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하 청주시 흥덕구 민원지적과 주무관

장보하 청주시 흥덕구 민원지적과 주무관

[동양일보]지난 1980년대 군사 독재 시절을 배경으로 마구잡이로 자행된 간첩 조작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는 소설 ‘코뿔소를 보여주마’를 인상 깊게 읽었다.

어느 날 전직 검사 출신의 변호사 장기국이 실종된다. 그는 유신 정권의 막바지 살아있는 권력 밑에서 충견 노릇을 하던 검사였다. 알몸의 그를 담은 엽기적인 동영상이 배달되고, 수사팀은 사건을 파헤치지만 결국 장기국은 사체로 발견된다. 뒤이어 유신정권 시절, 펜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던 정치부 기자 출신의 시사평론가 백민찬과 고문 기술자로 악명 높았던 권영욱이 차례로 실종, 살해된다.

사건의 실마리는 ‘샛별회 사건’에 있었다. 1986년 공안 정국 당시 장기국과 백민찬이 ‘샛별회 사건’을 조작했고, 고문 기술자 권영욱은 그들의 지시에 따라 무고하게 간첩 누명을 쓴 배종관, 고석만, 손기출을 고문해 결국 그들을 파멸시켜버렸다. 이후 억울한 누명으로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그들의 자녀들이 나선 것이다.

마지막 실종자인 권영욱이 등장했을 때는 소름이 돋았다. 김근태 전 의원 등 수많은 민주화 인사를 잔인하게 고문한 경찰이었던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남영동 1985’, ‘1987’ 등 다양한 영화에서 악역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 줄 테니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라는 권영욱의 대사를 보는 순간 확신했다. 김근태의 고문 법정 진술 속 이근안의 발언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현실은 소설의 결말과 다르다. 이근안은 독재 정권이 물러가면서 10년 동안 도피 행각을 벌이다 2000년에 들어서야 징역 7년형을 받았다. 출소 후 목사가 됐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과거 자신의 고문행위를 ‘애국’, ‘예술’이라 표현했다. 조금의 죄책감과 후회조차 없어 보이는 그의 태도와 출소 이후의 평탄한 행보를 보면, 과연 법적 심판과 처벌이 합당하게 이뤄졌는지 의문이 든다.

소설 속 샛별회 사건에도 배종관, 고석만, 손기출은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들의 신원을 복권하기 위해 가족과 측근들은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우리 사회는 외면했고, 침묵을 강요했다.

군사 독재 시절 잔혹한 상흔은 이처럼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의 모습으로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우리 시대 장기국과 권영욱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고 있거나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처벌을 받는다.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은 법무관 시절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고 군사 정권에 부역했다. 최순실 국정조사 청문회 당시 한 국회의원의 발언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국민 여러분이 지켜봐 주셔야 합니다. 법적 심판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더라도 국민 여러분은 절대 김기춘이라는 이름 석 자를 잊지 마십시오. 반드시 기억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셔야 합니다.”

피해자에 대한 구명과 치유, 가해자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 당연하게 이뤄지는 나라를 꿈꿔본다. 더이상 국가의 폭력으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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