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문학박사/진천포석조명희문학관 근무
진천은 지금 하루가 다르게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지역이다. 더구나 포석 생가의 위치는 진천의 ‘관문(숫말)’으로 상업지구이다. 이 순간에도 크고 작은 건물들이 경쟁하듯 들어선다. 앞으로 대단위 복합건물인 고층건물이나 아파트가 들어선다면 설령 생가 복원의 여건이 조성된다고 해도 쉽게 진행되지 못할 가능성이 큰 게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가 급하다. 복원은 개발에 의해 훼손되거나 사라진 원형을 본래의 형태로 되돌리는 일이다.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면서까지 콘크리트 복개를 걷어내고 ‘청계천(자연하천)’을 살린 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초 청계천 복원은 특별한 경제적 가치로 접근한 게 아니다. 원형을 찾자는 단순한 바람으로 시작했으나 결과는 경제효과는 말할 것도 없고 시민들의 문화적 삶이 풍요로워지는 순기능으로 입증된 대표적 사례이다.
지역 출신 예술가를 기려 ‘문화산업(랜드 마크)’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이제 어느 지자체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지역 출신 작가가 없는 지자체에서도 명망 있는 작가를 초빙하여 정주 환경을 만들어 주며 창작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지역 문화의 질을 높이고 대외 이미지 제고에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남들도 부러워하는 위대한 작가가 태어난 곳이다. 천금을 주어도 위대한 작가가 태어난 집과 그 집이 있는 고향을 살 수는 없다. 영국인에게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국보 중에 국보이다. 그 중에서 그의 고향 집인 ‘스트랫포드 어폰 에이번(Stratford-upon-Avon)’이 갖는 인문적 자긍심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숱한 여행객들을 불러 모아 천문학적 경제효과를 창출한다. 괴테의 고향인 독일 ‘프랑크푸르트’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이웃 지역인 ‘옥천’을 봐라. 정지용의 생가 없는 ‘향수’를 상상할 수 있을까. 또 향수에서 노래한 ‘실개천’과 ‘얼룩배기 황소’를 상상할 수 있을까. 포석 조명희는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화수분인 ‘황금’을 우리 지역에 선물로 주고 갔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얘기는 ‘완물상지玩物喪志’를 경계하라는 금언인 것이지 진짜 황금을 돌로 보라는 문외한門外漢을 얘기한 게 아니다.
끝으로 포석 조명희문학관에 근무하면서 필자가 경험한 잊지 못할 한 장면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작년(2019) 12월로 기억되는데 50대 후반 쯤 돼 보이는 관람객(남)이 반나절 이상 전시관을 둘러보고 갔다. 대개 전시관을 들러보는 일은 피상적으로 일별하며 지나가는 게 보통인데 그 분은 어찌된 일인지 하나의 섹션 앞에 장승처럼 오래도록 서 있었다. 전시된 사진과 내용물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정독을 했던 것이다. 흔치 않은 관람객이라 내려가서 물어보니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을 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데 친구들과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던 중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 알리세르의 나보이 국립문학박물관 ‘조명희 기념실’를 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조명희’란 이름을 처음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 조명희란 사람을 알게 되었고 머나먼 이국땅에 그를 기념하는 공간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문학비가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경이로웠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위대한 문학가요, 독립운동가인 인물을 몰랐던 의문이 쉽게 사라지지 않아 ‘포석 조명희’란 인물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그의 고향 진천을 직접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생가가 어디냐고 물어보는 게 아닌가. 방문하는 장년의 관람객 대다수가 언제나 묻는 곤혹스러운 질문이다. 문학관과 생가를 포석의 생애를 직접 아우르는 두 축으로 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텐데, 당장 포석의 생가가 없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지 난감함이 엄습하곤 한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 포석 조명희는 이런 사람이다. 앞으로도 한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망명의 땅 러시아를 여행할 것이다. 진천을 방문했던 그 장년의 관람객처럼 그들도 현지에서 충격적으로 포석과 대면하게 될 것이며 동일한 역사적 의문을 품고 그의 고향 진천을 떠올려 볼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국내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포석 문학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이국에서 포석을 만나는 생소한 충격을 없앨 수 있다. 해방 전후 남북의 교과서에 수록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할 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우리가 북간도 ‘명동촌’과 일본 동경의 육첩 ‘하숙방’에서 윤동주의 흔적을 봤다고 생소한 충격을 받지는 않는다. 교육을 통해 오래전부터 학습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포석을 이국땅에서 만나 충격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하며 그 몫은 오로지 우리에게 있다. 이렇듯 포석 문학은 우리의 능동적 의지 여하에 따라 미래가 더 기대되는 요소가 많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부터 진천을 방문할 수많은 잠재적 관람객들을 우리가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 고민의 시작과 실천이 바로 ‘생가 복원’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