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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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동양일보]●공교육체제 내의 재일조선인 교육(2)

지난 회에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교육방침으로 ‘소학교에서는 학습지도요령에 교과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외국어로 조선어·조선 역사 등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일본인과 구별하지 않는’ 방침을 정했다는 내용을 게재했다.

이처럼 ‘일본인과 구별하지 않는’ 교육이 조선인 전학생에게 행해질 경우, 그때까지 조선인 집단 안에서 조선인으로서 교육받아 온 학생들에게 집단과 학력의 질적 차이에 기인한 여러 가지 부작용·마찰이 일어날 것은 당연하다.

이것에 대해서 11월 14일 통달에서는 “공립학교에 수용된 아동·학생이 수업 방해 기타의 행동으로 일본인 아동·학생의 학습을 방해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두고서 “체벌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징계를 해야 한다. 또 다른 아동·학생의 교육상 악영향을 미칠 경우는 출석 정지를 명할 수도 있다”(학교교육법 제26조․40조)라고 답하여 지도방침을 기록하고 있다.

동화교육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은 처벌·처분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이야기였다. 이로써 공립학교에서 조선인 학생을 지도할 때 전통적인 동화와 차별이라는 이중적인 차별 구조가 다시 문부성 방침으로서 공공연화 되었다.

셋째, 공립학교에 조선인 교사를 채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조선어·조선 역사를 가르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교사는 분명 조선인이므로, 재일조선인 측도 이것을 요구하였고, 문부성도 부분적이기는 하나 이들 과목의 교수를 용인한 이상 그 채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월 1일 통달에서는 “조선인의 지위는 아직 강화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현재로서는 미결정 상태이므로 목하 법무부에 조회 중이다. 따라서 법무부의 회답을 기다려 공식적인 태도를 결정할 예정이다”고 하는 조건이 붙어 있으나, 교원 자격증을 가진 자 및 교직 적격자라면, “문부성으로서는 바꾸지 않고, 이를 교장·분교 주임 이외의 교육(敎諭)·조교유(助敎諭) 또는 강사로 채용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전향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11월 24일 통달에서 돌연 여기에서 후퇴하여 “(법무부에서 불가의 회답이 떨어짐) 우려는 없지만, 만일을 위해 정식 교원으로 채용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다”라고 하며, 그 대신 “계약직으로 서의 임시교원”이라는 고용 형식을 예시하였다.

후에 실제로 적용된 것은 오사카 민족학급의 교사를 제외하면, 3개월 계약직 전임강사 및 시간강사라는 문부성이 예시한 형식이었다. 물론 이들 조선인 강사가 일본인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없고, 오로지 조선인 학생에 대한 민족 교과만을 담당하였다.

이 밖에 또 한 가지 “공립학교에 수용된 학생 아동을 위해 여가로 조선어·조선 역사 등을 가르치는 사립 각종학교를 앞으로 따로 인가를 받아 설립하는 것은 상관없다”고하여 각종학교로서의 조선인학교를 용인하는 방침도 나타나 있다.

11월 15일 통달은 그 인가 기준을 정한 것인데, 전문(前文)에 10월 13일 통달의 조치 세목을 따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의 교육법령 및 ‘감독청의 명령’을 준수하고 ‘구 조련’의 색채를 완전히 불식하는 것이 인가 조건이었다.

이것은 종래와 같은 조선인학교의 민족교육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언제든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감독청의 담당 관리가 행하는 실지 조사를 거절, 방해 또는 기피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게 되어 있다.

결국, 이는 출입조사권의 강요이다. 이와 같은 계약을 받고서는 재일조선인이 희망하는 조선인학교가 설사 존속 혹은 신설된다고 해도 각종학교로서 인가를 받을 전망은 없었고, 또 사실 강화 후 1953년까지 사이에 인가를 받은 학교는 하나도 없었다. 이 사이 폐쇄를 거부하고 자주 학교로서 존속한 40여 조선인학교는 모두 무인가 학교로서 운영되고 있었다.

조선인학교를 일제히 폐쇄한 후 문부성은 이상과 같이 공립학교에서 ‘일본인과 구별하지 않고’ 교육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면서 그 테두리 안에서 부분적으로 조선인으로서의 민족교육을 인정하는 정책을 내세웠다. 각 부 현 교위는 그 선상에서 항의를 계속하는 재일조선인과 교섭을 추진해 나갔다.



●갈가리 찢긴 조선인학교 체계

이제 지금까지 일본학교에 다니고 있던 재일조선인 학생은 물론, 조선인학교에 다니던 학생까지도 일본 공립학교 체제 속에 포괄되었다. 피땀 흘리며 악착같이 쌓아 올린 민족교육 조직은 1949년 가을, 하루아침에 파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체제로서의 동화교육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태풍에 맞서 재일조선인 어른들은 공립학교 체제 속에서도 민족교육의 맥을 끊지 않고 조금이라도 살려 나가고자 각 부 현 교위와 매일같이 교섭을 거듭했다.

한일조약을 반대하는 대중투쟁을 거친 단계에서는 일본 국민 내부에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옹호하는 지원 운동이 보이게 되지만, 이 시점에서는 그러한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혼자 힘으로 직접 부 현 교위와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부현에 따라 재일조선인의 집단적 역량도 차이가 있고, 그 지도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양쪽의 역관계는 지역에 따라서 강약의 차가 생겼다.

예컨대 한 쪽 끝에서는 오사카·교토 등과 같이 일본교육의 민주화를 강화하기 위해 자진해서 조선인 학생을 일본인 학교로 전학시키는 노선이 등장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 끝에서는 효고·아이치·히로시마와 같이 끝까지 조선인학교를 실력으로 지켜내겠다는 노선을 취하는 등 지도 방식에서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그 중간에 공립학교에서의 민족교육을 가능한 한 추구하는 도현(都縣)이 있는 등 점차로 분열 상황이 생겨나고 있었다.

각 부현교위 차원에서, 이러한 재일조선인 측의 상황과 민족교육 허용의 범위를 정한 문부성 통달이 충돌을 일으키고 각 부현의 역관계에 따라 각각 타결이 이루어져 나갔다. 각 부현의 구체적인 타결과정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전국적으로 보건대 그 결과로서 네 가지의 재일조선인 학생 교육 유형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자주 학교로서의 조선인학교의 존속이다. “부모나 선생, 학생들이 경찰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학교를 사수하는 곳에서는 지방 당국도 쩔쩔매며 어찌할 바를 몰라 옛날 그대로 남았다. 예를 들면 효고현에서는 현 내에 사는 재일조선인의 절반에 해당하는 4만명이 연일 폐쇄 명령 취소를 요구하며 현청 등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대해서 11월 27일 현 당국은 무장경관 4000명을 동원하여 소·중학생을 포함하여 약 3만명의 조선인을 체포했다고 한다(27사건).

이 때문에 교사 전원이 체포되고 반년 가까이 아이들의 손으로만 지켜지는 학교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정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공립학교 체제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비합법적인 자주 학교로서의 조선인학교는 1952년 4월 현재 효고(17), 아이치(10), 히로시마(4)를 중심으로 가나가와, 시즈오카, 오카야마, 에히메, 교토, 미애, 오사카, 이와테 등에 1~2개 교씩이 존속하여 전국적으로 44개 교를 헤아렸다.

그러나 권력의 횡포로부터 조선인학교를 실력으로 지켜내기는 했지만, 이들 학교는 억압과 빈곤 속에서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고난에 찬 길이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재정적 곤란이 컸다. 효고현의 한 조선인 자주 학교의 학교경영 상태를 살펴보기로 하자.



<표>와 같이 1개월 총수입 예정은 40만 엔인데, 이것이 100%가 다 들어오더라도 빠듯한 실정에 실제는 50~60% 수입이 보통이다. 그 부족분의 악영향은 시설과 교사 급여의 삭감으로 이어진다. 교사는 연평균 월 4천 엔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다. “교사들은 집이 없으므로 학교의 책상 위(히로시마의 어떤 교사는 6개월간 모포 한 장으로 책상 위에서 지내며 학교를 지켰다)나 숙직실(그것도 있을 경우에)에서 두셋이 그냥 쓰러져 자고, 식량은 학생이 한 움큼 두 움큼씩 가져다주는 것으로 그럭저럭 견디었다. 그것도 안 되면 매일 돌아가면서 학생의 가정을 방문하여 식사하였다.



<표> 효고현의 자주 학교 1개월 경비 명세표



효고현의 실태보고에 의하면, 교원 가족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모두 날품팔이나 넝마주의 같은 일에 종사하며, 가계를 돕는 것을 볼 수 있다. 교사의 생활조차 이러했으므로 학교의 시설·교재·교구 등은 쓸만한 것이 없었다.

양동이 대신 빈 깡통을 사용하고 건물도 수리할 수 없어 방치해 두어야 했다. 게다가 무허가 학교라는 점을 구실 삼아 학생의 통학정기권도 발행해 주지 않았고, 중학교 졸업자에게 고교입학도 인정하지 않는 등 법제 면에서도 온갖 곤란이 가해졌다.

자주 학교를 둘러싼 이와 같은 악조건은 한국전쟁 아래서도 계속되었지만, 이러한 어려움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의 염원…그것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조국의 다음 세대를 짊어질 아이들에게는 망국의 백성, 식민지 노예로서 굴욕당하며 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마음은 공립 조선인학교나 민족학급에서 가르치는 조선인 교사에게 또한 공통된 마음이었다.

자주 학교가 민족교육의 등불을 순수히 계속 피워 나가고자 한 것이었다면, 이것을 공립학교 체제 안에서 최대한으로 추구하고자 한 것이 공립학교로 이행한 학교들일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유형이다.

이것들은 대부분 1949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서 공립학교로 이행했는데, 형식상 공립 독립학교(예를 들면, 도립 제1 조선인 소학교)에서 공립분교(예를 들면, 가와사키 시립 櫻本 소학교 분교)로 나눌 수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같은 것이었다.

공립화를 통해 일본의 교육과정에 얽매고 일본인 교사가 교육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민족교육의 핵심을 박탈하려 한 것이지만, 조선인 학생의 집단교육이 지켜지고 재정적 보장도 일정하게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공립학교 체제 속에서 어떻게 민족교육을 실질화 시켜 나갈 것인가가 새로운 과제로 부상하였다.

1952년 4월 현재, 도립 조선인학교 14개 교외에 공립분교로서 효고(8), 가나가와(5), 아이치(나고야 시내 3), 거기에 오사카, 오카야마, 야마구치에 각 1개 교가 있었다. 그러나 오사카(連島 소·중학교 분교)와 야마구치(向山소학교 분교)에서는 조선인 교사가 한 명도 채용되지 않았으므로 조선인 측은 분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이 두 개 교는 공립으로 이관할 당시 재적해 있던 학생들이 졸업함과 동시에 폐교하기로 되어 있었다, 다른 공립학교로서의 조선인학교는 모두 조선인 교사를 채용하고(단, 전임강사), 1955년 이후에는 공립학교를 탈피하여 다시 자주 학교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공립학교로서의 조선인학교라는 제도는 재일조선인이 많이 살고 있고, 민족교육을 추구하는 집단적 역량이 하나로 통합된 도현(都縣 )에서 쟁취해 낸, 한국전쟁기의 특유한 학교제도였다. 내부적으로는 위로부터 강제된 동화교육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조선인 학생·교사·부모의 요구가 집단으로 조직되어 있는 한 상당한 정도로 실질적인 민족교육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측에서 보면, 이것은 전전의 ‘분리학교’ 사상의 부활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었다. 운동론적으로는 분명 문부성 통달과 조선인 요구에 대한 타협의 산물이었다. 도현위가 현실적으로 가장 우려한 점은 조선인 학생들의 일제 전학에 따라 일본인 학교에서 일어날 교육 질서의 혼란이었다. 말하자면 조선인 학생을 ‘귀찮은 존재로 보는 논리’였다.

이에 대해 일본인 학부모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이 관점에서 오사카 北鶴橋소학교의 PTA회장은 조선인학교의 폐쇄를 반대하는 전단을 뿌릴 정도였다. 이는 문부성의 본심인 공립분교를 인정하지 말라는 압력을 거부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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