그 전철을 밟지 않는 사상의 창출)로 끌어들여 생각하는 관점은 미성숙했다.

이와 같은 국민의식 속에서는 반정부적인 운동이 재일조선인을 외국인으로 파악하는 사상적 관점을 가질 수 없었다. 이들이 올바른 방침을 제기할 수 없었다는 것은 바로 점령군 및 일본 정부의 재일조선인 억압정책에 대한 비판세력의 허약성을 의미하였다.

그 뿐 아니라, 일본 민중 사이에 확산되어 있던 종래의 조선 편견을 체크하고, 새로운 형태로 형성되고 있는 조선 편견에 대해 사상적 반격을 가할 기능이 결핍되어 있었다는 것도 의미하였다.

그런데 20세기 일본에서는,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면 정부에 대한 인민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방법의 하나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적대감을 부채질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간토대지진 때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차별 용어를 퍼뜨렸고, 점령기에는 새롭게 ‘제3국인’이라는 차별 용어를 만들어 내어 인민의 불만을 쏟아낼 배수구를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 이 방법은 조선의 문제에 대한 민주주의 운동이 미약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유효하게 작동하였다.

패전 후 민주주의 운동 쪽에 재일조선인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확실한 이론이 결핍되어 있었고, 게다가 이들을 ‘외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다’라고 느끼는 정치적·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을 때, ‘제3국인’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것 속에는 점령기 일본인들이 품고 있던 재일조선인관의 내실이 집약되어 있었다.

원래 ‘제3국인’이라는 용어는 연합국의 측면에서 본 재일조선인의 국제 협상의 지위를 표명하는 용어였다.

즉 연합국과 중립국의 국민을 외국인이라 하고, 일본인과 지위가 같지 않은 ‘종래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던 여러 나라의 국민’을 지적하여 제3국인이라 한 것이다.

이 규정 자체가 재일조선인의 독립민족으로서의 성격을 뭐하게 만드는 문제성을 포함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연합국 측에서 본 재일조선인의 지위에 관한 규정이다. 따라서 일본인이 그것을 그대로 일본과 재일조선인의 관계로 차용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를 차별 용어로 변용시켜 유포시켰다.

예를 들면, 1946년 8월 임시국회에서 진보당의 시이쿠마사브로(惟熊三郞)는 ‘제3국인의 방약무인한 행동에 대한 처치’를 질문하며 “조선인은 모든 암시장의 중핵을 이루어, 그들의 무법한 행동은 오늘날 일본의 모든 상거래와 사회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또 “특히 패전 전까지 일본인으로서 생활해 온 대만인이나 조선인들이 패전과 동시에 마치 자신들이 승전국민이나 된 듯한 태도를 보이고, 그 특수한 지위와 입장을 악용하여 우리 일본의 법규와 질서를 무시하고 감히 방약무인한 행동을 하는 것은 실로 좌시할 수 없는 바이다(박수)”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보다 먼저 7월 국회에서 오무라(大村) 내무대신은 재일조선인이 ”마치 전승 국민이나 된 것 같이 우월감을 갖고 예를 들면 부당요구, 집단폭행, 각종 범죄의 감행, 경제통제의 교란, 무임승차 등 불법·월권행위를, 그것도 자기들 패거리를 믿고 저지르며 민심을 불안케 한 것은 아시는 그대로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검찰 당국도 “조선인 범죄는 전쟁 종료 이래 격증하는 추세”이고 “일본인의 약 9배에 달하는 범죄율을 보인다”며 단속의 강화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와 같이 일본의 지배층은 재일조선인을 광복으로 우쭐해진 포악한 불법 자로 규정하고, 이를 ‘제3국인’이라는 용어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태도에 대해 재일조선인에 대해 민족적 모욕을 주는 언동이며, ‘조선 인민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은 것이라고 강력히 항의하였지만(예를 들면 조련 3전대회), 일본인들은 정부 측의 언사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버렸다.

특히 재일조선인들에 관한 한 정부·매스컴·인민이 일체가 되는 사상은 전전의 지배적 현상이었지만, 패전 후에도 이것은 여전했다.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을 비난하는 어조는 그대로 매스컴의 어조가 되고, 거기에서는 예컨대 “조선인의 전후 생활 태도는 솔직히 말해 일본인의 감정을 불필요하게 자극하고 있었다”는 식의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 대부분의 사람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전후에 이미 형성되었고, 현재까지도 ”최대의 적은, 일본의 패전으로 마치 제 세상을 만난 듯 하이에나처럼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소위 제3국인이었다“ 는 식의 차별 이미지로서 계속 살아남아 있었다.

패전 때문에 광복된 민족이라고 자각한 재일조선인에 대해, 일본의 국가와 사회는 ‘제3국인’이라는 차별 용어와 의식을 지니고 이에 대응했다.

혁명운동에서 이들을 소수 민족으로 간주한 것을 제외하면, 점령기의 일본 사회에서는 위와 같은 ‘제3국인’관이 지배적인 재일조선인 미지로서 정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편견의 눈을 가진 한, 재일조선인이 펼치는 사업들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이해할 수 없으며, 정부의 억압정책을 남의 일처럼 보아 넘기고 나아가 여기에 동조하게 되었다.



●전후 교육정책에서 일본인과 재일조선인(1)

점령기 일본 정부의 재일조선인 교육정책은 미점령군의 지령에 기초하고, 조선인학교에 대한 대책을 주안점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점령군이 억압적인 자세를 강화함에 따라 일본 정부도 강경책을 내세워, 1948년 1월에는 동화교육 정책의 부활 방침을 정했다.

재일조선인의 교육에서 그들의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를 부정하는 정책을 반동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한 정책을 일본 교육의 ‘민주화’가 한창일 때 강행하였다는 것은 지배자가 이 문제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또 그것에 의해 지배자의 정치적 본질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패전 후 일본의 교육개혁은 전전의 천황제 교육체제를 반성하고 그 오류를 바로잡는 방향으로 추진하고자 하였다. 점령군 및 일본 정부는 본심은 아니라 해도, 군국주의의 교육과 관료 중심의 관리 시스템, 차별적인 학교제도 등을 개선하는 방향을 표명하였다.

그런데 거기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전전에 아시아 여러 민족에 대해 자행한 교육 침략을 망각한 채, 동화(식민지)교육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반성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재일조선인 자녀에 대한 동화교육의 강제에 대해서도 반성의 말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정확하게 말한다면, 반성을 필요로 하는 사실이라는 것조차 자각할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후 일본의 교육개혁은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한 정책도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외시킨 채 진행되었다. 특히 일본 정부가 타민족 교육 지배에 대한 책임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점령군이 재일조선인 교육을 억압하는 방침을 더욱 증폭시켜 실시했고, 동화교육 정책을 신속히 부활시킨 사상적인 원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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