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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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동양일보]●공감하지 않는 일본 국민

그저 조선인으로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자치체와 교섭에 나섰으나, 문제는 재일조선인이 주장하는 내용의 가장 핵심 부분이 일본 측에게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었다는 것이다.

‘진정서’에서는 일본인에게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 번 조선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라’는 방도를 제시하기조차 했으나, 이러한 발상법은 관료주의적 발상법에서는 전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화주의 사상에 사로잡힌 일본인에게도 익숙지 못한 방법이었다.

그렇더라도 일본인으로서는 이 익숙하지 못한 방법을 구사하여 조선인으로서의 교육의 중대성을 이해하고자 할 때 비로소 재일조선인 교육문제에 대해 교육적인 견지에서 대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정치적·치안적 관점에서 처리하는 기존의 패턴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1949년 12월, 도쿄도의 조선인학교는 도립(都立)학교로 수용이 되는데, 다음 해인 1950년 4월부터 도립 조선고교의 교사가 된 한 일본인 교사 시로타 노보루(代田昇)는 조선인 학생에게 규탄이란 실물교육의 세례를 받고서, ‘조선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방법의 필요성을 체득해 나간다.

그는 그 과정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지도 주임에서 “일본 말로, 일본 글자로 가르치라”는 이야기를 듣고 교실에 들어간 이 일본인 교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쏟아지는 곤욕스러운 질문에 맞부딪혔다.

학생들의 질문은 이러했다. “저희는 조선인입니다. 조선어도 모르면서 우리 학교에서 뭘 가르치겠다는 말입니까?”, “우리 학교를 왜 일본 정부가 파괴하고 싶어 하는지 가르쳐주십시오. 이것이 민주국가인지 대답해 주십시오”

일본인 교사는 이러한 질문세례에 녹초가 되면서도 조금씩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한 여학생이 “선생님, 우리는 조선입니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로 인하여 말도 나라도 빼앗겼습니다. 조선인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조선인의 말도 역사도 모르는 반쪽이가 되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선생님께 일본어를 쓰면 안 된다. 일본어를 배워서 안 된다고 하며, 학교를 부수고 감옥에 집어넣는다면, 선생님은 분노하지 않겠습니까?”라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호소하는 말을 듣고는 곧 점령하에 놓인 일본인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해서 아이들이 고발하는 ‘비인간적인 식민지교육에 대한 증오’를 겨우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와서 비로소 보고자 하는 ‘교육적 견지에서 이 아이들과 서로 팔을 뻗어 끌어안을 생각‘이 들었다. 조선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어렵다 해도, 조선인의 입장을 생각한다는 시각을 알게 됨으로써 조선인학교 문제가 교육문제로 보이게 되었다.

그러한 시각을 일본인이 체득하는데 조선인 학생들로부터의 비판이라는 실물교육의 시련이 필요했고, 또 그것을 인내하는 성실함을 아우를 필요가 있었다.

1950년 단계에서 이러한 시련을 정면에서 받아들인 공립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들이 재일조선인 교육문제를 교육문제로써 고민하는 최초의 일본인 교사집단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강화‘ 이후 다시 조선인학교가 문제로 부상했을 때 사회적 활동에 나서게 되는데, 그것은 후술하기로 한다. 여기서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조선인학교 문제를 교육의 견지에서 대응하고 ’진정서‘에서 말하는 민족교육의 자유를 납득하기 위해서는 일본인에게는 이상과 같은 피고발의 체험을 거쳐 이를 일본인 자신의 손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필요했지만, 1949년 단계에서는 이러한 수준에 전혀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처럼 일본 사회의 교육분야에서 조차도 일본교육의 자유를 이해할 만한 기반이 형성되어 있지 못했다. 하물며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일본 국민이야 조선인의 입장에서 교육을 생각해 본다는 발상은 도저히 나올 수가 없었다.

‘진정서’를 통해서도 일본 국민의 지지와 성원을 호소하였지만, 학교 옹호를 위해 부모나 교사만이 아니라 중학생도 길거리와 역 앞에서 조선인의 입장을 호소했다.

이 호소에 대한 반응을 기록한 글은 부분적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모두 실망스러운 기록들이다.

한 조선인 교사는 ‘저속한 공세의 파도 속에서 조선인은 일본 국민에게 마음 든든한 원조와 이해를 받아 내는 것도 대단히 곤란한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노동조합 등에서도 어느 조합이나 지지 협력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지만, 빨갱이 추방 같은 자신과 직접 관계된 일들에 대표나 보내 겨우 격려해 주는 정도였고, 효과적인 것은 바랄 수 없던 실정이었다.

결국, 일본 국민의 교육적 역량은 조선인학교 옹호에 담긴 교육의 원리적인 의미를 알아차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 국민의 지지를 얻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재일조선인은 거의 혼자 힘으로, 조선인학교 문제를 정치적·치 아직 관점에서만 파악하는 정부·자치체를 향해 항의와 교섭을 거듭해야 했다.

정부·자치체가 강제하는 학교 폐쇄·동화교육의 시행에 대해 재일조선인은 민족교육의 자유라는 원리를 대치시키고, 당초에는 물론 조선인학교의 유지를 주장하였으나 이를 강권적으로 폐쇄당한 후에는 그 요구 수준을 공립학교 체제 내부에서 실질적으로 민족교육을 실현하는 것으로 낮출 수밖에 없었다.

요코스카(橫須賀)의 경우에는 ①학생을 다른 학교로 입학시킬 때는 집단입학시킬 것 ②따로 시간을 할당하여 민족어로 민족의 역사와 국어를 가르칠 것(최후의 경우에는 과외시간에서라도 이를 확보할 것) ③이를 가르치는 교원은 조선인을 채용할 것이라는 세 항목으로 집약하여 시교육위원회와 교섭하였다.

집단적인 교육, 조선의 국어와 역사의 교수, 조선인 교사의 채용, 나아가 이러한 것을 종합한 공립분교로 이행한다는 차선의 요구는 11월에 나온 문부성 통달이 이 요구에 대한 대응책이라는 성질을 다분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거의 전국 각지의 재일조선인에게 공통된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학교를 지키고자 한 이 같은 필사적인 운동에는 아이들도 참여했는데, 이 경험은 이들에게 더욱 충실한 조선인이 되기 위한 학습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그 긴장된 나날은 앞의 요코스카 조선인학교의 경우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당시 도쿄의 조선인 중학교 학생이었던 고갑수는 그 당시의 기분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녀가 애초 조선인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바로 어제까지 믿어왔던 것이 모두 엉터리고 나쁜 것이며, 새로 배우는 것이 모두 옳다는 것을 간단히 이해할 수 없는’ 가치관의 동요를 맛보았지만, 이윽고 ‘조선은 이제 일본의 손에서 벗어났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조선어와 역사를 배우면서 ‘서서히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갖게 된’ 바로 그 순간에 학교 폐쇄 명령이 떨어졌다.

부모는 물론 그녀를 포함한 학생들도 방과 후 매일 같이 도청에서 혹은 가두에 나가서 항의운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늦게 집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아버지는 “도대체 조선인을 얼마나 괴롭힐 속셈이란 말인가? 이러한 때야말로 공부가 중요한 것이란다”라고 하였고, 어머니도 “나는 내 이름을 쓰는 법조차 배우지 못했다. 이제 너는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게다. 학교에 다닐 때는 조선에 대한 것이라면 뭐든, 글자 한 자라도, 말 한마디라도, 풍습 하나라도 더 많이 배우고 기억해야 한다”며 격려하였다.

그녀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시간이 대단히 중요하며, 기회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고가 도립으로 이관된 후에도 계속 살아남아 앞서 시로타(代田)가 보고한 정경으로 연결된다.



1949년 가을 조선인으로서 성장하고 싶다, 또 그렇게 키우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 재일조선인들 사이에 소용돌이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일본의 국가와 사회는 다른 원리 아래에서 움직이면서 이를 통찰한 내발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학교 폐쇄 후인 11~12월 시기는 이 두 가지 흐름이 교섭이라는 형태로 표현된 시기였다. 앞에서 언급한 3개 항의 요구조건을 듣고 재일조선인이 각부 현 교위와 접촉하였으나, 부 현 교위 측은 문부성에 대책의 기본 방침을 지시해 달라고 요청하고 동화교육을 하는 선에서 교섭에 임하였다. 이 사이 문부성은 연달아 3통의 통달을 발하였다.



●공교육체제 내의 재일조선인 교육(1)

조선인학교가 폐쇄된 이후의 단계에서 쟁점은 일본의 공교육체제 밖에 있는 조선인학교의 존속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서서, 공교육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실질적인 조선인 교육을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옮아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계속 재일조선인의 항의를 받은 각 도도부현 교위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비판을 피하고 문부성의 지도를 청하며 지시된 범위 안에서 일을 처리하는 태도를 보였다.

문부성은 ‘각 방면에서 올라오는 조회’에 답하여, 11월 1일 ‘공립학교에서 조선어 등의 취급에 대해서’, 같은 달 15일에 ‘조선인 사립 각종학교의 설치 인가에 대하여’, 같은 달 24일에 ‘조선인 아동 학생의 공립학교 수용에 대하여’라는 통달을 내고,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는 수습책을 전국의 현 교위에 내려보냈다.

재일조선인 교육에 관해서 문부성이 이처럼 계속 통달을 낸 것은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없던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10월 13일 통달에서 시작되는 이들 4개의 통달이 ‘강화’까지 재일조선인 교육의 정책적인 골격을 형성하고, 나아가 실질적으로는 한일조약이 체결되기까지 15년간 정부 측의 기본 입장이 되었다. 이하 10월 13일 통달을 제외한 3개의 통달 내용을 정리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이 통달은 공립학교에서 재일조선인 학생의 교육을 ‘일본인과 구별하지 않고’ 행한다는 원칙을 확인한 후, 폐쇄·집단적 전학에 수반하는 특별 사정을 부분적으로 배려한다는 문장으로 되어 있다.

거기에는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운동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반영되어 있지만, 동화교육을 명기한 11월 1일 통달을 ‘변경할 의사는 없다. 따라서 지방의 실정에 이것을 완화하는 일은 없다’라고 11월 24일 통달에서 다짐해 두고 있듯이 목적은 어디 까지나 일본의 공립학교에서 재일조선인 자녀를 교육하는 데 두고, 그 전제 위에서 구체적인 처리 방안을 지시한 것이었다.

이것들은 앞에서 언급한 재일조선인 측의 3개 항의 요구사항에 대한 답변의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 그 요구 별로 통달에서 지시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집단전학과 전학 후 집단교육 요구에 대해서 분산전교, 일본인 학생과의 혼합교육을 지시하고 있다. 학구(學區) 및 학급의 편성에서 ‘일본인과 구별하지 않는’ 방침을 강제한 것이다. 우선 ‘1군에서 1시를 학구로서 요구하는 것은 조선어 등의 교육 편의를 위해서라고 생각되지만, 과외로 이를 행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필요하다면 방과 후에 한 학교에 모아서 실시하면 되기’때문에 ‘학구는 일본인과 같이 취급해야 한다’고 하였다.

원래 조선인 학생은 넓은 구역에서 조선인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학구제에 따라 일본인 학교로 옮기게 되면 그만큼 흩어져서 일본인 학교로 전학하게 되고, 이는 집단교육의 필요성이 희석되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수용해야 할 조선인 학생은(해당 학년의/인용자) 일반 학급에 편성시키는 것이 적당하다’고 해서 한층 더 분산화를 꾀했다. 이와 같은 조치는 많은 지역에서 서로 다른 언어·원리·내용의 교육을 전개하고 있는 일본인 학교에 소수의 조선인학교 학생이 들어가는 상태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조선인 학생에게는 극히 가혹한 형태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인과 똑같이 학구·학급의 편성을 일률적으로 강제할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그것은 다수의 조선인 학생이 전학하는 지역에서 현저하였는데, 한편으로는 재일조선인 측으로부터 집단교육에 대한 강한 욕구로서 드러났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들을 수용한 학교 측으로부터의 교육 질서의 혼란에 대한 우려로 표명되었다.

그 점을 배려한 타협안으로써, ‘학력보충 기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는 당분간 특별학급 또는 분교를 설치하는 것도 상관없다’는 안이 시사되었다. 조선인 학급의 편성 및 공립 조선인학교를 특별한 예로써 인정한 예시였다.

이것은 11월 1일 통달에서 나온 것인데, 11월 24일 통달은 규제를 더욱 엄격히 하여 ‘공립분교는 인정하지 않을 방침’임을 밝히고, 앞서 든 ‘학력보충’을 이유로 하는 것은 삭제하고 단 ‘일본인 학교에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예를 들면 특수지역에 마을을 만들어 일본인 학교에 수용하기에는 거리 관례 등으로 불가능할 경우) 등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간주하여 당분간 인정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조치들은 일본인과 구별하지 않는 학구·학급의 편성에 특례를 둠으로써, 공립학교 체제 안에서 조선인의 집단교육을 가능케 하는 길을 부분적으로 연 것이다. 몇몇 도현에서, 혹은 조선인 학생만으로 이루어진 특설학급을 두기도 하고(시가 현), 혹은 공립분교로서 조선인학교를 설치(도쿄, 가나가와, 아이치, 효고 등)할 수도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문부성의 허용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재일조선인은 ‘공립학교에서 조선인에게 조선어, 조선 역사 등을 가르칠 것’을 요구하였는데, 11월 1일 통달은 위의 요구를 서두에 게재하고 조선인 학생도 일본의 학습지도요령에 따른 교육을 받는다고 답하여 동화교육의 원칙을 못 박았다.

즉, ‘소학교에서는 학습지도요령에 교과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외국어로 조선어·조선 역사 등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일본인과 구별하지 않는’ 교육방침을 정했다. 동시에 ‘정규 수업시간에 적당한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은 상관없다’고 해서, 방과 후 조선인 학급을 설치하여 조선어·조선사를 가르치는 것을 인정했다. 정규 수업시간에도 조선인 학급을 편성하는 형태를 시가 형(滋賀型)) 민족학급으로 부른다고 하면, 괴외시간 조선인 학급을 편성하는 것을 오사카 형의 민족학급이라고 하여 이를 일단 구별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단 ‘이외에 외국어로서 조선어를 가르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을 덧붙이는 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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