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10월 27일 일요일 오전
이른 아침 산책로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제일 먼저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이 남들보다 느린 나의 걸음걸이다. 많은 사람들이 느린 걸음걸이를 노화현상의 특징 중 하나로 지적한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다른 사람들의 걸음은 가령 하루에 1.5 km를 걷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해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걷거나 아니면 속도를 올려서 땀이 나도록 하기 위해서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든지 여러 가지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 또는 방법으로 걷기 때문에 앞만 바라보고 빨리 걷는다.
그런데 나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걷는 게 아니고, 걷는다는 행위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 걷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속도를 조절하면서 천천히 걷는다.
그래야 하늘의 모습이나 길옆의 풍경이나 바람의 감촉을 감상하면서 나 자신의 신체적 자기조절과 정신적 정리정돈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
때로는 동쪽 우암산 꼭대기에 수줍은 듯 낯을 가리는 해돋이가 유난히 곱기도 하고 때로는 아직 미련이 있어 서쪽 하늘에 살며시 남아있는 달 모양이 애잔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갈대들이 가벼운 춤을 추는 모습에 가슴속에 잔잔한 율동이 파도치는 듯한 쾌감에 젖으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때문에 거의 속도자체가 소실된다. 그러니 어찌 걸음걸이가 늦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딴에는 철학하면 걷는 것이요, 걸으면서 철학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6시 반이면 무심천 강변산책로 따라 한 시간쯤 걷는 것은 나의 노년철학하는 산책이요, 산책하면서 노년철학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속도=빠름보다는 심도=깊이(+높이+넓이)쪽에 역점이 주어지기 때문에 느린 걸음걸이가 될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을 빌리면 다른 산책자들의 걷기는 ‘키네시스(kinesis)=목표 지향적 운동행위’인데 비해서 나의 아침걷기는 ‘에네르게이야(energeia)=행위자체가 목적인 운동행위’라고도 대비할 수 있겠지.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대체로 청소년세대나 중장년세대의 남녀가 키네시스적인 삶을 열심히 사는데 비해서, 노숙년세대의 남녀는 에네르게이야적 삶을 산다는 차이다.
아니,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이나 중장년은 목표를 앞에 두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고속으로 달려가는 삶을 살지만, 노숙년은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순간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한 시간 동안 노년철학하며 산책하고 산책하며 노년철학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게는 80대 중반의 지금이 어느 다른 시기보다 검소하면서도 군형 잡힌 건강과 행복을 체감하는 나날이다.
10월 27일 일요일 오후
요즘 어떻게 나이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한 나이듦인가에 관한 논의가 다양하고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책도 나오고 잡지나 신문에도 관계기사가 나오고 유튜브에도 소개되고 있다. 학술논문도 여러 분야에 걸쳐서 제출된다.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주로 중장년세대의 관점에서 ‘나이듦=노화=고령화=퇴화=열화(劣化)=약화’로 보고 그와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변화‧ 증상‧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방법의 탐색인 경우가 많다. 내가 보기에는 대부분의 견해들이 좋게 이야기해서 만병통치약 같은 일반론이고, 비판하자면 공리공론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 나름의 생각을 해보았다. 결국 나답게 나이 들어가는 것이 그런대로 무난할 것 같다. 할 말은 많지만 이번에는 용기 있는 나이듦에 대하여 세 가지만 이야기 해보려한다. 반론, 반박이어도 환영이고 평언 또한 환영이다.
첫째는 외로움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고 정면 대처하는 가운데서 의미를 창출하기 위한 모험을 감행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외로움을 잘 견디어 나가면서 뜻있게 활용하면 오히려 새로운 ‘가치공창(Value co-creation)’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결코 외로움에 굴복하거나 패배해서는 안 된다. 나이 들면 외롭다고 말하지만 젊을 때도 외롭지 않은 때보다 외로운 때가 더 많았는데, 그 절실함을 느끼지 못했거나 느꼈다 해도 불충분했던 것뿐이다. 삶이란 기본적으로 외로운 것이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외로움에 익숙해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나이 들어 외롭다고 호들갑 떨지 말고 의젓하게 견디도록 하자.
둘째로 청소년세대나 중장년세대에게 따돌림 받거나 무시당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된다 해도 너무 슬퍼하거나 자멸‧ 자책‧ 자포하지 말자. 그들도 머지않아 똑같이 나이 들어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면,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인생살이의 자연스런 과정이라고 여기고 초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달관할 수 있도록 하자.
환심을 사고 호감을 갖게 하고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아부할 필요가 없다. 나이에 걸맞는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반듯하게 견지하면 언젠가 나이듦이 가져다주는 신체적, 심리적, 영성적 변화의 실상을 그들도 알게 되겠지. 그들은 다만 아직 나이가 덜든 상태에서 나이든 인간의 애환을 충분히 깨닫지 못한 것뿐인 것이다. 너무 탓하지도 나무라지도 말자.
셋째는 결국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기품 있게 수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태어났으면 나이 들어가다가 죽게 되는 것이 생명의 어길 수 없는 법칙이다. 인간의 품위가 최종적으로 등급이 매겨지는 것은 어떻게 죽느냐에 달려있다.
평소에 자기 나름의 생사관을 어느 정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일반론이 아니라 나 자신의 생사관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인식의 문제라기보다는 자각의 문제요 그것을 의연하게 수용하는 용기의 문제다.
결국 나다운 나이듦이란 외로움을 의미 있게 견딜 수 있는 용기, 혐오당해도 굴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는 용기, 즉 용기 있게 삶을 엮어가는 것이다. 비겁하지 말자. 굴종하지 말자. 절망하지 말자.
10월 28일 월요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는데 불현듯 이미자의 ‘노래는 나의 인생’(박춘석 작사·작곡)이 듣고 싶어졌다. 당장 유튜브에서 찾았다.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득히 머나먼 길을 따라
뒤돌아 보면은 외로운 길
비를 맞으며 험한 길 헤쳐서
지금 나 여기 있네
끝없이 기나긴 길을 따라
꿈 찾아 걸어온 지난 세월
괴로운 일도 슬픔의 눈물도
가슴에 묻어 놓고
나와 함께 걸어가는
노래만이 나의 생명
언제까지나 나의 노래
사랑하는 당신 있음에
아득히 머나먼 길을 따라
뒤돌아 보면은 외로운 길
비를 맞으며 험한 길 헤쳐서
지금 나 여기 있네.
나는 이미자의 많고 많은 노래가운데서도 이 노래를 좋아해서 자주 들어왔다.
어쩌다 내가 이미자의 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한국이나 일본에서 만났던 젊은 학생들이 왜 이 노래를 좋아하느냐고, 이 노래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느냐고 묻곤 했었다.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미자의 인생에게 있어서 노래가 가진 의미가 내게 있어서 철학이 내게 주는 의미와 같기 때문이라고.
다만 내 마음에 맞게 고쳐도 된다면 ‘노래만이 나의 생명’을 ‘노래를 부른다는 것, 그것만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다시 ‘철학한다는 것’, 그것만이 내가 살아있다는 것으로 바꾸어 부르고 싶다는 말도 했었다.
이미자의 일생이 노래하는 삶(의 연속)이었다면, 지금까지의 나의 삶(의 궤적)은 철학하며 걸어왔고 걸으면서 철학해왔던 길이었다고.
오랫동안 나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곧 살아있다는 것’은 이미자의 삶이고, ‘철학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살아있다는 것’은 나 자신의 삶이라고, 굳이 대비하고 차별하고 구분하는 식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이가 더 들면서 이미자의 삶이나 나 스스로의 삶이 서로 대비‧ 차별‧ 구분되는 경지를 떠나서, 넘어서, 더 깊은 곳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있다는 것은 노래하는 것이기도 하고 철학하는 것이기도 한데, 각각의 살아있음이 어느 쪽에서 더 절실하게 체현(體現 =몸으로 나타나는 것)되었는가가 다르게 비추어질 뿐이다.
그렇다. 노래하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철학하는 것이요, 철학하는 것이 그대로 노래하는 것이 되는 경지-바로 내가 오랫동안 간절히 탐방‧ 탐색‧ 탐구해온 바이다.
10월 29일 화요일
살다 보면 가끔 황당한 경우를 겪게 된다.
30년 가까이 그야말로 오대양육대주를 넘나들며 ‘공공철학대화활동’을 펼쳐오면서 핵심키워드 가운데 하나인 ‘공공성’의 실천적 의미내용을 분명히 밝힌다는 뜻으로, 자기와 타자 ‘사이’에서 자기와 타자가 ‘함께’‧ ‘더불어’‧ ‘서로서로’ 만나서 ‘대화’하고 ‘협력’하고 ‘개신한다(開新=새로운 차원, 지평, 세계를 엶)’는 설명어휘들을 강조해왔다.
그래서 국제적인 대화모임에서 건배사를 하게 될 때마다 내가 ‘함께’라고 선창하면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이 ‘더불어’라고 화답하고 나와 모든 참가자들이 ‘서로서로’라고 큰소리로 합창하는 식으로 진행했었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더불어’와는 가장 걸맞지 않은 생각과 행동이 뚜렷한 특징으로 된 사람들이 모인 정치집단에서 그들의 공식적인 명칭에 ‘더불어’라는 말을 붙이는 바람에, 내가 그 말에 담았던 기대와 염원과 열정이 크게 훼손당한 것 같아서 크게 당황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불어’라는 말을 쓰지 않았고 그래서 건배사도 전부 거부하거나 어쩔 수없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다. ‘더불어’라는 말에 담은 내 뜻이 여지없이 배신당한 것 같아서이다.
그런데 또다시 크게 난처한 고경(苦境=괴로운 경지)에 처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공공철학대화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서 진지하고 자유롭고 활발하고 자유로운 대화를 하면서 나의 철학적 기본자세를 쉽게 설명할 때마다 윤동주의 ‘새로운 길’이라는 시를 소개하고—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그 나라말로 번역해서—거기에 담긴 내 뜻을 밝히곤 했었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철학하기는 항상 새 길을 여는 일이라는 것이라고.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미학적 감각에 가장 어긋나는 한사람의 정치가가 자기가 저지른 정치적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뜻으로—그 후안무치한 배신행위를 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감히 윤동주의 ‘새로운 길’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역겨움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낯 뜨거운 배반행위가 정치적 혼란 상태를 뚫고 새길 을 열려했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정말 연민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맑디맑은 젊은 시인의 시혼(詩魂)이 이렇게도 왜곡되고 오염될 수도 있구나’하는 현실 앞에서 절망적인 비탄을 감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윤동주의 ‘새로운 길’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인간들의 의미훼손에 맞서서 참뜻을 기리고 살리고 공유할 필요가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철학한다는 것이 언제나 어디서나 없어서는 안 된다. 특히 나이 들어 할 수 있고 더욱 해야 할 일은 다름 아닌 철학하기라는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