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동양일보]●조선인연맹 해산
지배자는 교육의 경영을 자기의 정치적 이익에 맞추어 바라보고, 그것에 조응하는 ‘교육’ 논리를 추구한다. 이것은 재일조선인 자녀에 대해서는 동화교육의 논리로 나타났다.
미국과 일본의 지배자는 한신교육사건으로 이를 강행했다. 이와는 달리 아동의 민족적인 성장 발달의 권리를 축으로 하는 교육 논리를 중시하면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치 구상이 요구된다.
조선인학교의 교육은 그 새로운 정치의 양태를 북한 체제에서 보았다. 북한이 성립된 이래 이러한 제국주의적 정치교육 논리와, 민주주의적·민족적인 정치교육 논리는 한층 모순을 격화시켰다.
그것이 1945년 10월의 조선인학교 폐쇄 명령으로 지배자가 다시 공격을 가한 원인이다.
1948년부터 1949년에 걸쳐 동아시아 정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성립, 남한의 4·19혁명, 중국 인민의 전국적 해방 등 인민 해방투쟁이 발전하고, 미국의 침략정책을 궁지로 내모는 양상을 보였다.
미국은 반격을 위한 전쟁 준비체제를 갖추고, 일본의 ‘극동의 공장’화와 ‘침략기지’화를 꾀하며 비판세력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1949년에는 시타야마(下山)사건(5월), 미타카(三鷹)사건(7월), 마츠가와(松川)사건(8월)이 조작돼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과 반공화가 꾀해지는 한편, 일즈(Walter Crosby Eells)를 선두로 교육·문화의 분야에서 반공화와 빨갱이 추방이 추진됐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재일조선인 운동은 북한 측 노선에 서서, 한편으로 조선 민중의 반미통일운동의 일환으로 활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민주운동과 결합해, 그 자체가 반미 비판세력이 됨과 동시에 조·일 양국 국민의 국제 연대 행동을 강화하는 성격을 객관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을 기지로 삼아 한반도를 침략하려 한 자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배제해야 할 운동이고, 단체였다. 또한, 조선인학교는 그러한 재일조선인 운동의 중심적인 사업이었고, 그 운동을 더욱 강력하게 지속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지배자의 눈에는 똑같이 배제해야 할 ‘정치적’ 존재로서 비쳤다.
일본을 한반도 침략의 견고한 기지로 삼을 필요가 급속히 강화됨에 따라 후방에서 계속 힘을 키워가고 있었던 ‘교란 분자’를 단속할 필요성도 커졌다. 이에 그 법적인 중심 수단으로서 ‘단체 등 규정령(이하 단규령)’이 제정됐다(1949년 4월).
단규령은 법무 총재가 어떤 단체의 목적이나 행위를 점령정책 위반 또는 폭력주의 단체로 인정한 경우, 그 단체의 해산을 명할 수 있게 한 치안입법이었다. 요컨대 미국의 정치 논리를 일본 국내에서 실현할 수단이었다.
따라서 이 법을 최초로 적용한 것이 1949년 9월의 조련 및 조선민주청년동맹의 해산이고, 이를 통해 재일조선인 운동을 비합법화시킨 다음 1950년 6월에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과 기관지의 비합법화를 꾀한 것도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렇다면 억압의 대상이 되어 있는 정치의 질을 옳다고 가르치는 교육을 그대로 두지 않으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단규령은 1952년 강화조약 발효 후 파괴활동방지법으로 계승되어 오는 데에 이르고 있다.
1949년 9월 8일 ‘공화국 창건 1주년 기념일’ 전날 법무 총재는 “전국 각지에 걸쳐서 종종 점령군에 대한 반항 반대, 또는 폭력주의적 범죄를 일으켜 포츠담 선언을 충실히 이행하며 평화로운 민주국가를 재건하고 있는 일본 국민 생활의 안전에 대해 중대한 위협을 가해 왔다”는 것을 이유로 조련(구성원 366,792명)의 해산을 명했다.
조련을 점령정책 위반 및 폭력주의 단체로 볼 수 있는 사례로서, 북한 국기의 게시, 한신교육사건, 다이라사건(平事件: 일본 공산당의 입간판 철거에 대해 군중이 다이라 시의 경찰서로 몰려가 항의한 사건) 등을 꼽고, 그 운동과 존재 하나하나를 모두 단규령 위반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해산명령은 중앙본부에서부터 지부-분회-반에 이르는 전 조직을 대상으로 하였고, 또 조직이 소유한 건물·토지·비품으로부터 집기·전화까지 일체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소위 뿌리를 통째로 뽑는 탄압이었다.
그리고 그날 무장경관을 동원해서 전국의 조련 사무소를 습격, 근무자를 도시락통 하나만 들려 내쫒고 강권적으로 해산을 강행했다. 1년 후에 행해진 일본 공산당 탄압도 이 정도로 전면적이고 철저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혹한 조치는 지배자가 재일조선인 운동을 얼마나 적대시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이날, 전국의 재일조선인은 분노와 눈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도발에 말려들지 말라’며 ‘인민항쟁가’를 부르며 애끊는 심정으로 무장경관의 대열을 헤치고 사무실을 뒤로 한 채 물러났다. 허남기는 경관에게 포위된 사무실에서 ‘양치(羊齒) 종족의 부활’이라는 분노의 시를 내치듯이 읊었다.
아, 너희 양치 종족이여/겨우 4년/아직 불타 문드러진 철골도 함석도/모두가 가을비에 그대로의 모습으로 젖어 있는데/너만은, 일찍이 옛 모습을 되찾아/이제 군화 소리도 삼엄하게/이 건물을 에워싸고 있다/너 일본 군국주의여!/우리는 이/60만의 피눈물로 쌓아 올린 건물 옥상에서/개미처럼 떼 지어 윙윙거리는 너희들과/이제 잠시 이별을 고하노라/너희 양치 종족이여!/그러나 기억해 두는 것이 좋으리/양치의 세상 뒤에, 빙하시대가 계속될 것을….
이와 같은 재일조선인의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는, 그러나 일본 국민 사이에서 거의 공유되지 못했다.
김달수는 그날 저녁 전차로 귀가하던 중 조련 해산 기사를 읽는 일본인 승객의 무표정함을 지켜보면서 “격심한 고독감을 느꼈다”고 한다.
일본인의 내면에 축적된 조선인에 대한 오해가 통째로 돌발적으로 표면화된 순간, 완전히 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매스컴은, 당국자의 말에 따르면 ‘당국의 처치에 모두 절대적인 찬동을 보내는’ 상황이었다. 요미우리신문은 9일 자에 ‘종전 후 우리 일본 국민은 지나칠 정도로 굴복해져 있었다. 제3국인의 폭행·협박에 대해서도 힘 앞에 굴복하라는 식이었다’는 사설을 실었고, 아사히 신문도 10일 자 사설에 ‘조련이나 민청의 활동은 …폭력적 경향을 가진 단체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명기했다.
이와 같은 여론은 일본 정부의 재일조선인 정책에 용기를 북돋워 주어 다음 단계로 옮아가게 했다.
조련은 조선인학교의 조직과 경영의 기초였기 때문에 그 해산은 조선인학교의 토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조련 해산 때 우에다(殖田) 법무 총재가 “학교는 조련의 재산이지만, 접수하지는 않겠다”고 언명했으나, 오히려 정부는 ‘조련의 해산을 보다 효과적으로 행할 목적으로’ 그 다음으로 조선인학교의 폐쇄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조짐은 조련 해산의 사유 중의 하나로 든 한신교육사건에 대한 평가에서 엿볼 수 있다. 거기에서는 ‘조련 단체가 관리하는 재일조선인 제 학교에 일본 교육법령 위반으로 폐쇄 명령이 내려지자, 고베·오사카 각 본부의 간부와 부원은 대거 오사카·효고의 부현청을 습격하고 지사와 기타 관공리에 대한 폭행·협박·감금 등의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앞의 폐쇄 명령의 철회를 강요하며 소란을 피웠다. 게다가 점령군 헌병을 폭행 억류하여 점령군에 반항하였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조선인학교를 수호하는 운동은 점령정책에 반항하는 폭력적인 행동으로 간주했다.
이처럼 조선인학교를 수호하는 운동을 정치적으로만 파악하는 시각은 그대로 조선인학교로 옮겨져 거기에서 행해지는 교육의 정치적인 질을 문제 삼았다. 문부성은 법무부와 똑같은 시각에 따라 10월 19일 조선인학교의 폐쇄 이유를 두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일본의 교육법령에 따른다는 ‘원칙을 무시하고 모든 문제에 대해 항상 투쟁적 태도’를 취한 점, 둘째, ‘현존하는 조선인학교는 대부분 지난번 점령군에 반항한 것 등의 이유로 해산된 조련의 산하 조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위 북한의 입장에 따르는 조선인학교는 ‘질서’를 파괴하는 정치학교라는 인식이고, 그러한 인식 하에서는 조련을 해산한다면 당연히 조선인학교도 폐쇄해야 한다는 논법이 나오는 것이다.
●조선인학교 폐쇄 명령(1)
1948년의 조선인학교 폐쇄 명령이 그 대상을 교육 측면으로 좁혀 재일조선인의 독립성에 공격을 가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번 경우는 재일조선인의 조직과 운동을 억누른 후 학교 폐쇄를 강제하려 한 것이기 때문에 한신교육사건보다 공격의 성격도 더 전면적이고 철저했다.
따라서 조선인학교의 존속이 가능할지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그 위기의 정도도 훨씬 심각했다.
조선인학교를 폐쇄하고자 한 일본 정부의 의도는 재일조선인 학생에게 동화교육을 함으로써 완성된다. 점령기에는 그것이 취학의무제로서 정책화됐다.
이러한 의도는 한신교육사건 당시보다 더욱 엄격한 형태로 재차 확인되는데, 여기에 조련 해산의 일환으로서 제2차 조선인학교 폐쇄가 시작됐다.
‘조선인학교 설치방침’을 정한 10월 12일의 각의 결정은 바로 그 개시를 알리는 것이었다. 각의에서는 세 가지 방침이 결정됐다.
① 조선인 자녀의 의무교육은 공립학교에서 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할 것.
② 의무교육 이외의 교육하는 조선인학교에 대해서는 엄중히 일본의 교육법령과 기타에 따르게 하고, 무인가학교는 이를 인정하지 말 것.
③ 조선인이 설치하는 학교의 경영 등은 자가 부담으로 해야 하고 국가 또는 지방공공단체는 ①의 원칙에 따라 당연히 원조할 필요가 없다.
이 각의 결정은 1949년 봄에 추진된 재일조선인에 의한 교육비 획득 운동을 부정함과 동시에 다시 재일조선인 학생에 대한 동화교육 방침을 확정하고, 조선인학교의 민족운동 실질을 부인한 것이다.
이에 기초해서 바로 다음 날인 13일에 문부성 관리국장과 법무부 특별심사국장은 연명으로 도도부현 지사 및 동 교육위원회 앞으로, ‘조선인학교에 대한 조치에 대하여’라는 장문의 통달을 보내고, 조선인학교 폐쇄를 실행에 옮겼다. 통달의 골자를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학교 폐쇄 문제가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1)구 조련의 본부, 지부 등이 설치한 학교에 대해서는 설치자를 상실하였으므로 당연히 폐교된 것으로 처리한다. (2)무인가 조선인학교는 해산하도록 권고한다. 이에 응하지 않는 학교는 2주 이내에 인가신청을 내게 하고 신청하지 않는 학교는 폐쇄한다는 두 가지 조치가 지시됐다. 민단계 학교에도 후자의 조치는 적용됐다.
다음으로는, 교육의 운영과 내용에서 조련의 영향을 배제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열거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구 조련의 주의·주장·행동을 선전·지지하는 일체의 경향을 불식시키고’, 구 조련의 구성원을 학교경영의 주요 임원에서 배제할 것, 또 명칭 등도 ‘조련을 상기시킬 만한 자구를 삭제시킬 것’ 등을 지시하고, ‘PTA, 교육자 동맹, 동창회 그 밖의 학교와 관계가 있는 단체에 대해서도 단규령을 적용하는 것’으로 했다.
이러한 조치를 위반하는 학교에는 폐쇄를 명령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들은 사립학교 인가신청을 냈을 때 심사기준으로 활용되고 조선인학교 폐쇄를 사상적으로 합리화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법령을 준수하지 않고 폐쇄 명령을 받은 학교 및 구 조련의 해산에 따라 당연히 폐교되는 학교 및 사실상 경영이 곤란해진 학교에 다니는 아동 학생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공립학교에 수용하도록 그 조치에 만전을 기할 것’이 명시돼 있다.
조선인학교 폐쇄→재학생의 일본인 학교의 전학→동화교육의 체계화라는 민족교육을 억압하는 정부 정책의 논리 구조가 1948년에 이어서 재현된 것이다. 더구나 ‘조련’색의 불식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이는 이제 막 출범한 북한의 정치와 교육 노선에 따르는 교육을 적대시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10월 13일 통달은 조선인학교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성질을 구실 삼아 조련 해산=재일조선인 운동을 비정치화시키는 일환으로서, 요컨대 단규령의 보완으로서 기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통달의 주안점인 학교 폐쇄는 2단계 조치 때문에 집행됐다. 즉 제1차 조치는 10월 19일 오전 8시를 기해서 조련이 경영하는 학교로 간주한 92개 교(소학교 86, 중학교 4, 고교 2)에 대해 폐쇄를 통고함과 동시에, 다른 245개 교(소학교 223, 중학교 16, 고교 6)에 대해서 학교 개조(2주 내에 사립학교 신청 수속을 밟을 것)를 권고한 것이었다.
계속해서 11월 4일에는 제2차 조치로서 앞서 개조를 권고한 학교 중 여기에 응하지 않은 약 120개 교는 자동 폐쇄된 것으로 보고, 다른 한편 신청 절차를 밟은 128개 교에 대해서는 문부성에서 일괄 심사해 백두학원(오사카 중립계)이 경영하는 소·중·고 3개 교를 사립학교로 인가한 외에는 모두 인가하지 않고 폐교를 명했다.
이리하여 10월 19일 제1차 폐쇄와 11월 4일의 제2차 폐쇄로, 1개 학원을 제외한 전국의 약 350개의 조선인학교가 일제히 비 합법화됐다. 이는 조선인학교의 전후 역사에서 최대의 수난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