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문학박사·진천포석조명희문학관 주무관

 
강찬모 문학박사·진천포석조명희문학관 주무관
강찬모 문학박사·진천포석조명희문학관 주무관

 

[동양일보]8월 10일은 포석 조명희(1894~1938) 탄신 제127주년이 되는 날이다. 망국의 징후가 뚜렷한 척박한 시대에 태어나 ‘문(文)’으로 세상을 변혁하고자 간난신고(艱難辛苦)의 길을 걸어간 저 도저(到底)한 사내의 삶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이러한 일이야말로 아직도 분단이 엄연한 현실에서 강고한 이념의 벽을 깨고 민족정신을 복원해 통일로 가는 실마리가 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필자는 포석 조명희 순국 제82주기(1938.5.11.~2020. 5.11)에 즈음해 본 신문에 3회에 걸쳐 그의 삶과 문학을 연재(2020.5.13.~5.15)했다. 글의 대강은 한국 근현대문학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분단(이데올로기)으로 인해 저평가된 그의 문학의 진가와 의의를 살폈다.

큰 족적 중 하나가 문학의 각 장르와 삶의 행로에서 얻어진 ‘최초’라는 미증유의 독보적 선구성이다. 이러한 장르의 선구성은 문학의 형식에 주로 근거한 최초로, 희곡집인 ‘김영일의 사’(1923)가 그러하고 시집인 ‘봄 잔디밭 위에’(1924)가 그러하며 소설 ‘낙동강’(1927)의 본격 프로소설의 성격이 그러하다. 일제 강점기 최초의 ‘망명’ 작가도 그가 걸어간 삶의 이정표이며 재소 한인문학의 씨를 뿌린 것도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에서 지금까지 간과한 또 하나의 위대함이 있으니 바로 한국문학사에서 최초로 ‘강(江)’이라는 국토 지리의 ‘장소’를 문학적으로 수용하며 우리 민족의 상상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이다.

이는 문학사적으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각 민족에게 강이 갖는 역사성이 민족 구성원들의 삶과 동일성을 띠기 때문이다. 즉 강과 삶이 하나의 ‘터전’으로 어우러져 있다는 것이다.

한 인간에게 장소는 세계와 맺는 관계와 경험이 체화되는 공간으로 모든 자연적 환경을 망라한다. 인본주의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장소는 머무름이고 개인들이 부여하는 가치들의 안식처이며 안전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중심처”(‘공간과 장소’, 대윤, 2007)라고 말하며 이 같은 장소에 대한 애정을 ‘토포필리아(장소애, topophilia)’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이렇듯 강은 땅과 더불어 인간을 비롯한 뭇 생명들의 삶의 터전이며 생존의 기반이다. 강을 어머니의 ‘젖줄’로 비유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인류 4대문명의 발상지가 강을 끼고 있는 것만 봐도 생명의 근원으로서 ‘강(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촌락 형성의 기본이 물이며 심지어 동네의 흐르는 작은 실개천조차 생명의 서식지가 된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빚은 문명의 위기 속에서 강은 ‘생태주의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다. 강을 의지한 삶이 궁극적으로 확장된 형태가 민족인데 강은 그들 민족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상징으로 기능을 한다.

포석은 이러한 의미를 갖는 ‘강(낙동강)’을 우리 문학사의 중심으로 끌어들여 민족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확립했다. 강이 은유하는 변방의 상상력을 역사의 한복판으로 견인했다.

포석의 생애에서 ‘고향(진천)’과 ‘구포벌(부산)’-낙동강 하류 지역-은 불원천리(不遠千里) 생각해봐도 선뜻 연관성이 적어 보인다. 포석이 스스로 말한 육성이 없기 때문에 장소 선택의 배경은 영원히 미궁으로 남게 됐지만 문우 이기영에 의하면 포석은 낙동강을 쓰기 위해 3개월 동안 낙동강 주변을 현장 답사했다고 한다. 현장 답사는 취재를 겸하는 것으로 이는 그림으로 치면 채색하기 전 전체 그림의 구도를 보완하거나 확인하는 마지막 검증 작업에 해당한다.

낙동강이란 지명과 장소를 마음속에 두고 설계하는 밑그림은 이미 대략적인 윤곽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포석은 위에서 언급한 강(낙동강)이 지니는 역사의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문학으로 승화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는 것인데 낙동강을 소설의 배경으로 선택한 분명한 목적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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