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동양일보]●조선인학교 폐쇄 명령(2)
제1차 폐쇄는 조련이 경영한 학교로 간주한 것을 대상으로 했지만, 야마구치 25개교(조선인 초급학교 수, 이하 같음), 후쿠오카(20), 미야자키(11), 가나가와(9), 도치기(5), 그 밖에 돗토리, 이시카와, 후쿠시마, 홋카이도 등의 여러 현에서는 이 당시 현 내의 조선인학교가 모두 폐쇄되어 버렸다.
재일조선인의 항의를 저지하기 위해 학교 폐쇄는 무장경관의 손으로 강행되었다. 김달수의 기록에 의하면, 요코스카(橫須賀) 조선인학교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학교 폐쇄를 통고하러 온 현의 관리에게 항의하고 관리들이 일단 물러감으로써 일이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던 10월 10일 저녁….
요란한 사이렌이 울림과 동시에 트럭이 속속히 몰려오고 시커먼 산더미 같은 무장경관대가 밀려 들어왔다. 교실에 있다가 바깥으로 달려 나온 사람들은 그대로 목덜미를 붙잡혀 내쫓겼고, 교실 안에 있던 학생들은 일제히 울음을 터뜨리며 부인들과 함께 책상을 붙들고 메달렸지만, 그들은 책상째로 개나 고양이처럼 쫓겨났다. 거기에 팔을 삐고, 무릎이 까지고 더욱 격앙된 아이들과 부인네들의 울음소리, 어두움에 뒤덮인 학교 안팎에서 격렬히 밀고 밀리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는 한순간의 일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정신없이 제각기 항의와 증오의 말들을 쏟아내며 머리를 모로 하고 달려들었지만, 시커먼 소용돌이 같은 경관대의 곤봉에 머리를 두들겨 맞고, 배를 찔리고 내동댕이쳐져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후방 경관대는 다짜고짜 교실 입구와 창문에까지 미리 준비해 온 판자를 열십자 모양으로 대고 못질을 해버렸다. 학생들이 울고 불며 이들 경관의 등에 뛰어올라 달려들었지만 위로 되툉겨져 나왔다.
이렇게 해서 학교는 폐쇄되고, 곤봉을 들고 권총을 찬 경관들이 열십자로 판자가 쳐진 문 앞을 지켰다. 다음 날부터 120명 남짓 되는 아이들은 교정이라고도 할 수 없는 빈터에 모여 다시 공부를 시작하였다. 아이들은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쓰지 않기로 한 약속을 굳게 지키고, 어른들은 시교육위원회와 학교를 돌려달라는 교섭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시교육위원회의 태도는 강경했고, 찬 바람이 몰아치면서 ‘지붕 없는 교실’ 수업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아이들은 일본인 학교로 전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어 11월 2일까지 사립학교 인가신청 절차를 밟은 128개교에 대해서, 1개 학원 3개 학교만 인가하고 그 외는 폐교 조치한다는 11월 4일의 제2차 폐쇄가 집행되었다.
이때에는 오사카(40), 아이치(28)를 비롯하여 히로시만(17), 오카야마(10), 교토(12), 요코하마(18), 후쿠이(10), 시가(12), 기후(11), 도쿄(13) 등 거의 전 부현에 걸쳐 설치되어 있던 1개 교에서 수 개 교에 이르는 조선인학교도 일제히 폐쇄되어 버렸다.
오사카의 경우를 보면, 2일까지 신청을 낸 35개 교의 서류를 들고 같은 날 밤 담당 관리가 상경하여, 3일 문부성에서 심사를 받고, 다음 날인 4일 임시 부(府)교육위원회에서 내부적으로 이를 추인하는 형태를 밟았다. 조선인학교에 한해서만 문부성이 인가 시비를 장악한 것이었다. 그 결과, 32개 교는 따로 법인 설립을 신청했지만 미인가 처분을 받아 폐쇄되고, 그 밖에 아직 신청 수속을 마치지 못한 5개 교도 폐쇄되는 등 총 40개 교에 대하여 지사의 이름으로 폐쇄 통고가 내려졌다.
그때 지사는 동시에 다음과 같이 학교 폐쇄에 대한 수속을 지시하였다.
학교장이 아동학생, 교직원 및 보호자에게 학교 폐지를 통고할 것, 정문·뒷문 등의 문표와 그 밖의 학교 표식을 제거할 것, 학교장 또는 학교 관리자는 학교 게시판이나 사람들이 보기 쉬운 장소에 학교 폐쇄를 알리는 내용을 게시할 것, 학적부를 정리하여 부청 교육실에 제시할 것.
아울러 조선인 학생의 수용에 대해서는 ‘현주소의 학군에 해당하는 학교로 전학을 시키고, 연령에 맞는 학년에 편입시킨다. 조선어, 조선 문화·역사 등은 주 4시간 이내에서 과외수업을 인정한다’는 내용을 제시하였다.
재일조선인의 자주교육을 유린한 이와 같은 ‘지사 담화’는 “이에 전입하는 측이나 또 이를 받아들이는 측이나 모두 조·일 융화의 정신으로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고 아이와 부모 모두 사이좋게 협력하여 아동학생이 공부에 정진할 수 있도록 부민(府民) 각위가 협력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문장으로 매듭짓고 있다.
여기에 ‘일단 후려친 뒤에 사이좋게 지내자’라는 침략자의 정신 구조가 계속 살아 있음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다른 부현에서도 오사카와 마찬가지의 조치가 취해졌다.
●재판에 의한 학교 폐쇄의 합법화
일본 정부는 이상과 같은 경위를 거쳐 전국의 조선인학교를 폭력으로 폐쇄해 버렸다. 그 정치적 행위는 재판소에 의해서도 합법화되기에 이르렀다. 오사카 지방재판소가 1952년 12월 1일에 내린 판결이 그것이다.
다소 시간이 지났지만, 사법 또한 재일조선인 민족교육의 권리에 대해 자각이 없고. 단지 재일조선인이 정부에 가담했다는 내용의 사례를 언급해 보고자 한다.
1949년 11월 5일에 학교 폐쇄를 통고받은 재단법인 조련학원은 10일 대표 이사 종경대(宗景台)의 명의로 오사카부 지사를 상대로 ‘학교 폐쇄처분의 취소 청구’를 오사카 지방재판소는 전항의 판결이 있기까지 행정 특례법에 따라 행정처분(학교 폐쇄)의 집행정지 판결을 내렸으나(11월 17일), 즉시 내각 총리대신의 이의 신청이 있었고(11월 22일) 당일 취소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조련학원은 고등재판소, 최고재판소에 항고했지만, 모두가 기각되었다. 한편, ‘학교 폐쇄처분의 취소 청구’에 관한 심리는 소송 기록이 최고재판소에 회부되어 있다는 이유로 연기되어, 겨우 1952년 5월부터 실질 심리에 들어갔다.
원고 측은 (1)재단법인의 허가 취소로 직결되지 않으며, (2)또 재단법인도 문부성의 지시대로 개조하고 있다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학교 폐쇄의 위법성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피고 측은 조선인학교가 학교교육법 제13조(학교 폐쇄 규정)에 해당하는 사실을 갖고 있었으므로 폐쇄했다고 반론하고, (1)교과서 도서 사용에 관한 위반(문부성 검정교과서를 사용하지 않는 등의 사실), (2)학습지도요령 위반(조선어에 의한 학습지도 등의 사실), (3)학적부 비치 의무 위반이라는 3개 항목을 해당 사실로 들었다.
또 원고가 말하는 법인 개조는 문부성의 지시에 부합되지 않으므로 해산은 적법하며, 위의 법인은 청산을 목적으로 한 범위 내에서 존속을 허용한 것이고 학교를 경영할 능력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반론하였다.
재판소는 이 같은 양자의 의견에 대해서, 청산을 목적으로 한 범위 내에서도 재단이 설치한 학교를 경영할 수 있다는 피고의 주장을 기각하고, 학교 폐쇄 명령에 대해서는 피고 측 주장을 전면 채용하였다.
즉, “원고는 고의로 법령을 위반한 것으로 인정되며”, 학교교육법 제13조에 기초한 처분은 ‘적법’하다고 보고 원고의 ‘학교 폐쇄처분의 취소 요구’를 기각하였다. 재판소는 조선인학교의 교육은 일본의 교육법령에 따라야 하며,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는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이보다 앞서서 1952년 3월 17일에 도쿄 지방재판소도 문부대신을 상대로 조련학원이 낸 ‘법인설립 인가 취소의 취소 청구’를 기각하고 있다.
여기서도 조련학원은 개조를 단행했으므로 해산 처분은 무효라고 한 원고의 주장에 대해, 피고는 원고가 반평화주의적·비민주주의적 단체이며 원고가 경영하는 학교의 교육 활동은 학교교육법에 위반된다는 점을 들어 반론하고 있다. 재판소는 피고(문부대신)의 주장을 채용하여, 조련학원이 ‘반평화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는’ 점을 확인함과 동시에 교육 경영에 대해서도 ‘의무교육 과정이 갖는 공공적 의의에 주목한다면, 자신이 경영하는 소·중학교에서 이러한 교과과정의 난맥상을 허용한 원고의 행위는 공익에 반한다’라고 단정하였다.
이러한 법 해석 속에 숨어 있는 실질적 의미는 북한의 입장에 입각한 교육을 ‘공익에 반하는’ 것으로 부정한 데 있었다고 해석해도 될 것이다. 이러한 흐름 안에서 행정과 사법은 ‘조선인학교 폐쇄=민족교육의 권리부인’에 같은 보조를 취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재일조선인을 ‘일본 국민’으로 취급하는 것을 통제의 방법으로 삼은 데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였다.
●학교 폐쇄에 대한 항의
전년 조선인학교의 폐쇄와는 달리, 이번 폐쇄 조치는 한반도에 정치적 성질을 달리하는 두 개의 국가가 수립된 조건에 따라 분명 그중 한 쪽을 적대할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다른 한쪽 정권이 움직인 것도 전년에는 볼 수 없던 현상이었다.
즉 제1차 폐쇄가 집행된 5일 후, 한국 주일대표부는 맥아더 앞으로 “폐쇄된 58개 교는 6,000명의 관계 조선인 자녀의 복지를 위해 개조 후 다시 문을 열 수 있도록 한국대표부에 인도해 줄 것을 일본 문부성에 납득시키고자 한다. 이에 귀 외교국의 협력을 요망한다”고 요청했다.
이것에 관해서 주일대표부의 정(鄭) 대사는 “교원은 한국 지지자로 보충, 주일대표부의 책임하에 민단에서 감독 경영하고, 일본 문부성의 방침을 지키고, 한국 역사와 한국어를 교수 과목으로 하는 건에 대해 교섭 중이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조선인학교의 ‘한국’화를 꾀하여 점령군과 교섭을 벌인 것이다.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해 다른 정치력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점령군 및 일본 정부의 태도는 재일조선인 모두에 대해서 엄격했기 때문이다.
전년과 마찬가지로, 이번의 조선인학교 폐쇄도 조련계 학교를 주요 대상으로 하면서 동시에 민단계 학교도 그 대상에 포함함으로써 재일조선인의 모든 자주 학교를 규제하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소수의 민단계 학교가 여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자료가 없으므로 잘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사립학교로서 인가받은 학교도 없고, 또 현존하는 오사카·교토·도쿄의 3개 한국학교가 발족한 것도 각각 1950년, 1951년. 1954년이었던 점 등을 고려하건대, 이때 대부분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아이들은 일본인 학교로 전학해 갔을 것이다. 제한된 자료로 판단해 보면, 한국 주일대표부는 전년 9월 ‘재일동포의 유일 공인단체’로서 인정한 민단계열의 학교 폐쇄를 못 본 체하고 조련이 경영하는 학교의 탈취를 도모하는 정치적 동기가 깔린 움직임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재일조선인 자녀의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시대가 아니고, 박정희 시대가 개막된 1960년대이고, 그것도 한일조약이 체결된 이후에 지속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조련에 결집하여 자력으로 학교를 세운 재일조선인으로서는 달랑 한 편의 통달로 학교가 폐쇄당하는 것은 납득할 수도, 또한 용납할 수도 없었다.
학교는 아이들이 조선인으로서 성장하여 자신의 뒤를 이어갈 거점으로 생각하면서 어려운 살림을 더욱 쪼개 가면서 만들어 낸 ‘자신들의 학교’였고, 그것으로 조선인임을 증거하는 상징적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각 지방자치단체를 향해 폐쇄에 항의하는 운동을 격렬히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전년의 폐쇄 반대 운동 때는 조련 조직은 무사했고, 따라서 전국적으로 통일된 운동을 일으켜 학교를 지킬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련을 해산시킨 후에 취해진 폐쇄였으므로 운동을 전개할 주체적·조직적 조건이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같은 상황 속에서 각지의 재일조선인은 전국적인 통일운동을 조직하여 지역에서 중앙으로 집약시켜 가는 형태를 취할 수가 없었다. 이에 학교가 있는 지역마다 투쟁을 벌이고 각 부현의 교육위원회 차원에서 계속 교섭하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학교를 끝까지 지켜내고자 하는 심정과 주장의 내실은 각지의 재일조선인 모두에게 공통적이었다. 여기에 ‘진정서’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지방자치체와 국민에게 나눠준 등사된 전단 한 장의 전문을 게재하여 당시 재일조선인의 분위기를 엿보고자 한다.
#진정서 전문
이번에 일본 정부는 우리 조선인학교에 대해서 폐쇄령을 내렸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에 사는 4만5000명의 소·중학교 소년 소녀는 학교를 잃고, 교육을 빼앗기고, 심한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우리의 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일본 정부는 우리가 오랫동안 피와 탐으로 이룩한 학교를 학교교육법과 교육기준법에 기초하여 일단 인가를 해 놓고는 바로 돌연 폐쇄 조치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를 일본학교에 넣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6․·3제는 의무교육이라고 하지만, 그 현상은 어떻습니까? 교육비가 형편없으므로 교실은 부족하고 선생님도 부족하여 정원 40명인 한 교실에 60~70명씩이나 집어넣고 만족스러운 교육도 실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일본학교에서도 우리 자녀가 들어오는 것을 조금도 반기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반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학교를 만들고, 훌륭한 조선인을 만드는 교육을 하는 것이 왜 안 된단 말입니까? 조선인이 조선 민족으로 문화 수준을 높이고, 그 문화를 통해 세계의 인류 문화에 공헌하는 것은 조선인에게 부여된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현재 훌륭한 조선인 교육기관을 일부러 폐쇄하고 무리하게 일본학교에 넣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일본에 살고 있지만, 우리 자녀에게 조선의 국어·역사·지리·일반사회를 배우게 할 자유는 당연히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민주주의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일본인 모두가 한 번 조선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다면 납득할 수 있지 않을까요? 부디 우리의 입장과 충정을 이해해 주시고, 종래대로 조선인학교가 존속될 수 있도록, 서로 사이좋게 공영의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의 교육·문화를 지키는 운동을 지지하고 성원해 주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