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문학박사/진천포석조명희문학관 근무

 

[동양일보]7년 동안 관련 전문 자문 그룹의 헌신적 노력으로 최근 25년 만에 증보 개정되어 출간한 포석 조명희 전집이 세상에 나왔다. 한국문학사에 일획을 긋는 쾌사快事가 아닐 수 없다.

이에 즈음하여 필자는 포석의 생가 복원문제를 이제야 말로 더는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이 글을 쓴다.

집대성된 포석전집을 보면서 또 한 번 느끼는 것은 이 게 보물인데, 이 게 금광인데하는 감탄과 더불어 탄식을 감출 수 없다. 제 아무리 빼어난 국보라고 해도 그 가치를 모르면 천하의 팔만대장경도 흔한 빨래판이 되고 만다. 부끄러운 졸고拙稿지만 부디, 이 글이 지역민에게 포석 조명희 생가 복원의 필연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또 한편으로는 복원의 필연성이 본격적인 공론의 장에서 활성화 되는 마중물이 되길 소망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은 한 사람의 삶의 시작과 끝 즉 시종始終을 말한다. 흔히 복지국가의 책임을 강조할 때 쓰는 말로 영국 사회보장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태어나 요람보다 먼저 만나는 최초의 공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生家이다. 더 세분하여 말한다면 방이지만 집 속에 방이 부속된 공간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집이 한 사람의 탄생과 성장과정의 보금자리이자 세계로 향하는 출발점인 셈이다.

 

아프리카 속담에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성장에 필요한 협력과 정성을 강조한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요람보다 집이 먼저 이듯 이 경우에도 집이 마을보다 선행한다. 마을도 결국 집이 확장된 범위일 뿐이다. 집을 감싼 자연환경과 정서적인 가정환경이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어 한 사람의 성장을 결정짓는 원초적 영향인 까닭이다. 집은 훈육을 통한 가치관과 주변 풍광이 주는 정서가 영향을 미쳐 인격이 형성되는 최초의 거대한 우주이다. 이런 의미에서 집은 한 사람의 성장 배경의 집합체이자 종합 영양소이다.

 

우리 고장 출신(충북 진천) 포석 조명희는 집이 없다. 집이 없으니 마당도 없고 우물도 없고 뜰도 없고 마루도 방도 없다. 집 주변을 감싼 담장과 나무와 화초도 없다. 포석 조명희의 영육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을 유년의 뜰이 존재하지 않는다. 필부필부가 타관에서 잊지 못하며 오매불망하는 것도 집 때문이고, 포석이 낯선 이국을 떠돌며 한 마리 새가 되어 창공을 날라 가고 싶었던 곳도 다름 아닌 집이었다. 더구나 포석은 이미 역사가 된 사람이다. 역사가 된 사람의 집을 보존하거나 복원하는 것은 그가 보통 사람들의 사표이기 때문에 그의 정신을 본받고 기리기 위해서이다. 민족적으로 부끄럽고 또 지역적으로도 면이 안서는 일이다.

 

필자는 이 지점에서 포석을 설명할 때마다 어김없이 반복되는 그의 삶과 문학의 위대성을 다시 언급해야 하는 피로감에 휩싸인다. 역사적으로 공인된 사람인데 아직 그 공인된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포석에 대하여 글을 쓸 때마다 그의 위대성을 다시 한 번 환기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되풀이를 통해 사람들의 인식에 조그마한 변화가 있다면 위대성을 설명하는 피로는 얼마든지 청하여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세계 지성사에 전설이 된 인물들은 이처럼 누군가의 끊임없는 설명과 학습과정을 통해 한 인물의 위대성이 확립되어 간 역사가 아니던가.

 

포석은 한국 근현대문학의 비조(鼻祖)’이다. 한국 근현대문학의 기라성 같은 문학가들이 명멸했지만 포석은 그들 문학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였다. 재평가가 활발하지 못했던 이유는 척박한 이 땅에 일찍 온 천재의 가치를 몰랐던 탓이다. 시대는 야만적이었으며 민중은 우매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으나 그럴수록 그의 몸부림은 강렬했다. 이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 금서禁書로 묶였던 그의 작품을 우리는 마음껏 향유하는 좋은 세상을 산다. 이제 우리는 야만적 시대에 살고 있지도 않으며 또 우매한 민중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답해야 할 의무 속에는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영육이 잉태되고 태어난 생가() 복원의 응답이 포함되어야 한다.

 

전국문학관협회에 가입된 87개의 문학관 중, 사람 이름을 딴 문학관으로서 생가 없는 문학가는 포석이 유일이다. 문학사의 비중이나 위상으로 볼 때 참담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포석에 비해 위상이 떨어지는 작가들도 생가 보존은 물론, 일찍이 복원이 마무리 된 상태이다. 작가 이름을 딴 문학관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생가가 있다는 걸 반증하는 일이다. 사실 지역 출신의 명망 있는 작가를 기리기 위해서는 문학관보다 생가가 먼저이다. 생가는 문학관을 세워 그의 문학정신과 삶을 기릴 정도로 뛰어난 인물의 탯줄이 끊긴 자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모든 생명이 태어난 시원의 장소는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크다. 하물며 사람인 바에야, 더구나 그 인물이 장차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될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면 이는 불문가지이다. 역사적인 신화와 전설을 보더라도 영웅 탄생의 징조에는 여러 이적異蹟들이 나타난다. 집은 이러한 큰 인물 탄생의 비의秘義와 정기가 서린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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