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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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10월 23일 수요일

80대 여성시인 이월순씨에게 시는 무엇인가? 직업시인이나 시전문가가 쓴 난삽한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위화감 같은 것이 전혀 없는, 평범한 노년기 여성시인이 나즈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들려주는 고백시가 내게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조용한 자극제다.



시는 나의 대변자

말할 수 없는 실망감에 빠져있을 때

시는 어머니처럼 다가와

나를 일으켜 달래주었습니다.

시는

베게위로 흐르는

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속박감에

자유를 부르짖을 때

시는 해방으로 다가와

나를 탈출시켜 주었습니다.

이유 없는 호통 속에 나는 기죽어

여자임을 한탄하고 울고 있을 때

시는 나에게 다가와

이런 때는 시를 써서

네 설움을 토해내라고

권면을 합니다.

-이월순 ‘내손에 봉숭아물’ 64세의 한 여인이 지난날을 회고하며 쓴 이야기 시집



현재 80대의 한 여성이 약 20년 전에 쓴 시지만, 그 후의 인생역정에서 시는 늘 변함없이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자기발산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데 훨씬 젊은 남자인 의사 시인에게 시는 무엇이었을까? ‘진찰실’이라는 시를 통해서 그의 생각에 다가가 본다.



시는 혈압계이다.

청진기이다.

내시경이다

X-레이이다.

시인은 약손이다.

알약이다.

메스이다.

活命水이다.

시집은 신호등 없는 푸른 십자로

모든 이들이 사방에서 들어왔다가

Soul 통한 기호의 화랑을 돌곤

팔방으로 나간다.

-송세헌 시집 ‘굿모닝 찰리 채플린’



이월순 여성 시인에게 시는 믿음이요 소망이요 사랑이구나라는 느낌이 든다. 송세헌 의사시인에게 시는 의료기구인 것 같다.

나에게 시는 무엇일까? 박목월 시인에게 내가 고등학생일 때 썼던 시 백편을 보내서 지도해주기를 간청했었다. 그는 나의 시에 대해 논리가 너무 강해 정감이 위축되어 있어, 시정이 담겨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인의 길보다 학자의 길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버렸다. 그러나 내게 시는 삶이요 목숨이요 숨결이다. 다만 지금은 시를 쓰지 않을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의 세월을 거슬러 30대 후반에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보았던 잊을 수 없는 뮤지컬영화 ‘라만차의 사나이’(1972 첫 상연)중에서 주인공 돈키호테(작자 세르반테스이기도 하고 시골의 향사=鄕士 아론소 키하노이기도 함)가 부르는 주제곡=이룰 수 없는 꿈(The Impossible Dream)은 80대 후반을 살아가는 나의 인생살이를 다채로운 색으로 아름답게 가꾸어주고 있는 더없이 귀하고 고마운 위로, 격려, 그리고 영감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을 지니고

결코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견디어내고

용사도 감히 가지 못하는 곳으로 달려가고

바로잡을 수 없는 부정을 바로잡고

멀리서 순수하고 고귀한 사랑을 나누고

너의 두 팔이 너무나 지쳐있을 때도 노력하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별에 도달하려는 것

그 별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나의 탐구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아무리 요원해도

의심도 없이 멈춤도 없이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것

하늘의 뜻이라면 지옥에라도 기꺼이 가고

이 영광스런 탐구에 충실할 수 있기만 하면

내 심장은 마침내 평화와 고요 속에서

안식을 취하게 되리라는 걸 나는 알아

그리고 이 세상은 훨씬 더 좋아지리라

멸시당하고 상처투성이인 한 사나이가

그의 마지막 한 방울의 용기마저 쏟아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별에 도달하려고

아직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렇게 번역해 놓고 보니 영어 노랫말의 역동적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것 같은 아쉬움이 느껴져서, 원문을 병기함으로써 젊었던 그 시절의 감흥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 싶다.



To dream the impossible dream

To fight the unbeatable foe

To bear with unbearable sorrow

To run where the brave dare not go

To right the unrightable wrong

To love pure and chaste from afar

To try when your arms are too weary

To reach the unreachable star

This is my quest, to follow that star

No matter how hopeless, no matter how far

To fight for the right

Without question or pause

To be willing to march

Into hell for a heavenly cause

And I know if I'll only be true

To this glorious quest

That my heart will lay peaceful and calm

When I'm laid to my rest

And the world will be better for this

That one man scorned and covered with scars

Still strove with his last ounce of courage

To fight the unbeatable foe

To reach the unreachable star



여러 해전에 중국북경대학에서 강연했을 때였다. 공자가 말씀하신 앎을 쌓는 사람=知者와 덕을 쌓은 사람=仁者 가운데 어느 쪽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느냐는 어느 철학과 대학원학생의 질문에 나는 지자도 인자도 아닌 探子=탐구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내 자신의 삶의 태도를 끝없이 찾고 또 찾는 삶이라고 했던 것은 그보다 훨씬 전에 미국뉴욕에서 만났던 이 노랫말에 연유하는 것이다. 80대 후반을 살아가는 나의 밑바탕에는 아직도 돈키호테의 이룰 수 없는 꿈이 명동(鳴動)하고 있다.



10월 24일 목요일

우리 사회는 초고속으로 장수사회가 되어간다. 인생 50년 시대가 인생 100년 시대로 바뀌어가고 있다. 65세 이상을 노년이라고 말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75세 이상을 장수자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장수자가 극히 드물었던 때 장수는 축복이었다.

그러나 대중장수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전체인구에서 장수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일상생활현장에서 빈번히 마주하게 되자 부담이 되고 재앙으로 변질되고, 그래서 이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말았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이 뜻하지 않게 너무 오래 살게 되었는데 사회나 국가가 의식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적절하게 대응할 준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일찍이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 현상‧ 사건이기 때문에, 신빙할 만한 선례나 자료나 지식이 축적되어 있지 않다.

아직 모든 것이 시행착오와 암중모색의 단계에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사회가 당면한 최긴급 과제는 어떻게 오래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알아서 삶이라는 가장 고귀하고 커다란 축복을 의미 있게 살리느냐이다.

다양한 시도가 진지하게 행해졌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다. 많은 연구가 있었고 정책이 세워졌고, 법적 행정적 대응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실감‧ 공감‧ 공유할 수 있는 성과가 나오지 않았고, 문제는 오히려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을 뿐이다. 저출생‧ 저성장‧ 초장수화, 이 삼중의 위기적 사태진전에 직면하고 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장수하는 사람들은 ‘과학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숫자로 통계처리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진단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애잔하고, 학술지에 실리기에는 영구불멸의 존재’다(George E. Valliant 하버드대학 교수가 ‘Adaptation to Life’란 책 속에서 했던 말).

그들이 무엇을 하느냐를 따지기 전에 그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자체가 인간의 삶의 아주 새로운 차원, 지평, 세계를 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수는 그 자체가 개래요(開來=미래를 여는 것), 개신이요(開新=새로움을 여는 것), 개벽이다(開闢=새하늘‧ 새땅‧ 새사람을 여는 것).나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은 장수를 골치 아픈 문제로 보지 말고—물론 그런 현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아주 새로운 기회개발의 계기로 여기자는 것이다. 젊을 때나 중년기와는 다른 종류의 기회를 열고 키우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 자신은 개인적으로 장수철학을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정립해서, 대중장수사회가 어둡고 불행한 사회가 아니라, 밝고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는 방향으로의 의식개혁을 위한 원동력을 마련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10월 25일 금요일

나는 우리말의 ‘사람’을 ‘삶을 아는 자=인격체’라고 뜻풀이한다.

한자어로 바꾸어 말하면 생(生)의 자각자(自覺者)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자어의 ‘인간(人間)’이라는 말도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는데, 본래의 의미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는 자라는 것이다.

‘사람’은 삶의 뜻을 스스로 깨닫는 존재임을 나타내는데 비해서, ‘인간’은 자기와 타자와의 사이에 있는 관계적 존재자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람’은 삶을 자각하는 깊이와 높이에 따라 사람됨의 수준이 판별되는데, ‘인간’의 경우에는 관계성의 정도가 인간됨의 척도가 된다.

사람은 영어로 ‘human being’이라고 하는데, 신이나 동물이 아니고 인간임을 명시하는 말이다. 여러 가지 존재자가 있지만 인간으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는 ‘human being’보다는 ‘human becoming’을 더 좋아한다. 사람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나이 들어가다가 마침내 죽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사람이란, ‘삶을 아는 자=인격체라’는 것이 내 생각이라고 말했다. 삶의 참뜻을 알고 깨닫는 깊이와 높이와 넓이는 태어나서 나이 들어가다가 마침내 죽는 전(全) 과정인 생애, 수명을 통해서 심화‧격상‧확장되어간다. 결코 도중에서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됨이 거기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잘 나이 든다는 것(well-aging)에 대한 논의가 다양하고 왕성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설이 나이 드는 과정을 오래도록 겪어보지 않은 중장년세대의 추정 또는 추리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85년쯤 살아보니 삶은 결코 개체생명만이 아니라 그것을 태어나게 해주고 나이 들게 해주고 언젠가는 다시 포근하게 받아서 안아주는 우주생명과 함께한다는 것을 알고 깨달아가는 오직 한번만 허용된 기적적인 사건이다. 그저 감동‧ 감격‧ 감사할 일이다.

잘 산다는 것(well-living)은 잘 태어나(well-born)서 잘 나이들다가(well-aging) 잘 죽는 것(well- dying)이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모두가 잘 갖추어진 상태를 ‘잘 있음(well-being)=행복’이라 말들 하는데, 이 ‘잘(well)’이라는 말의 깊은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여기서 ‘잘(well)’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개체생명이 개체생명만으로 끝나지 않고 우주생명과 서로, 제대로, 온전히 아우러져서 개체생명이 제 몫을 다하고 나면 고스란히 우주생명으로 돌아가 하나가 된다는 생명이치의 확인이다.

‘잘(well)’이라는 말 안에 건강과 행복과 성취의 깊은 뜻이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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